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23화 우리는 왜 사랑을 번역하지 못했을까-짐승남 이후의 연애 언어

by 유혜성

23화 우리는 왜 사랑을 번역하지 못했을까

-짐승남 이후의 연애 언어


“이모. 진짜 궁금한 거 하나만.”


조카가 휴대폰 화면을 슥슥 넘기다 말고 손을 멈췄다.

넷플릭스를 고르다 멈춘 얼굴은 아니었고,

사람 마음을 훑다 잠깐 걸린 얼굴에 가까웠다.


“22화에 나온 그 배우 오빠 있잖아.

이름 비공개? 오케이. 그건 인정.”


조카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못 참겠다는 듯 소파에서 상체를 벌떡 세웠다.


“그럼 이것만 말해줘.

그 사람… 테토남이었어, 에겐남이었어?”


“… 뭐?”


“이모 요즘 유행어 몰라?

테토남, 에겐남. 테토녀, 에겐녀.”


나는 웃었다.


“야, 약 이름 같아.

테토… 에겐… 그거 먹으면 피곤 풀리니?”


“호르몬에서 딴 말이야.”

조카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근데 성별 말고, 사람의 ‘결’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덧붙였다.


“요즘엔 남자답다 여자답다 이런 말, 좀 촌스러워.

그냥 ‘저 사람 결이 테토야’, ‘에겐이야’ 이렇게 말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22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 문 앞.

“띵~“하고 열리던 문.

말 한 번만 더 하면,

그날의 관계가 한 칸쯤 이동했을지도 모르는 그 순간.


그 사람을 지금의 언어로 부른다면.


테토였을까, 에겐이었을까.


무대 위에서는 단단했는데

무대 밖에서는 생각보다 조용했던 남자.


그리고

조용한 사람에게서만 들리는 종류의 다정함이 있었다.


나는 조카를 보며 말했다.


“너희는 참… 사랑도 분류표가 생겼구나.”


“분류표 아니고 번역기.”

조카가 정정했다.

“연애는 원래 번역이 필요하거든.

안 그러면 계속 오역 나.”


그 말이, 이상하게 설득력 있었다.

1. 그때 우리는 ‘짐승남’이라는 한 단어로 너무 많은 걸 덮었다


그 시절 연애 교과서에는

이런 문장들이 거의 정답처럼 적혀 있었다.


사랑은 용감해야 한다.

고백은 직진이어야 한다.

뜨거운 게 진짜다.


그때 나도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특별해서라기보다

그냥 그 시대의 공기였던 것 같다.

주변이 다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사랑했고,

그렇게 고백했으니까.


그 시절의 고백은

표현이 더 과감했고,

속도는 더 빨랐고,

확신은 의심 없이 앞으로만 향해 있었다.


“와, 진짜 상남자다.”

“어깨 봐. 짐승이야 짐승.”


재밌는 건

그 말들이 거의 전부 남자에게만 붙었다는 점이다.

‘짐승녀’ 같은 말은 거의 없었다.


여자는 늘

보호받거나, 선택하거나,

혹은 “어떤 남자를 만났느냐”로 정리되기 쉬웠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헷갈렸다.

섬세한 남자를 만나면 불안했고,

말이 많은 남자를 만나면

“남자가 왜 이렇게 감성적이야?”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 질문은 사실

그 사람을 향한 게 아니라,

우리가 오래 외워온 연애 교과서가

조용히 흔들릴 때 튀어나오는 반사였다.


2000년대에 ‘짐승돌’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도

완전히 새로운 남성성이 등장했다기보다는,

우리가 이미 익숙했던

‘남자는 몸으로 신뢰를 증명해야 한다’는 이미지를

연예인이라는 영역으로 옮겨 놓은 결과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일과 책임으로 보여주던 것들을

그 시절에는 무대와 화면 위에서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근육은 여전히 성실함이었고,

과묵함은 믿음이었고,

직진은 용기였다.


지금은 그런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대신 테토와 에겐 같은 단어가 등장했다.


짐승이냐 아니냐를 묻기보다,

밀어붙이는 결인지,

한 박자 살피는 결인지를 말한다.


시대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을 이해하려는 질문의 방식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우리는 결국

사랑을 잘하고 싶었을 뿐이다.

2. 그래서 조카의 질문은 꽤 정확했다


“그 오빠, 테토였어? 에겐이었어?”


조카는 대답을 재촉했다.


“이모. 결론만 말해줘.

테토야? 에겐이야?”


나는 잠깐 생각했다.


22화 속 그 사람은

라면을 끓일 것 같다가도

라면보다 먼저 공기를 살피던 사람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단단했지만

분장실에서는 목을 아끼며

말을 줄이고 호흡을 고르던 사람.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주연보다 조연의 호흡을,

대사보다 장면의 여백을 먼저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 에겐.”


내가 말하자 조카가 손뼉을 쳤다.


“맞지?

이모, 그 오빠 완전 에겐남이야.

그런 사람들은 진짜…

그 한 컷으로 오래 가.”


맞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을 밀어붙이기보다

사랑이 머무는 속도를 믿는다.


그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라면을 끓이지 않았던 건

용기가 없어서도,

타이밍을 놓쳐서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 사람은

라면처럼 빨리 끓는 사랑보다

오래 우러나는 사랑 쪽의 사람이었고,


나는 그걸 읽어낼 언어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때의 나는 연애를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체력은 늘 바닥이었고,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에게까지

내 피곤을 건네게 될 것 같았다.


연애가 싫었던 게 아니라,

연애를 책임질 상태가 아니었던 시절.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다정함을 붙잡지 않았고,

그 사람도 나를 급하게 흔들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뒤,

조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둘 다 나쁜 선택은 안 한 거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3. 그 시절 우리가 〈동감〉을 사랑했던 이유

-영화 이야기, 그리고 지금의 해석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영화가 떠올랐다.


<동감〉.


2000년에 개봉한 영화다.

유지태, 김하늘이 출연했다.


이 영화의 설정은 지금 들어도 꽤 낭만적이다.

아마추어 무선통신, 흔히 말하는 햄(HAM) 무선을 통해

1979년에 사는 여자와

2000년에 사는 남자가 연결된다.


라디오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흘러가는 목소리가 아니라,

주파수를 정확히 맞춘 사람끼리만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방식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대학, 같은 교정, 같은 돌담길을 걷는다.

같은 공간인데,

단지 시간이 다를 뿐이다.


당시 이 영화가 유난히 애틋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분명했다.


느렸고,

아날로그적이었고,

기다림 자체가 사랑의 일부처럼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같은 마음인데 만나지 못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로맨틱했다.

운명이라는 말이 아직 낡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동감〉은

그 자체로 잘 만들어진 사랑 이야기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남았다.


다만 지금,

2025년의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떠올려보면

조금 다른 감정이 얹힌다.


이건 영화를 다시 정의하려는 말이라기보다,

지금의 내가 조심스럽게 느끼는 쪽에 가깝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도

말의 온도와 기다리는 방식이 달라

끝내 닿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것.


그 시절의 우리도 그랬다.


누군가는 “왜 이렇게 무심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되물었다.


사랑이 달랐던 게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언어가 달랐던 건데.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지금까지도 종종 떠올리는 것 같다.


90년대 학번인 나는

그때의 사랑을

이제야 다른 언어로 다시 읽고 있으니까.

4. 짐승남 교과서로 연애하던 시나리오 작가 친구


내 주변에는 늘

짐승남 교과서를 믿는 사람이 한 명쯤 있었다.


내 친구,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 애.


“연애는 캐릭터 싸움이야.”

“남자는 한 번은 확실해야 돼.”

“식스팩은 예의야. 예의.”


그리고 어느 봄밤,

그 애는 정말

‘예의 바른 식스팩’과 사랑을 했다.


새벽 공기,

계단에 남아 있던 체온,

고백이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까웠던 말.


그날의 사랑은

짧았지만 솔직했고,

뜨거웠고,

무척이나 정직했다.


나는 그 애를 보며 생각했다.


아,

저런 사랑도 사랑이지.


재밌는 건

그 애가 그런 말을 가장 많이 하면서도

늘 가장 먼저 상처받았다는 점이다.


현실에는

짐승처럼 보이는데 에겐인 사람도 있고,

에겐처럼 보이는데 테토인 사람도 있고,

어느 쪽도 아닌 채

그냥 하루를 버티는 사람도 있으니까.


5. 만약에, 그때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만약 그때,

건어물녀였던 나와

(연애보다 혼자 있는 저녁이 더 익숙해졌던,

그 시절에 유행하던 말로)

에겐남이었던 그 사람이

정말로 사랑을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우리는

서로를 크게 흔들지 않는 방식으로

조금씩 나란해졌을 것이다.


약속은 느렸고,

연락은 조용했고,

주말엔 동네를 걷거나

따뜻한 국을 끓였을지도 모른다.


큰 고백도,

격렬한 싸움도 없이.


그저 각자의 삶을 유지한 채

연애라는 선을

옆에 하나 더 그려두는 방식.


… 여기까지가 상상이다.


현실에서는

각자의 삶이 흘러갔고,

그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다.

6. 다시 현실, 그리고 조카


“그래서 지금도 연락해?”


조카가 물었다.


“가끔 안부 정도.”


조카가 웃었다.


“그럼 아직도 그 사람은

이모 인생에서 연예인이네.”


맞다.


연애로 끝나지 않았어도

서로의 어느 시절을 비춰준 사람은

끝까지 연예인으로 남는다.


조카가 말했다.


“그래도 이모 세대가 좀 부러워.

뭔가 더 뜨거웠던 것 같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야, 너희도 뜨거워.

아직 호르몬 최신 버전이잖아.”


조카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근데 이모.

우리 세대도 사실 쉽진 않아.”


“왜?”


“에겐이면 에겐대로 만만해 보일까 봐 걱정하고,

테토면 테토대로 너무 세 보일까 봐 걱정해.”


조카는 자기 얘기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 솔직히 말하면…

에겐인데, 요즘은 테토처럼 보이려고 해.”


“왜?”


“요즘은 너무 부드러우면

바로 ‘만만한 사람’ 되거든.”


나는 웃었다.


“그럼 너는

에겐인데 테토 코스프레 중인 거야?”


“응.

약간 생존 전략.”


조카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그 말엔 요즘 세대의 피로가 묻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도 너희도 똑같네.”


“뭐가?”


“사랑이 어려운 건 그대로고,

사람이 어려운 것도 그대로고.

다만 쓰는 언어만 달라졌을 뿐.”


조카가 물었다.


“그럼 이모는?”


“우리?”

“90년대 학번은 지금도 ING야.”


조카가 웃다가 말했다.


“이모 왜 갑자기 영어 써?”


“살아 있다는 뜻이야.”

“사랑은 아직, 진행 중이거든.”

TMI BOX


테토남 / 테토녀는 뭐야?

•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에서 나온 말.

• 추진력 있고 결단이 빠르며, 감정이 생기면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편.

• 사랑 앞에서 망설이기보다 직진하는 타입.

•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가 비교적 분명하다.

• 한편으로는 이 표현이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쓰이던

‘초식남(草食男子) / 육식남(肉食男子)’, 혹은 성향을 대비해 설명하던 연애 담론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한국에서는 여기에 호르몬 이름이 결합되면서

보다 직관적인 ‘테토’라는 줄임말로 굳어졌다는 해석이 많다.


에겐남 / 에겐녀는?

• 에스트로겐(estrogen)에서 나온 말.

• 맥락을 읽고 분위기를 살피며, 관계의 속도를 조절한다.

• 사랑을 ‘상황’과 ‘환경’ 안에서 이해하려는 타입.

• 감정이 생겨도 바로 행동하지 않고 한 박자 둔다.

• 이 역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초식계 남성상, 섬세한 남성 이미지, 그리고 관계 중심적인 연애 서사가 한국식 언어로 재해석되며 만들어졌다는 설명이 함께 언급된다.

• 그래서 의학적 구분이라기보다는, 요즘 세대가 연애의 ‘결’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생활 언어에 가깝다.


정리하면

• 테토/에겐은 호르몬 이름에서 가져온 말이면서 동시에,

일본 연애 담론과 한국 온라인 문화가 섞이며 자리 잡은 표현이다.

• 정확한 기원을 하나로 못 박기보다는, 여러 문화적 설명이 겹쳐 굳어진 요즘식 연애 언어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왜 요즘 이 말들이 유행해?

• 남자다움/여자다움 같은 말이 더 이상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성별보다 ‘사람의 결’을 말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요즘 연애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보다

“저 사람은 어떤 결이야?”를

먼저 묻는다.


건어물녀는 어디서 왔어?

• 일본 드라마·만화에서 유래한 표현.

• 연애를 포기했다기보다,

퇴근 후 혼자 쉬는 생활 리듬이 너무 익숙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 바쁘고 지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연애보다 혼자가 더 편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영화 〈동감〉(2000)은 어떤 영화야?

• 유지태, 김하늘 주연.

• 아마추어 무선통신(HAM 무선)을 통해

1979년에 사는 여자와

2000년에 사는 남자가 연결된다.

• 같은 대학, 같은 교정, 같은 돌담길.

단지 시간이 다를 뿐이다.


당시 왜 그렇게 애틋했을까?

• 느린 통신, 기다림, 엇갈림이

사랑의 미덕처럼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 같은 마음인데 못 만난다”는 설정 자체가

충분히 로맨틱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읽는다

• 이 영화는 운명적 사랑 이야기라기보다,

같은 마음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 그래서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는다.


번역되지 못한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생각난다.


24화 예고


어떤 사랑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말해지기 전에

검열부터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전인권,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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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hreads.com/@comet_you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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