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검열되지 못한 사람들 -테토남으로 시작해, 번지점프를 지나 전인권
조카가 물었다.
휴대폰을 보다가 말고,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23화에서 테토남, 에겐남 얘기했잖아.
그럼 이모가 만났던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쪽이었어?”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겉으로 보면, 거의 다 테토였지.”
“와… 진짜?”
”그땐 그게 기본값이었어.
상남자, 말수 적고, 결정 빠르고.
감정은 설명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
조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겐남은?”
“단어가 없었어.
있어도 말로 꺼내는 순간
‘여자 같다’는 말이 먼저 붙던 시절이었거든.”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겉은 테토인데 속은 에겐이었던 사람들이 꽤 있었어.”
그 순간 얼굴 하나가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사자머리, 선글라스.
누가 봐도 상남자였다.
무대 위에서 〈행진〉을 부를 때는
지금이라도 어디론가 뛰쳐나가야 할 것 같다가도,
<걱정 말아요 그대>를 부르면
사람을 가만히 앉혀
이불처럼 덮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꽤 가까운 거리에서 여러 번 만났다.
청담동에 아지트처럼 자주 가던 바(bar)가 있었다.
낮에는 진료를 하고 밤에는 드럼을 치던 의사가 운영하던 공간.
대학 시절 밴드를 했고,
락을 좋아했고,
취미처럼 라이브 무대를 열어두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던 곳이었다.
그때는
7080 라이브 카페가 생기기 전이었다.
‘추억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그냥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퇴근 후에 들러
노래하고 이야기하던 시절.
낮에는 사회의 중심에 있다가
밤에는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그땐 꽤 많았다.
지금도 어딘가엔,
아마 비슷한 공간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전인권을 자주 봤고,
자연스럽게 인터뷰도 했다.
그는 술은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이미 끊은 지 오래였다.
대신 늘 이온음료를 들고 있었다.
말은 느렸고,
조금 어눌했고,
상대를 살피며
천천히 이어갔다.
어느 날,
내가 물었다.
“선글라스는 왜
밤에도 안 벗으세요?”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걸 벗으면요,
제가 되게 귀여워져요.”
이 얘기를 들은 조카가
바로 끼어들었다.
“정말 에겐인데?”
맞다.
그 사람은
겉은 테토였고,
속은 완전히 에겐이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 시절로 흘러갔다.
배우 이은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직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고
모두가 말을 아끼던 시기였다.
그때
그는 말했다.
“나는 은주를 사랑했다.”
사람들은 놀랐고,
불편해했고,
말렸다.
“지금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오해받습니다.”
“아니라고 정정하세요.”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말을 거두지 않았다.
그건
계산이 없어서였고,
전략이 없어서였고,
눈치를 볼 줄 몰라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정말 순수했다.
슬픔이 너무 커서
말을 고를 여유조차 없었던 사람.
그래서
정제되지 않은 단어로
진심을 그대로 내뱉어버린 거였다.
그 고집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았고,
막 다시 열리려던
제2의 전성기, 제3의 전성기 앞에서
그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마음이 이해된다.
인터뷰를 하던 어느 날,
그가 내게 말했다.
“기자님은
1970년대, 80년대 잡지에 나온 사람 같아요.”
그때 나는
당황했다.
왜 나를 옛날 사람 취급하지?
왜 하필 그 시대야?
내가… 그렇게 올드해 보이나?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이런 거였다.
90년대 학번들이
요즘 20대에게 말하는,
“너 옛날 책받침에 있던
소녀 얼굴 같아.”
그 말과 똑같은 거였다.
칭찬인데,
받는 쪽은 당황하는.
순수해서 나오는 말.
귀여운 아재의 언어.
그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고
그의 말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
의도는 다정했는데
표현은 다소 시대를 벗어나 있었고,
마음은 섬세했는데
화법은 정제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쉽게 오해를 샀다.
조금만 계산했더라면
조금만 말을 고르고
조금만 타이밍을 봤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오해들.
하지만 그는
그런 계산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에 가까웠다.
그에게는 말을 고르는 기술보다
마음을 먼저 내미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있었다.
<번지점프를 하다〉 -그때 우리는 왜 이 사랑을 견디지 못했을까
조카가 말했다.
“이모,
그 배우… 이은주.
나 영화로 봤어.”
“어떤 영화?”
“ <번지점프를 하다>.”
“엄마가 추천해 줘서
OTT로 옛날 영화 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슬프더라.”
조카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끝나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어.”
이 영화는 2001년 개봉작이다.
지금 다시 보면, 오히려 지금이라서 더 놀라운 영화다.
주연은 이병헌과 이은주.
그 시절 이은주는 막 정상에 올라 있던 배우였다.
연기도, 존재감도, 얼굴도 모두 빛나던 시기.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980년대 초, 비 오는 날.
버스정류장에서 우산 하나에 뛰어든 여자와
그 순간 첫눈에 반해버린 남자.
젊고 서툴렀고,
서로에게 너무 진심이었던 연인.
하지만 남자의 군 입대 날,
여자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7년 후.
남자는 결혼을 했고,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되어 있다.
그런데
담임반에 들어온 한 남학생.
말투, 버릇, 질문,
사소한 손짓까지
죽은 연인과 너무 닮아 있다.
그 학생의 이름은 현빈.
(지금 우리가 아는 배우 이름 말고, 영화 속 인물이다.)
남자는 점점 확신하게 된다.
이 아이는
죽은 연인의 환생이라고.
문제는
그 환생이 남자라는 사실이다.
소문이 돌고,
학교는 술렁이고,
교사는 추문 속에서 쫓겨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않으냐.”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단정하지 않다.
이게 동성애인지,
집착인지,
운명인지.
다만 보여줄 뿐이다.
사랑이 얼마나 설명 불가능한지.
조카가 말했다.
“이모,
근데 이게 더 슬픈 건…
둘 다 도망치지 않았다는 거 같아.”
맞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뉴질랜드로 떠난다.
사랑이 허용된 나라로.
그리고
그 유명한 장면.
번지점프대 앞에서
줄을 묶기도 전에
둘은 함께 뛰어내린다.
동반자살.
충격적인 선택.
하지만 그 장면에서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이번엔 여자로 태어나야지.”
“근데 나도 여자로 태어나면 어쩌지?”
“그럼… 또 사랑하면 되지 뭐.”
그리고 마지막,
이병헌의 내레이션.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조카가 조용히 말했다.
“이모…
이건
진짜 사랑이라서 슬픈 거 같아.”
그래서 슬프다.
그래서 오래 남는다.
이 영화가 파격이었던 이유는
단지 ‘동성애’ 때문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이런 사랑을 말할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환생‘이라는 장치를 쓰고,
‘번지점프‘라는 은유를 선택했다.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은
늘 죽음 뒤에야 허용되던 시대였으니까.
나는 그래서
이 영화를
전인권의 이야기 옆에 둔다.
사랑을 계산하지 못했던 사람들.
말의 타이밍을 재지 못했던 사람들.
순수해서 오해받았던 사람들.
그건 실패한 사랑이 아니라,
검열당한 사랑이었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조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모,
그럼 전인권 아저씨는
은주 앞에서는
선글라스 벗었을까?”
나는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그건…
이야기 안 할게.”
나는 알고 있다.
그 답을.
하지만 어떤 진심은
말해지는 순간
다시 검열되니까.
번지점프를 하다 TMI
• 2001년 개봉작.
당시 한국 멜로 영화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로 꼽힌다.
• 표면적으로는 ‘환생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루기 어려웠던 시대의 우회적 서사라는 평가가 많다.
• 그래서 이 영화의 사랑은
설명되지 않고, 인정되지 않고, 끝내 허락되지 않는다.
• 이은주의 연기는 지금 다시 봐도 압도적이다.
순수함과 불안, 사랑과 죽음의 그림자가 한 얼굴 안에서 동시에 살아 있다.
• 특히 이 영화는 ‘사랑은 이해받을 때보다, 이해받지 못할 때 더 진짜가 된다 ‘는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 이병헌의 눈빛 연기도 이 작품에서 결정적으로 각인된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참고, 삼키고, 흔들리는 눈으로만 연기하는 방식.
훗날 그가 ‘눈빛 연기의 교과서’가 되는 시작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 마지막 내레이션은 지금도 회자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한 문장으로, 영화는 관객의 심장을 조용히 내려놓고 간다
전인권 TMl
• 밴드 ‘들국화’의 보컬.
1980~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정신적 상징 같은 인물.
• 무대 위에서는 <행진〉을 부르며 포효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무대 아래에서는 말을 고르고, 눈치를 살피고, 감정을 아끼는 극도로 섬세한 사람이다.
• <행진〉과 〈걱정 말아요 그대〉의 온도 차이는 전인권이라는 사람의 테토와 에겐이 동시에 존재하는 결을 가장 잘 보여준다.
• 한때 대마초 사건으로 큰 파문을 겪었지만, 이후 술과 담배를 끊고 오히려 더 예민하고 섬세한 음악으로 돌아왔다.
• 사랑에 대해서도 그랬다. 계산하지 않았고, 타이밍을 재지 않았고, 말이 정제되기 전에 마음이 먼저 나왔다.
그래서 오해를 받았고, 그래서 더 오래 혼자 남았다.
• 지금도 콘서트와 음악 활동을 이어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전설이다.
다음 화 예고
책을 읽지 않는 대신
삶으로 영화를 찍는 남자.
책을 불태우는 장면으로
시대를 흔든 감독.
이준익.
〈왕의 남자〉, 〈동주〉, 그리고
사람을 끝까지 바라보는 연출.
-90년대 학번이라 죄송합니다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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