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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l 20. 2023

삼투와 신호등

저주받은 몫의 해소와 조금은 균형 잡힌 세상을 상상하며

돈, 삼투되지 않는 것


삼투 현상은 농도의 차이에 의해 물이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은 정해져 있다. 물은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간다. 채소나 고기에 소금을 뿌리면 물이 빠져 나온다. 농도를 맞추기 위한 물의 움직임이다. 많은 것은 적은 쪽으로 가서 결과적으로 같아진다. 


비슷한 현상은 많다. 빨래를 말리는 것도 그렇다. 건조한 베란다에 축축한 빨래를 널면 옷의 수분이 빠져 나와서 베란다가 습해진다. 베란다가 완벽히 밀폐되어 있다면 빨래와 베란다가 비슷한 수준으로 촉촉해질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베란다에도 수많은 틈이 있어서 습도도 떨어지고 빨래도 마르는 것이겠지만. 


이런 현상들을 볼 때마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이 만든 규칙에도 삼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물은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이동하는데, 돈은 그렇게 이동하지 않는다. 어쩌면 단순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돈도 순환하고 흐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물처럼 움직이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돈은 쌓이기만 한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저주받은 몫


에로티시즘 소설들로 더 많이 알려진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경제에 대한 자신의 저작 <저주받은 몫>에서 그렇게 계속 쌓이다가 그 무엇의 발전에도 제대로 쓰일 수 없을 만큼 쌓여버린 잉여를 '저주받은 몫'이라고 불렀다. 과도한 잉여가 '저주받은' 이유는 그것이 온갖 폭력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쟁이다. 전쟁과 폭력은 저주받은 몫이 해소되는 하나의 양상이다. 


그래서 그는 멈춤 없이 발전하고 축적하는 경제 대신, 저주받은 몫을 (미리) 소모하는 경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길이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며 대량의 자원을 낭비하는 아즈텍의 희생제의도, 경쟁적으로 선물을 주고받거나 권력을 과시하고자 가진 재산을 바다에 버리는 등의 '포틀래치' 행위도 '저주받은 몫'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바타유는 주장했다.


낭비하고 소모함으로써 재산은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이동한다. 이때 적은 곳이 덜 가진 사람만을 의미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바다가 될 수도, 텅 빈 땅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수준 이상의 잉여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을 불러오는 축적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희생제의와 포틀래치를 가능하게 한 권력은 다름 아닌 삼투압인 것이다. 


신호등, 삼투의 인공물


삼투는 무언가를 같게 만들고, 같아진 바로 그 지점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바로 그 점에서 나는 삼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공물이 다름 아닌 신호등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온 사람이든, 늦게 온 사람이든, 신호가 바뀌기 전에 오기만 한다면 이들은 같은 출발선에 서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중간에 뒤처지고,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 같은 구간에 멈춰 서도 누군가는 좀 더 앞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의 출발선은 다르고 신호등은 없는 지금의 세상과 비교한다면, 신호등은 분명 약간의 균형을 만들어 줄 것이다. 누군가가 너무 뒤처지면 신호등을 껐다 켰다 할 수도 있다. 신호의 길이를 조정할 수도 있다. 출발점은 모두 다르고, 몸이 모두 다르기에 움직이는 속도도 모두 다르다. 이건 아무리 맞추려고 해도 맞출 수 없다. 


그러니 맞출 수 있는 건 이들이 놓인 공간이다. 장애물 없이 펼쳐진 끝없는 운동장 대신에, 신호등이 군데군데 있는 횡단보도들의 연쇄를 상상해보자. 너무 많은 잉여를 가진 이가 특정 구간에서 그것을 낭비하고 소모함으로써 다른 이들과 같아지는 사건이 주기적으로 일어난다고 상상해보자. 불평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건 분명 '있다가도 없는 것'에 가까워질 것이다. 


관심경제의 저주


그러나 지금 사회의 낭비나 소모, 혹은 사치는 희생제의나 포틀래치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치를 전시함으로써 권력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치를 할 잉여를 얻는다. 저주받은 몫은 예방되거나 해소되는 대신 적극적으로 추구된다. 사치를 전시해서 관심을 얻고 관심을 자원화해서 돈을 버는 인플루언서들에 대해 대중은 언제나 비난과 악플을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저주받은 몫은 물리적 전쟁 대신 데이터로 전송되어 뇌세포에 닿는 폭력을 낳는다. 


과도한 '좋아요'와 '팔로워 수', 이를 통해 얻는 과분한 '관심'은 관심경제 시대의 저주받은 몫이다. 사치가 과시욕을 채워주고 권력을 줄지언정 또 다른 잉여를 얻는 자원이 되지는 않는 사회를 구상해야 한다. 사치, 낭비, 소모는 잉여를 위한 자원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 관심이 관심을 끌어당기기보다, 관심은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관심의 삼투가 필요하다. 그것이 관심경제의 저주를 해소하는 길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관심경제, 나아가 사회의 각 영역을 움직이는 원리에 삼투를 삽입해야 한다. 삼투를 삽입하기 위해 우리는 각 영역에 맞는 신호등을 발명해야 한다. 삼투와 신호등이라는 표상을 더 구체적인 발명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머리를 모아야 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조금은 더 균형 잡힌 세상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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