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신짜오 신짜오>

마음을 나누다

by 문영

친구가 되는 데는 국경이 필요 없다. 상대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 서로 마음이 통하면 그렇게 친구가 된다. 최은영은 이번 작품에서도 관계에 집중한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외로움.

문득, 작가의 삶이 궁금해졌다. 작가는 어떤 모습의 삶을 살았을까. 작품에 공감하다 보니 작가의 삶이 나의 삶과 닮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나는 최은영의 팬이 되었다. 물론 섣부른 판단이다.


나는 어렸을 적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이상하게 속하지 못하는 이질감이 있었다. 커서는 그게 너무나 순진했었기 때문이라는(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해하질 못할) 이유를 찾았다. 아무튼 그 이질감 속에서 전학을 가고 싶었다. 나의 이미지가 전혀 잡혀 있지 않은 곳으로. 그러나 자식이 최우선이었던 부모님은 전학가지 않아도 되는 반경에서만 집을 선택하셨고 덕분에 잦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전학의 경험이 없다. 그래서 작중 우드스탁의 마음을 알듯 모른다.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친구와 이별하고 다시 만나는 과정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나 무언가 알 듯도 하게 작가는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우드스탁과 투이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아니 두 가정이 둘도 없는 친구였다. 유럽에 사는 동양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이다. 응웬 씨는 우드스탁 어머니를 살뜰히 챙겼다. 특별히 뭔가를 엄청나게 잘해준 것이 아니라 우드스탁 어머니를 칭찬하고 또 칭찬하였다.


영업의 최고 기술은 칭찬이라고 남편은 여러 번 말했다. 한국인은 그 칭찬에 인색하다고. 살찐 걸, 나이 먹은 걸 빤히 아는데 오랜만에 만나면 꼭 그 인사부터 한다고 툴툴댔다. 왜 이렇게 살쪘니, 왜 이렇게 나이 먹었니.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정말 걱정스럽고 궁금하여도 그 말을 꾹꾹 삼켰다. 대신 애정을 담아 좋은 점을 찾으려 했다. 그러면 보인다, 타인의 좋은 점이.


응웬도 그렇게 타인의 좋은 점을 찾아 거리낌 없이 칭찬하는 사람이었다. 응웬 씨가 좋은 사람임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작가는 이렇게 따뜻한 사람으로 사회의 비극성을 부각했다. 우드스탁은 몰랐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이 어땠는지를. 그것을 기회가 없었다. 한국은 그냥 식민지 치하를 겪은, 먼저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은 착한 민족일 뿐이었다. 나도 어렸을 적 역사 시간에 그렇게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은 순하디 순한, 엄청난 고통만 받았던 민족의 나라였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에겐 아니었다. 한국은 미국을 도와 베트남 인을 무참히 학살한 잔인한 사람들의 나라였다.


하필 응웬 씨 부부의 가족이 그 한국군의 피해자였고, 하필 우드스탁 아버지의 형이 그 베트남 전에서 전사한 사람이었다. 운명은 이렇게나 가혹하다. 두 가정의 관계는 그 진실이 밝혀진 후 끝나 버렸다.






얼마 전에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에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한때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보면서 일본에 격분했었고 영화 [동주]나 [안중근]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쿄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서울과 너무 유사한 분위기에 괜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생각도 했다. 거기까지 왔음에도 일본 사람에게 편견과 반감을 보이는 내가 웃겼다.


내 가족과 상관없음에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일본에 반감을 가진 것이다. 이것만 봐도 응웬 씨가 처음에 우드스탁 가족에게 보인 호감이 보통 일이 아니었음을, 진심으로 사람만 봤던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순수하게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봐주던 사람이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의 차이로 상처받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모르는 게 가끔은 죄가 되기도 한다. 우드스탁이 몰라서 한 말이 투이 가족을 찔렀다. 우드스탁은 그 죄책감에 투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안타까운 건 우드스탁 어머니의 외로움이다. 응웬 씨를 잃고 그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은 철저히 혼자가 되어 뜨개질만 하고 멍하니 벽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 평생을 그렇게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초등학교 시절에 느낀 이질감도 내가 세상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천진난만했던 나는 또래 친구들의 흐름에도 따라가지 못했다. 유행하는 노래를 몰랐고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선물의 수준도 몰랐다. 교사가 요구하는 것의 의미도 모른 채 학급용품이라는 명목의 뇌물을 갖다 바쳤고 선생님이 부탁하는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나서 자발적으로 했었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쏜살같이 집으로 뛰어가 책을 보거나 공부를 했다. 그게 우리 집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가 사춘기가 되어서 나를 그렇게 만든 어른들에게 분노하며 친구만 따라다녔고 공부를 멀리 했었다. 안타깝게도 사춘기도 늦었다. 공부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에 어린 시절의 보상이라도 요구하듯이 그렇게 친구를 찾았고 친구들 속에서 행복하면서 친구들을 잃을까 불안해했었다. 친구들의 모든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 섬세함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됐다. 지금도 여전히 친구가 좋고 친구를 찾지만, 정말 친한 친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나만의 굴을 파고들어 간다. 그래서인가? 우드스탁 어머니의 외로움과 멍하니 벽을 바라보는 행위가 이상하게 친숙했다.




독일을 가 본 적이 없고 이민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면서 독일 시골 마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느낌은 무엇일까.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 친구들이 없는 나라는 얼마나 외로울까. 아직도 이민은 상상만 해도 오싹하다. 그래서 나는 유학이나 이민을 가는 친구들이 항상 멋있고 존경스럽다. 다행히 우드스탁은 어머니를 이해한 듯하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지낸 유년 시절의 아픔을 이겨낸 듯하다. 우드스탁의 상처를 보며 뜨끔했다. 남편과 사이가 좋아야 하는 것도 어쩌면 부모로서 갖추어야 하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 앞에서 얼마나 싸웠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우드스탁은 투이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응웬 씨도 본인이 우드스탁의 어머니를 살렸음을 몰랐을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개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 사람이 모인 덩어리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니 그 규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아야만 한다. 개개인이 잘 살아야 다른 개개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개개인이 잘 살아야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잘살아야 함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잘 사는 방법은 타인을 공감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공동체도 개인을 공감하고 사랑한다면, 그렇게 품기만 한다면, 전쟁은 없지 않을까. 너무도 이상적인 그러나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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