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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11. 2023

시신이 묻힌 곳은 풀이 윤기가 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이후, 그곳 빈민들의 삶에는 재난이 스며들었다. 집은 무너졌고, 국가는 임시로 트레일러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별 노력을 하지 않았다. 허리케인으로 시작된 재난은 국가와 사회의 무책임이라는 형태로 이어져서 사람들의 몸 안에 새겨졌다(Vincanne Adams et al, “Chronic Disaster Syndrome: Displacement, Disaster Capitalism, and the Eviction of the Poor from New Orleans” 2009).


이때 자원봉사자들은 집이 무너진 폐허들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자 ‘잡초’를 정리했다. 정리하지 않으면 집을 새로 짓기 어려울 만큼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던 걸까. 이름 없는, 혹은 그 현장에서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던 그 풀들은 잔해의 일부로 취급되었다. 사람이 살 때는 항상 예초기에 잘려나간 그 풀들은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잔해에서만 그만큼 자랄 수 있었다.


내가 항상 지나다니는 길목에는 문 닫은 고철상이 있다. 폐지도 취급했었으니 고철상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으려나. 그곳은 몇 년 전의 어느 날 문이 닫히고 나서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차량이 수시로 드나드니 문 앞에 주차하지 말라는 표지판이 무색하게도, 구겨진 플라스틱 주차금지봉만이 항상 녹슨 파란 철문 앞을 지키고 있다. 이제 차량도 사람도 수레도 드나들지 않는 그곳에 가득해진 건 과장 조금 보태 내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풀들이다.


재야생화(rewilding)는 기본적으로 어떤 공간의 ‘야생 상태’를 전제하고 그에 맞추어 생태계를 조절하는 것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사람이 떠난 공간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포함된다. 독일의 체르노빌이나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일은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식물이 자라나는 곳.


하지만 이 말은 여러 비판을 마주하기도 한다. 자연 혹은 야생과 인간을 오히려 뚝 잘라서 보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인간 혹은 문명이 없는 상태의 자연을 상상하고 생태계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곧 자연을 그저 낭만적인 것으로 표상하고, 인간은 자연의 바깥에서 그것을 ‘보호’하는 존재로 가정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허리케인과 무책임한 국가에 의해 집과 사람이 쓸려나간 자리에서 잡초들은 무성하게 자랐다. 2019년에 현장연구차 다녀온 계화도에는 간척사업 이후 버려진 수협 창고 건물에서 인간이 만든 쓰레기를 덮고 온갖 풀과 벌레가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이 푸름이 그저 아름답게 보일 수는 없었다. 시신이 묻힌 곳은 풀이 더 윤기가 돈다고 했으니까. 잔디가 묘지를 덮는 것처럼.


잡초를 정리해서 집터를 마련하는 일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잡초를 모조리 태우지 않고서도 집을 짓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이다. 자연과 인간은 언제나 서로 섞여 살았다. 자연을 없애고 건물을 올리는 대신, 자연의 리듬과 문명의 리듬을 맞춰나가야 한다. 그렇게 자연과 뒤엉켜 세워진 안전한 집에서 살아가는 게 모두의 일상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때, 시신이 묻히지 않은 곳에서도 풀에 윤기가 돌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죽음 위에서 살기보다, 서로의 삶에 엉켜서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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