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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노을 Aug 16. 2020

시장 냄새

눈코입으로 맡는 사람 냄새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동네 시장을 찾았다. 나는 시장을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시장 자체보다는 시장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한다. 이곳에서는 냄새를 코로 맡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도, 귀로도 맡을 수 있다.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배추 파는 아줌마의 억쌘 팔에서 나는 냄새. 물건을 살 것처럼 들었다 놨다 반복하는 젊은 새댁을 향해 한 바가지 욕설을 퍼붓는 할머니의 욕 냄새. 그리고 생선을 파는 아저씨의 화려한 입담에서 나는 냄새까지. 시장에 가면 맡을 수 있는 다양한 냄새에 나는 오늘도 따스함을 느낀다.


코너를 돌아 닭강정을 파는 가게 앞에 다다르자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비좁은 틈 사이로 빼곡히 줄 서있는 걸 보니 맛집은 맛집인가 보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그렇다. 생각도 없다가 갑자기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닭강정이 먹고 싶어 졌다. 순한 맛과 매운맛을 사이에 두고 "어떤 걸로 드릴까요?"라고 물어올 주인아줌마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닭강정 앞으로 다가섰다. 고개를 푹 숙여 더 맛있어 보이는 놈이 어떤 녀석인가 고개를 흔들어가며 확인한 후 순한 맛을 먹기로 결정을 했다.


시장은 참 신비한 힘이 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이,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떡볶이는 왜 그렇게 맛있게 보이는 걸까? 닭강정을 먹기로 결심을 하고 줄을 섰지만 신경은 온통 떡볶이 집에 가 있었다. 곧 소유하게 될 것을 앞에 두고 또 다른 먹잇감을 노리는 나 자신이 꼭 사자의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이 느꺼졌다.


"많이 주세요"

안녕하세요 라고 안부를 묻는 인사도 없이 다급하게 많이 달라는 요구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갑자기 내가 싫어지는 순간이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다짜고짜 많이 달라는 나의 무례한 요구를 들은 아주머니는 뭘 많이 달라는 건지 명확하게 말하라는 것만 같았다.


"아, 순한 맛이요"


"뭘 달랐는지 먼저 말을 해야지"


이내 아주머니의 본심이 살그머니 흘러나왔다. 그래서일까? 앞서 사간 아저씨의 비닐봉지에 담긴 닭강정보다 내 것이 적어 보이는 건 뭐람. 그렇다고 더 달라기 뭐해 서둘러 계산을 하고 떡볶이 집을 향했다.

나는 '사람 냄새' 나는 시장이 좋다.


발걸음이 떡볶이 집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손등이 이미 거칠대로 거칠어진 할머니와 힘 없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떡볶이 한 접시를 나눠 드시기 위해 나란히 서계셨다. 그리고는 집게를 힘차게 들어 올려 튀김을 자그마한 바구니에 하나둘씩 담기 시작했다. '젊은 날에도 그랬을까? 할아버지는 삶의 모든 주도권을 할머니에게 내어주셨을까?' 튀김을 고르는 할머니 옆에서 할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진 않았겠지. 나이가 들어 힘이 빠지니 이제 할머니가 주도권을 잡으신 거겠지' 하는 생각이 잔잔히 스쳐갔다. 그럴 만도 한 게 먹고 싶은 튀김을 할머니 마음대로 고른다는 사실이 암묵적으로 '주는 대로 먹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구마튀김을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는 걸 좋아하는데, 이대로라면 순리대로 김말이 튀김을 좋아하는 아내의 결정에 잠잠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내가 말했다.


"짜장면 먹을래?"


"어"


방금 전까지 떡볶이와 튀김. 그리고 노(老) 부부와 인생의 보이지 않는 연결점들을 이어가며 한 편의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짜장면은 정말 '갑툭튀'였다. 걸어오던 길에서 뒤로 돌아 쭉 걷다 왼쪽 골목으로 돌자 '짜장면 2000원'이라는 간판이 선명한 중국집, 아니 짜장면 집이 있었다. 허름해 보이는 외관에서 이미 짜장면을 가격으로 승부 보려는 주인장의 속셈이 그대로 묻어났다. 웬걸? 주문한 지 5분도 안돼서 나온 짜장면은 정말 2000원어치처럼 생겼다. 젓가락을 휘휘 저으며 면치기를 세 번 하니 한 그릇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음은 얼마 전 짜장면이 먹고 싶어 편의점 라면 코너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이 순간 스쳤기 때문이었다. 가지런히 나를 노려보는 라면들을 휙 뒤집어까서 숫자가 진하게 쓰여 있는 가격표를 생각해보니, 이 정도면 짜장면을 500원이나 더 받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장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그곳에서 울고 웃는 우리네 이웃들.

500원을 깎아주네 마네 실랑이를 벌이며 파 한 단을 더 챙기려는 우리네 이웃들이 살아가는 그 세상.

나는 이 곳 시장이 좋다. 사람이 좋다. 그들에게서 나는 사람 냄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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