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우리는 서로의 연예인이었다
“이모, 지난주에 나 없이 혼자 추억열차 잘 탔더라?”
토요일 오후, 카페 창가.
조카가 아이스라떼 빨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보랏빛 소녀 시절?
완전 순정만화잖아, 뭐야 이모.
내가 아는 이모는 맨날 바쁘고 잔소리 많은 어른인데.”
나는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야, 나도 한때는 상큼했거든?
너 없으니까 더 멀리까지 타봤지.
징검다리도 건너고, 산도 올라가고, 교회 오빠도 만나고…”
조카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갑자기 표정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근데 있잖아, 이모. 나 자꾸 생각나더라.
이모한테 곰인형 줬던 그 친구 있잖아.
이모가 첫사랑이라고 했던, 그 소년.
그 사람 지금 부인은…
진짜 기분 안 나빴을까?
자기 남편 첫사랑이 이모였다는 거… 몰랐을까?”
질문이 생각보다 깊었다.
나는 잔 표면에 맺힌 휘핑크림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얘기는 말이지…
롯데리아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그 소년과의 첫 장면은
19화에서 이야기했던 수학 학원 복도였다.
손에는 작은 곰인형을 들고,
“고민 있으면 이 인형한테 먼저 말해 보라”던
그 서툰 다정함.
그게 첫 장면이었다면,
두 번째 장면은 롯데리아였다.
1980년대 후반, 토요일 오후.
도심 한복판, 붉은 간판 아래 롯데리아.
창가 자리에는
불고기버거 세트 네 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튀김,
케첩이 어지럽게 튄 빨간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나,
내 여자친구 A,
곰인형(고민인형)을 줬던 그 소년,
그리고 소년의 친구까지.
우리는 넷이 마주 앉아 있었다.
“아, 맞다. 이거.”
소년이 가방에서
하얀 도화지 한 장과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도화지 위에는
볼펜과 색연필로 그린 소녀가 서 있었다.
롱코트를 입고, 긴 머리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이거… 너야.”
나는 얼떨떨하게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어? 나 머리 저렇게까지 길지도 않은데?”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나중엔 이렇게 될 것 같아서.
미리 그려봤어.”
옆에 앉아 있던 A가
도화지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감탄했다.
“와, 진짜 닮았다.
야, 너 미대 가야겠다. 그림 너무 잘 그린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미대로 갔다.)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번엔 유리병을 내밀었다.
유리병 안에는
색색의 종이학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뭐야?”
내가 묻자,
A가 먼저 말했다.
”천 마리 접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맞지? 나 예전에 잡지에서 봤어.”
소년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천 마리까진 아니고…
한 삼백 마리쯤? 그래도 손가락 아프게 열심히 접었어.
고민 많을 때 이거 하나씩 꺼내 보면서
“그래도 세상에 예쁜 색깔이 많다’ 그런 생각 들면 좋겠다 싶어서.
그리고… 가끔 내 생각도 조금 해주고.”
A가 유리병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야, 이 병 다 채우면
그때는 누구 줄 건데?
혹시… 나?”
그 말이 끝나자,
A의 눈빛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 그날 롯데리아의 공기가
조금 다른 색으로 번진 것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그 눈빛의 온도를 읽을 줄 몰랐다.
그저 웃으며 말했다.
“병도 학 모양이네? 진짜 예쁘다.
너, 손재주 진짜 좋다.”
소년은
도화지와 유리병을 둘 다
조용히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거 둘 다 너 가져.
그냥… 네가 떠올라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 너 같아서.”
그 순간,
A의 손이 아주 잠깐
유리병 뚜껑을 스쳐 지나갔다.
“우와… 좋겠다, 너.”
그 말에는
진심 반, 부러움 반,
그리고 내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또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날 이후로 A는 자주 말했다.
“쟤 진짜 재밌지 않냐?
어제 수학 시간에 한 농담 기억나? 나 진짜 배꼽 빠지는 줄 알았어.
아, 그리고
혹시 그 소년한테 전화 오면
나도 같이 만나자고 해줘.
둘이 만나면 어색하잖아.
셋이 있으면 덜 어색하니까.”
나는 그 말을
정말 ‘액면 그대로’ 믿었다.
지금 돌아보니 알겠다.
그날 롯데리아 창가의 공기에는
나도, 소년도, A도
제각각 다른 기대와 설렘을 품고 앉아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셋 중
아무도 자기 마음을
정확히 말할 줄 모르는 나이였다는 걸.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롯데리아 장면은
우리 셋의 마음속에
다른 색깔로 저장됐다.
• 나에게는 곰인형과 종이학을 받았던 순정만화 같은 하루로,
• A에게는 첫사랑과 베스트프렌드가 한 프레임에 담긴 복잡한 셔터 한 장으로,
• 소년에게는 말하지 못한 감정이 케첩과 콜라 냄새 사이에 숨어 있던 어색한 오후로.
세월이 흘러
우리는 각자 다른 학교와 도시로 흩어졌다.
다시 우리를 이어준 건
싸이월드였다.
어느 날,
내 미니홈피에
익숙한 닉네임의 댓글이 달렸다.
“야, 우리 롯데리아 멤버들 잘 지내고 있을까?”
파도타기를 타고 들어가 보니
곰인형 소년과 A는
서로의 일촌 목록 안에서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남사친·여사친처럼
댓글 몇 줄, 방명록 몇 줄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러다 어느 날,
A가 내게 쪽지를 보냈다.
“야, 나 요즘 이상한 상담 하나 듣는 중인데…
주인공이 자꾸 너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고, 좀 웃기다.”
알고 보니
그 소년이 A에게 연애 상담을 요청한 것이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
그 애는 진짜 자기가 어떤 사람인 줄도 잘 모르고,
항상 남 얘기 먼저 들어주고,
나한테 고민 얘기 많이 하는 애야.
머리 길고… 좀 소심한데 밝은 애.”
처음에 A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이건 백 퍼센트 내 친구(나) 얘기다.
얘, 아직도 쟤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A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솔직해져야지”라며
온갖 조언을 쏟아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근데… 이 특징들,
나 같기도 한데?”
상담이 길어질수록
소년의 말속에는
‘나’와 ‘A’가 희미하게 겹쳐져 있었다고 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A는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이건 착각일 수 있다.
근데… 착각이면 어때?
내가 조금 먼저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그 뒤로 두 사람은
조금 더 자주 메신저를 켰고,
조금 더 자주 서로의 일기에 댓글을 달았다.
언젠가부터 그 상담은
제3의 누군가가 아니라
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둘은 연애를 시작했고,
결국 결혼까지 했다.
나중에 A는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랑은 한 여자의 착각에서 시작된 것 같아.
근데 인연이 되려면
그런 착각조차도 예쁘게 자라나나 봐.
결국 나는 첫사랑이랑 결혼했잖아.”
결혼생활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마지막에 덧붙였다.
“결혼은 현실이지.
애 키우고 살다 보면
서로가 너무 지겨울 때도 있어.
근데 말이야…
중학교 때 롯데리아에서 처음 봤던
지금의 남편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미움이 좀 사라져.
첫사랑은 결국,
마음속에 품어놓은
영원한 환상 같은 거니까.”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툭, 하고 내려앉았다.
첫사랑이 결혼이 되었다고 해서
성공한 사랑만은 아닐 것이다.
결혼에 이르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한 사랑도 아니다.
첫사랑은
연애 여부나 결혼 성패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오래 빛나는 한 장면에 가깝다.
그리고 그 장면 안에서
우리는 종종,
서로의 ‘연예인’이 된다.
조카가 내 캐러멜마키아토 위 휘핑크림을
빨대로 저으며 말했다.
“이모, 롯데리아 얘기 들으니까…
나 얼마 전에 본 옛날 영화 하나가 계속 생각나.”
그녀가 꺼낸 영화는 <건축학개론〉이었다.
“아니, 거기서 남자가 첫사랑 얘기하다가
지금 여자친구가 ‘그 쌍년은 잘 지내?’ 이러잖아.
그 장면 보고 나 진짜 멈칫했어.
아니, 도대체 첫사랑을
그런 말로 정리하는 게 가능해?”
나는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섞인
작은 숨을 내쉬었다.
“그 장면, 진짜 많은 사람한테 충격이었지.”
<건축학개론〉의 첫사랑은
늘 남자의 시선으로 조금 미화되어 있다.
재개발 앞둔 골목, 오래된 집,
CD플레이어에 넣어 듣던 전람회 1집.
그 속에서 여자의 서사는
끝내 온전히 보이지 않는다.
관객이 보는 건 언제나
기억 속에서 다듬어진 첫사랑의 잔상이다.
그래서 ‘쌍년’ 같은 말은
불편하면서도, 어딘가 이해되는 감정이다.
말로 설명되지 못한 마음,
오랫동안 묵은 오해,
너무 늦게 도착한 후회의 찌꺼기.
감정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서툰 말로 흘러나오기도 한다.
조카가 물었다.
“첫사랑이 그렇게 욕으로 바뀔 수도 있는 거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욕이라기보다…
미완성으로 남은 감정의 뒤틀림 같아.
어린 날의 마음은 정리가 안 돼서
엉뚱한 말로 새어 나올 때가 있거든.”
그 말을 하다 보니,
내 기억 속 CD 한 장이 떠올랐다.
비가 잔잔히 내리던 어느 날,
같은 과 남학생이 CD 한 장을 건넸다.
“전람회 1집 들어봤어?
첫 곡… 밤에 들으면 조금 슬플지도 몰라.”
집에 돌아와 CD 플레이어에 넣고
첫 곡 <기억의 습작〉이 흐르던 순간,
나는 이름 모를 감정에 휩싸였다.
설렘인지, 그리움인지,
사랑의 첫 그림자인지.
그와 나는 사귀지도 않았고,
‘사귈 뻔한 사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그저,
내가 다른 선배와 웃으며 이야기하면
그의 얼굴이 어딘가 굳어 있었고,
나는 그 표정을 보고
괜히 마음이 철렁했다.
둘 다 서툴렀고,
둘 다 감정의 이름을 몰랐고,
둘 다 타이밍을 놓쳤다.
나중에 〈건축학개론〉을 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세대 모두에겐
제대로 말해보지도 못하고 끝난
건축학개론 한 편쯤은 있었지.”
누군가에게 나는
조금 좋아했지만 끝내 닿지 못한 사람,
누군가에게 그는
미완성의 스케치처럼 남은 사람.
그래서 누군가는
첫사랑을 욕으로 부르며 웃어넘기고,
누군가는 그날의 CD를
아직도 버리지 못한다.
“근데 이모, 이모는 진짜 연예인도 많이 만났잖아.”
조카가 빨대를 빙그르르 돌리며 물었다.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 대학로 사람들…
그 사람들한테 이모는 뭐였을까? 팬? 기자?
아니면… 살짝 썸?”
나는 피식 웃었다.
“야, 내가 무슨 배우랑 썸을 타.
근데… 아주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조카의 눈이 번쩍였다.
“헐, 이모 지금 뭐라고 했어?
나 완전 집중 중이거든. 빨리 말해봐.”
그 순간,
시나리오 작가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연애도, 글도, 인생도
늘 살얼음판 위를 걷듯 하던 사람이었다.
포켓볼 내기에서
“지는 사람이 삭발하자” 했다가
진짜로 머리를 밀어버리던 여자.
삭발한 머리에 비니를 눌러쓰고
카페에 나타나던 날, 그녀는 말했다.
“나, 이번에 진짜로 써볼 거야.
이 정도 각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집에 틀어박혀 쓴 대본은
공모전에 당선되었고,
영화로 만들어졌다.
상금을 타던 날,
그녀는 곧장 차를 한 대 뽑았다.
잠실대교를 건너던 날,
나는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꼭 잡고 있었다.
“야, 무서운데?”
“무서워도 가야지.
우리 인생도 다 이런 식 아니었냐.”
그때 그녀가 물었다.
“근데 너 이상형 누구야?”
나는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솔직해졌다.
“너무 잘생기면 부담스럽고…
좀 하얗고, 조용하고, 지적이고…
눈빛에 사연 있는 사람.”
그녀는 손뼉을 딱 치며 웃었다.
“야, 그건 인간이 아니라 캐릭터다.
근데 있긴 있다.
지금 내가 쓰는 영화 남주 역할 맡은 배우가 딱 그래.”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인터뷰 핑계로… 한 번 만나볼래?”
그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의 기묘한 하루를 결정했다.
며칠 뒤, 나는
“시나리오 자문 겸 인터뷰”라는 명목으로
그와 한 카페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스크린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현실의 그는 조금 더… 사람 같았다.
말수가 적고,
생각보다 자주 웃고,
대답은 신중했고,
빛나는 조명 속 미모 대신
은근히 따뜻한 체온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
컵을 드는 손가락이
유난히 하얗고 길었다.
여자들이 괜히 반하는,
섬세하고 예쁜 손.
나는 괜히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와 말할 때마다
그 손끝이 눈에 자꾸 밟혔다.
왜 있는지도 모를 설렘이
테이블 위에 얇게 깔리는 느낌.
원래 셋이 앉아 있었는데
시나리오 작가 친구가 전화가 왔다며
“잠깐만” 하고 자리를 비웠다.
그 짧은 공백 동안
카페 안 공기가 천천히 달라졌다.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질문 정말 좋았어요.
덕분에 제가 제 캐릭터를 더 잘 이해한 것 같아요.”
나는 괜히 컵만 매만졌다.
“저도요.
배우님이 연기한 첫사랑 장면들…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미소 지었다.
스크린에서 볼 때보다 훨씬 느리고,
훨씬 따뜻한 미소.
그때 잠깐, 정말 잠깐,
테이블 위에 살짝 스친 미묘한
공기가,
썸 같았다.
그가 미소룰 지으며
질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나를 수줍게 바라봤다.
나는 그가 이웃집에 사는 ‘엄마 친구 아들‘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물었고
그도 내가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두 사람이 조금 더 알아가도 괜찮을 것 같은 거리감.
우린 눈이 마주치면
그냥,
웃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다음에 한 번 더 얘기해 볼까요?
캐릭터 분석 더 깊게 말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친구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말이었다.
친구가 돌아오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돌아갔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작은 종이 울리고 있었다.
며칠 뒤, 우리는
정말 자연스럽게,
둘만 따로 다시 ‘인터뷰‘를 했다.
그때 그는
매니저도 없이 혼자 왔다.
은근히 데이트 같은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은밀한 공기 같은 게 있었다.
우리는 영화 얘기를 했지만,
영화만 얘기한 건 아니었다.
저마다의 청춘과 실패와
불안한 마음들을 나누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연기는…
가끔 사랑의 리허설 같기도 해요.
진짜 사랑은
무대 뒤에서 연습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 문장을 들었을 때
나는 어쩐지…
그가 지금 나에게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시선이 대답할 때마다
부드럽게 내 얼굴로 돌아오는 걸
나는 계속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
단둘이 리허설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도, 나도
그 감정을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없었지만.
대화가 어느 정도 깊어질 무렵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오래 사귄 사람이 있어요.
거의 4년 가까이.
곧 부모님께 인사드릴 거예요.”
나는 그 말에 마음이 살짝 내려앉았지만
이상하게 쿨하게 미소가 나왔다.
왜냐하면,
그의 목소리에
그 여자를 향한 존중과 애정이
아주 진하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확실히 알았다.
‘아, 이 사람은…
사랑 앞에서 순정이 있는 사람이구나.’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좋아졌다.
그의 성실함, 의리, 따뜻함이.
그는 나에게도 말했다.
“근데… 오늘 정말 좋았어요.
덕분에 제 직업이
다시 좀 설레는 기분이에요.”
그 말이
너무 진심처럼 들려서
내 얼굴이 괜히 뜨거워졌다.
몇 년 뒤,
그가 그 오랜 여자친구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했다.
“그래.
그날 내가 느껴졌던 그 성실함이
저 사람과의 결혼으로 이어졌구나.”
그리고,
우리 둘의 짧은 장면은
이렇게 아름답게 끝나는 게 맞았다.
너무 길지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고,
딱 한 장면 분량의 로맨스.
스크린 속에서
잠깐 상대역이 되는 배역처럼.
그날, 카페에서 그의 손끝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슬쩍 속삭이듯 생각했다.
“연예인은 직업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이 반짝였던 순간의 이름이다.”
그리고 아주 잠깐,
스크린 속 이상형이
내 인생의 필름 한 컷에
함께 나타나 준 날.
그 장면은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조용히 반짝인다.
사회생활을 하던 어느 어린이날.
내 휴대폰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우울한 유혜성 어른이를 위해
뮤지컬 티켓 두 장을 준비했습니다.
OO아트홀에서 만나요.”
보낸 이는 뮤지컬 기획사 대표였다.
그 시절, ‘어른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전이라
나는 그 문장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 나도 우울한 어른이에 포함되나 보네.”
아는 언니 한 명을 데리고
그가 기획한 창작 뮤지컬을 보러 갔다.
커튼콜의 눈부신 조명이 꺼지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삼청동의 작은 카페로 향했다.
노란 스탠드, 오래된 LP,
대본 구석에 적힌 형광펜 자국 같은
배우의 냄새가 가득한 곳.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배우 한 명이 잠깐 들를지도 몰라요.
인터뷰 전에 얼굴도 보시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카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모, 그 정도면… 거의 구애 아닌가요?”
그때 나는 그냥 웃으며 넘겼지만
돌이켜보면, 아주 옅은 호감이
분위기 속에 섞여 있었던 것도 같다.
그때, 카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예능에서 사람들을 웃기던 이미지와 달리
수수한 니트를 걸친,
뮤지컬 배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스크린 속 ‘라이징 스타’로서의 빛과
현실 속 청년의 담백함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우리는 공연이 끝난 밤의 허탈함,
관객의 숨소리,
대사 한 줄이 자기 몸에 붙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잠깐 니체 이야기도 나왔다.
“니체는… 배우들한테 조금 위험한 위로를 주죠.”
그가 말했고,
“무대엔 디오니소스가 필요하니까요.”
내가 받아쳤다.
그 짧은 대화 안에서
나는 또 다른 얼굴을 보았다.
웃음을 짓던 화면 속 이미지 말고,
밤마다 자신의 캐릭터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섬세한 사람의 얼굴.
그와의 대화가 막 깊어지려는 순간,
카페 창밖에 불빛이 스쳤다.
검은 스포츠카가 천천히 멈췄다.
운전석 창이 내려가더니
한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딱… 아쉬움이 1초 묻어 있는 정도의 움직임.
대화가 조금만 더 이어졌으면 좋았을 것 같은
그런 표정.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만간 공연장에서 또 뵐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차의 조수석으로 걸어갔다.
그 여자에 대해
우리는 몇 마디 들었다.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의 초반 커리어를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봐 준 사람이라는 것.
그의 커리어가 막 상승하던 시절,
누구와 함께 있어도 스캔들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걸 신경 쓰지 않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기 옆의 한 사람만 보이는 표정.
그 표정이 참 아름다웠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 여자에게,
저 배우는 그냥 ‘내 남자친구’겠지.
그리고 저 여자는
그에게 가장 반짝이는 연예인일 거고.”
지금은 정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배우가 됐지만
그때 그는
사랑 앞에서는 그냥 평범한 청년이었다.
대표와 나는 남은 커피를 비우고
대학로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나중에 TV에서 볼 때마다
심장이 살짝 간질간질해지는,
내 인생의 또 다른 ‘연예인’.
그 이야기는,
조금 더 아껴두기로 한다.
카페의 공기가
조카의 말로 다시 흔들렸다.
“결국, 이모 말은 이런 거네?”
조카가 정리하듯 말했다.
“연예인은 TV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 안에서
무대 조명을 받는 사람이란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연예인은 직업명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람의 이름이기도 해.”
우리가 스무 살이던 시절을 떠올리면
장면들이 너무 선명하다.
롯데리아 빨간 트레이 위 감자튀김,
곰인형, 종이학 유리병,
수학 학원 복도,
비 오던 날 건네받은 전람회 CD,
싸이월드 파도타기,
창을 닫을까 말까 망설이던 미니홈피 화면.
말을 제대로 못 해서,
타이밍이 어긋나서,
서툴러서 놓친 사람들.
지금 돌아보면
그들 모두가 각자의 드라마 속 주연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누군가의 화면 속에서는
분명 주연이었다.
90년대 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어떤 친구에게는 IMF 이후 얼어붙은 취업 시장과
첫 월급 명세서, 대출 상환표와 나란히,
어떤 친구에게는 야근과 승진 경쟁,
회의실과 어린이집 알림장 사이를 오가는 일상과 나란히,
또 다른 친구에게는 부모 부양, 이직 고민,
혼자서 버텨야 하는 생계의 무게와 나란히,
각자의 삶 속에서
조용히 나이 들어왔을 뿐이다.
그래도 가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전주가 흐르면
우리는 고백하듯 중얼거리게 된다.
“아, 그때 우리는
서로의 첫사랑이고, 연예인처럼 빛났구나.”
조카가 조용히 말했다.
“이모, 듣고 보니까…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연예인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도 그럴 거야.
그리고 이모 세대도 마찬가지야.
우린 아직 무대에서 내려온 적 없어.
그냥… 무대의 종류가
조금씩 바뀌었을 뿐이지.”
조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근데 이모…
진짜 연예인이랑 둘이서만 만난 적도 있어?
막 파스타 먹고,
영화 보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헤어지고…
그런 거?”
나는 잠시 웃다가,
잔에 남은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
차분히 말했다.
“있지.”
조카의 의자가 덜컥거리며 앞으로 쏠렸다.
“진짜? 누구야?
나 아는 사람이야?
지금도 TV 나와?”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파스타를 같이 먹었고,
영화를 같이 봤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서로 얘기를 나눴어.
그리고 지금도 가끔
TV를 켜면 그 얼굴이 나와.”
조카는 거의 소리를 질렀다.
“이모, 진짜…
거기서 끊는 건 반칙 아니야?
그게 오늘 얘기의 핵심이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21화가 여기서 끝나는 거지.”
조카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진짜…
독자 여러분, 보셨죠?
이 집은 맨날 이렇게 중요한 데서 끊어요…”
나는 웃으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래야 22화를 또 보러 오지, 우리 조카야.’
엘리베이터 문이 “띵” 하고 닫히는 소리처럼
오늘의 이야기도 거기서 딱, 하고 닫혔다.
그다음 장면은,
다음 화에서.
싸이월드, 건축학개론, 그리고 〈연예인〉으로 본 사랑의 구조
1) 싸이월드 파도타기 – 첫사랑 찾기의 황금기
• 2000년대 초, 싸이월드는 말 그대로 ‘기억의 지도’였다.
• 일촌 파도타기를 타다 보면
초등학교 짝, 중학교 첫사랑,
롯데리아에서 감자튀김을 나눠 먹던 친구까지
한 줄의 링크로 이어졌다.
• 많은 사람들이
“결혼했니?”, “행복하니?”를
쪽지로 조심스레 물어보던 시대.
• 누군가는 그때
첫사랑의 현재를 확인했고,
누군가는 그때
비로소 첫사랑을 떠나보냈다.
2) 〈건축학개론〉 – ‘쌍년’ 한 줄이 던진 불편한 진실
• 영화 〈건축학개론〉은
90년대 학번 세대의 청춘 풍경을
정교하게 복원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 건축과 스튜디오, CD플레이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과 〈취중진담〉 같은 노래들이
배경 음악처럼 흐른다.
•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 쌍년은 잘 있대”라는 대사는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어떤 이들은
첫사랑을 그렇게 부르는 남자 주인공에게 분노했고,
• 또 어떤 이들은
그 거친 말속에 숨어 있는
자기 미숙함에 대한 분노,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분노를 보았다.
• 분명한 건, 그 한 줄이
“첫사랑은 언제나 예쁘게만 남는다”는 신화를
산산조각 내버렸다는 사실이다.
3) 싸이 〈연예인〉 - 서로의 마음이 만든 무대
• 싸이의 〈연예인〉은
“널 내 마음속 최고 스타로 모시겠다”는
유쾌한 고백송에 가깝다.
• 가사 전체를 길게 인용할 수는 없지만, 요지는 이렇다.
“남들이 뭐라든, 내 눈에는 네가 연예인이다.”
• 2000년대 초, 이 노래는
“일반인의 연예인 되기”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연예인처럼 대우해주고 싶다는
다정한 허세의 언어였다.
• 실제로 많은 커플들이
프러포즈 송, 이벤트 송으로 이 곡을 사용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연예인은 TV 속에만 있는 명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준 무대의 이름이다.
그리고 첫사랑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어떤 계절의 별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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