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데 뒷모습뿐 아니라 전부를 흡수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의식하지 않고 내뱉는 내 말을 그대로 따라 말하는 순간, 또 다른 나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아직 혼자서 머리정리가 안 되는 여자아이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어주는 건 중요한 의식이다. 뛰고 놀아도 산발이나 추노(?)같이 변신하지 않도록 잘 빗어 고정해주어야 한다. 긴 머리카락을 빗어주면서 자주 고운 머릿결에 감탄했다. 그때 "너는 어쩜 이렇게 머릿결이 좋니.."라고 했던 말을 복사, 붙여넣기한듯 똑같이 아이가 말했다.
엄마을 닮아서 좋은가라는 아이 말에 태생이 반곱슬인 나는 아닐꺼라 선을 긋었다. 그럼 대체 누구일까 함께 추리를 시작한다. 아빠를 닮았나? 글쎄..현재의 머릿결을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말이지. 할머니? 할아버지? 가족을 넘어 친척들까지 떠올려보다 외삼촌이 어릴 때 참머리였다는 생각이 났다. 그런 걸 외삼촌을 닮을 수 있건지 대화주제가 넘어가고 유전자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런 나와 언니의 대화를 듣던 둘째가대뜸 말을 던진다.
"엄마, 유전자 이야기 좀 그만해! 자꾸 유전자,유전자 하니까 오미자가 생각이 나잖아..
먹고 싶으니까 그만 이야기해~"
"....."(그게 무슨 상관인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줄긋기로 연결하는 이 아이는 아직 놀고싶은 시간만큼 궁금한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은 여덟살이다.
유전자와 오미자는 대체 어떤 상관이냐고 하니 이름이 비슷하지 않냐는 당당함에 놀라게 된다. 유전자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때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자주 마시는 오미자차를 떠올렸다고 한다. 인간은 경험하고 아는 영역에 한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데 아직 모르는 일이 많은 아이가 아는 세계와 연결해서 이해하는 건 당연하기도 하다.
1학년이 되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듯 고백한 일도 생각난다. 일곱 살 때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은 방글방글 웃으며 반겨주는 선생님이 있을꺼라고 상상했단다.
"방과 후 = 반가운"
기대를 가지고 입학했는데 그냥 공부하는 곳이었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아이는 절대 연결성이 없는 것을 마구잡이로 선을 그어 잇는 독보적인 창의적 세계를 가졌다. 어떤 영역이나 상식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그런 공간말이다.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정재승의 [열 두 발자국] 이란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창의적이려면 문제를 굉장히 다양하고 이질적인 각도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지적인 대화를 하고 영감을 주고 받고 지식도 섭취하고 흡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혁신의 실마리는 늘 엉뚱한 곳에 있습니다. ......(중략)
창의적인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아니라 창의적인 순간이 있을 뿐입니다.
어른인 내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여행지에서 만나는 새로움이 창의적 순간 정도이다. 어른의 제한적인 순간에 비하면 아이의 세계는 그야말로 그 자체가 창의적 순간이다. 창의적인 것은 가장 연관성없는 지점의 것이 만나서 반응한다. 수 많은 서로 다른 영역의 접점에서 결함하고 중첩되고 장벽을 파괴시키면서 새로운 장르가 생겨난다.
글쓰는 엄마로 살다보니 특별한 렌즈로 일상을 해석하고 글로 옮기는 작가를 부러워한 적 있다.아니, 지금도 부럽다. 죽었다 깨어나면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왜 꼭 서점에서 책 제목으로 마주해야 나도 비슷한 경험있는데 생각이 날까? 과학적 근거라곤 없는 아쉬움인데 나혼자 입안이 쓰다.
82년생 김지영의 삶을 살고있는데 왜 나는 쓸수없는지 똑같이 아이를 낳았는데 누군가는 양육과 모성애에 관한 글을 쓰고 나는 육퇴 후 혼맥으로만 위로할 수있다 생각했을까?
작가라면 특히나 재해석하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세계를 창의적 순간으로 바꾸려면 기존의 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해석해야한다. 새로운 관점은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바라봐야 보인다. 어른의 필터가 손익과 실리로 작동하는데 아이는 호기심의 필터로 열심히 스캐닝을 해댄다. 그러니 기상천외한 이미지와 연결하고 고리를 걸어 사차원급 상상을 한다.
피부가 한 계절이 다르게 노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어서 젊어지고 싶은 요즘인데 오늘보니 아이의 피부보다 아이의 머릿속도 부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