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보랏빛 소녀의 아스피린-이제야 비로소 시작된 우리의 무대
90년대는 내게 늘 조금씩 아픈 계절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설레고,
가슴이 조여올 만큼 두근거리고,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면서 열이 오르던 시절.
그때 TV에서는 네 명의 남자로 구성된 락밴드 GIRL(걸)의
〈Aspirin〉이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사랑, 설렘, 혼란, 그리고 성장통.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애매한 청춘의 통증을
가장 생생하게 기록한 노래였다.
그래서 우리는
두통이 오면 아스피린 한 알을 삼키듯,
마음이 무너질 때면 이 노래를 반복해서 틀었다.
<Aspirin〉은 그 시대의 청춘이 겪던 통증과 열기,
그리고 성장판이 벌어지던 아릿한 순간 전체를 품은 메타포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끔 이렇게 생각한다.
90년대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두통을 품고 살아가던
아스피린의 시대였다고.
그 시절 내 주변에는 <긴 머리 소녀〉, <보랏빛 향기〉, 그리고 〈노노노노〉의 여린 신비로움을 닮은
여학생들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넌 강수지 닮았어.”
“〈보랏빛 향기〉만 나오면 네가 생각나.”
“하수빈 같아, 뭔가 신비로운 느낌?”
그 말들은
어느 날은 설레는 칭찬이었고,
어느 날은 나를 한 이미지 안에 가두는 족쇄였다.
나는 한동안
정말 ‘보랏빛 소녀’처럼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이상향의 배역을
내가 맡아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천천히, 뼈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깨달았다.
그 시절 나는 누군가의 보랏빛 향기였지만,
내 삶의 아스피린은
끝내 나 자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의
조금 웃기고, 조금 진지하고
조금 찬란했던 성장 드라마다.
일요일 아침, 작은 예배당 안은
늘 비슷한 공기로 가득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오래된 나무 의자와 낡은 피아노 위에 번져 있었고,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들은
햇빛을 만날 때마다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자, 오늘 크리스마스 발표회 준비해 볼까요?”
전도사님 목소리가 울리면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파도가 일었다.
누군가는 프로그램 순서를 훔쳐보고,
누군가는 친구랑 웃고 떠들고,
누군가는 이미 심각한 얼굴로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나도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만
키는 2~3학년쯤에서 멈춘 것 같은,
줄 세우면 늘 앞쪽에 서는 작은 아이.
“이번에 예수님 탄생 이야기 낭독, 누가 할까요?”
순간, 공기 중의 소음이 ‘톡’ 하고 꺼지는 것 같았다.
짧은 정적.
아이들의 시선이 서로를 스치고 지나갈 때,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조용히 기도했다.
제발, 이번엔 나 말고 다른 친구…
하지만 늘 그다음 장면은 같았다.
“혜성 학생이요. 앞으로 나오세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덜컥 내려앉는다.
또 나야…?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낭독 = 혜성’이라는 등식이 완성되어 있다는 걸.
나는 눈을 살짝 피하며
조심조심 통로를 걸어 앞으로 나갔다.
전도사님과 어른들은 늘 같은 말을 덧붙였다.
“얘가 글도 잘 쓰고, 목소리도 또렷해서.”
그 말이 싫었던 건 아니다.
칭찬은 분명 칭찬이었으니까.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 앞으로 끌려 나오는 감각은
언제나 약간의 멀미를 데리고 왔다.
가슴이 붕 뜨는 것 같고,
발은 바닥에 닿아 있는데 자꾸 허공을 딛는 느낌.
나는 원래,
교회 구석 의자에 조용히 앉아
찬송가 책을 넘기며 예배를 드리는 게 좋았다.
내향적인 아이는
늘 구석 자리를 찾는다.
그런데 어른들은
나를 항상 가운데로 불러냈다.
아이들이 가득 앉아 있는 예배당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저기 어딘가에 앉아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더 잘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책임감이
어깨 쪽으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때부터 나는
교회의 작은 무대 한가운데에서,
눈에 띄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눈에 띄게 되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나는 모르는 사이
작은 왕관 하나를
조용히 머리에 쓰고 있었다.
우리 교회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었다.
비가 그친 뒤 물이 잔잔해지면
짧은 징검다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아이들은 그 돌 위를 한 발 한 발 딛으며
예배당으로 들어오곤 했다.
목사님의 아들,
검은 기타를 늘 들고 다니던 그 오빠는
내가 징검다리를 건너올 때면
어김없이 기타를 집어 들었다.
“이 노래 알아? 〈긴 머리 소녀〉.”
둘다섯의 오래된 포크송.
비 오는 날이면 더 선명해지는 멜로디,
개울가를 건너오는 긴 머리 소녀,
달처럼 환한 얼굴을 노래하는 가사.
오빠는 노래 중간에
슬쩍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았고,
기타 줄을 한 번 더 부드럽게 튕겼다.
“이 노래, 너 생각하면서 치는 거야.”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칭찬인지, 농담인지,
아니면 단순한 장난이었는지.
다만,
내가 누군가의 ‘긴 머리 소녀’ 이미지로 보인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나는 고무줄 하나로 머리를 묶을지,
단발로 잘라버릴지를 두고
매일 거울 앞에서 고민하던 아이였는데,
누군가는 이미
내 이미지를 완성해 놓고,
그 위에 노래와 감정을 덧칠하고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마다
내 뒤에서 흘러나오던 그 노래는
지금 돌이켜보면
마치 내 어린 시절을 위한
드라마 오프닝곡 같았다.
아직 감정의 이름을 모를 때,
아직 사랑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던 나이.
그리고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지금에서야,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다면,
그 오빠와 나 사이에도
작은 핑크빛 장면 하나쯤
나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징검다리를 건너는
작고 조용한 ‘1기 긴 머리 소녀’였다.
교회에는 또 다른 오빠가 있었다.
청소년부 회장.
말수가 적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했고,
기도할 때면 누구보다 진지한 사람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믿음 좋은 오빠’로 유명했다.
어느 주일,
모임 시간에 ‘서로 칭찬 한 마디’ 순서가 돌아왔다.
그때 회장 오빠는
주저함 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저는… 혜성이가 참 좋습니다.
믿음도 예쁘고, 마음도 예쁘고…
우리 청소년부 보물 같은 아이예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멈춘 것 같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고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고백이라기보다
공동체 안의 애정과 신뢰를 표현한 말이었다.
하지만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런 관심이 한 번에 쏟아지는 상황이
그저 무서웠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은 아이인데,
왜 자꾸 사람들 앞에 세워질까.
얼마 뒤, 청소년부 산행이 있었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나는 금세 숨이 차올랐다.
그때 회장 오빠가 말했다.
“힘들지? 배낭 줘.
손 잡고 같이 올라가자.”
그는 내 배낭을 대신 메주고
작은 내 손을 잡아끌어주었다.
길이 험해지자
잠깐 나를 업어주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그 장면을 첫사랑의 한 컷이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몸집 작은 나를 챙겨주는
‘좋은 오빠의 배려’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정상 근처,
나와는 전혀 다른 코스에서
오빠가 젖은 바위에 미끄러져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뒤에야 들었다.
허리를 심하게 다쳐
한동안 걷는 것도 힘들었다고 했다.
그 사고는
내가 있던 방향과도,
내가 건넨 손길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린 나는
이상하게 죄책감을 놓지 못했다.
혹시 내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힘을 너무 쓴 건 아닐까.
혹시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무리가 간 건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린 마음이 만들어낸 오해라는 걸 알지만,
그때의 나는
남의 아픔까지 자기 탓으로 끌어오는 나이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건 내 몫이 아닌,
누구의 인생 안에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우연한 사고였다는 걸.
하지만 그 구분을 알지 못하던 나는
한동안 그 무게를
조용히, 그리고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산행은
내가 처음으로
‘책임’과 ‘선택’의 경계에 대해
조용히 질문을 시작한 날이었다.
어디까지가 그 사람의 몫이고,
어디부터가 나의 몫일까.
그 질문은
철없는 아이였던 나를
조금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든
첫 번째 철학이었다.
교회 글짓기 대회.
주제는 “나의 꿈과 신앙”.
친구들은 당연한 꿈들을 적어 내려갔다.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초등학생의 글이라기엔
조금 과하게 “어른스러운” 문장이다.
그 글은 전국 대회 장원으로 뽑혔다.
그날 이후 나는
각종 글짓기와 사생대회에 불려 다니는
‘교회의 자랑’이 되었다.
전도사님은 늘 웃으며 말했다.
“너 같은 딸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다정한 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한 주문처럼 들렸다.
어깨에 살짝씩 무게가 얹히는 느낌으로.
나는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제자이자,
누군가의 자랑거리로 기능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속으로 이렇게 묻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는 누구지?”
그 질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왕관처럼
내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그 왕관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때의 나는 아직 잘 몰랐다.
중학교에 올라가며
나는 미션스쿨에 입학했다.
학교 전체가 하나의 교회처럼 돌아가던 곳.
아침 예배, 채플, 성경 시험,
이성 교제 금지, 교복 치마 길이, 머리 길이까지
모두 관리되던 시절.
사람들은 답답하다고 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래, 이 정도 안전망이라면
나는 조금 덜 흔들려도 되겠다.”
초등학교 내내 따라붙던
‘긴 머리 소녀’ 이미지를 벗고 싶어서
입학과 동시에 나는 머리를 싹둑 잘랐다.
단발이 된 나는
조금 더 가볍고,
조금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깨를 넘고,
등을 스치기 시작할 즈음,
라디오에서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가 흘러나왔다.
긴 머리, 보랏빛 원피스,
맑고 잔잔한 목소리.
TV 속 강수지는
말 그대로 “원조 신비주의”의 아이콘이었다.
그 무렵,
내 머리도 이미 다시 길어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너, 강수지 닮았다.”
“멀리서 걸어오면 진짜 〈보랏빛 향기〉 같아.”
조금 지나
하수빈의 〈노노노노〉가 등장했을 때엔
“조용한 분위기는 하수빈 같고,
이미지는 강수지 같고…”
라는 말까지 들었다.
초등학생 때의 ‘긴 머리 소녀 1기’가 있었다면,
지금 돌이켜보면
이 시절은 본격적인
‘보랏빛 긴 머리 소녀 2기’였다.
사춘기 소녀에게 그 말들은
달콤한 독 같았다.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 같아
자주 불안해졌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또 물었다.
“정말 이게 ‘나’일까?
아니면 그들이 바라는
이상형의 초상일까?”
나는 점점
내 안의 나보다
타인이 그려놓은 나를 더 많이 신경 쓰는
사춘기 소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학에 가서도
그 프레임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어느 날,
캠퍼스 벤치에 앉아
하루키 소설을 읽고 있는데
한 선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루키 읽어?”
“네.”
“역시. 왠지 그럴 것 같았어.”
그 선배는
늘 검은 니트를 입고 다녔고,
손에는 공책과 펜을 들고 다녔다.
언제나 뭔가를 적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종종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음악 이야기, 책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날, 선배가
무심한 듯, 그러나 어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쓰는 단편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있지?
사실… 너에서 시작된 인물이야.”
나는 웃으며 넘겼다.
정말 농담처럼 들렸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선배가 정말로 소설가가 되었고,
첫 단편집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 안의 한 인물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고,
남들이 덧씌운 이미지와
자기 안의 진짜 마음 사이에서
조용히 질문을 던지는 여자였다.
어딘가,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는 또 한 번
누군가의 소설 속에서
뮤즈로 호출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첫사랑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는 많다.
하지만
첫사랑의 ‘대상’이었던 사람,
이상형으로 불리던 사람,
뮤즈로 소환되던 사람의 입장에서 쓴 이야기는
놀랍도록 적다.
늘 드라마 카메라는
“좋아하는 쪽, 고백하는 쪽”에 맞춰져 있다.
오랫동안 나는
그 화면 안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쪽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역할에는
보기보다 꽤 큰 무게가 있었다는 걸.
이 연재의 18화와 19화에서
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
아모르파티(AMOR FATI) 이야기를 했다.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아주 나중에야
그 순간들을 사랑하게 되는 방식.
생각해 보면,
내 90년대는 늘 그 두 문장 사이의 틈새에서
어디가 아픈지 모르게 성장하던 시절이었다.
순간을 다 해석할 능력도 없었고,
그 순간들이 훗날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도 몰랐다.
그래서 혼란했고,
그래서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아스피린 같은 노래를
끝없이 되감아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카르페 디엠은 그 시절의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주문이었다.
“지금 느끼는 낯선 감정들,
전부 유효한 기록이야.”
그리고 아모르파티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조용히 마음에 닿아온 철학이었다.
“아, 그때의 나를 지나온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초등학교 교회 무대에서,
산행길에서,
미션스쿨 복도에서,
캠퍼스 벤치에서,
나는 여러 개의 왕관을 동시에 쓰고 있었다.
누군가의 보물,
누군가의 긴 머리 소녀,
누군가의 보랏빛 향기,
누군가의 첫사랑,
누군가의 뮤즈.
그 무게를
그땐 잘 모른 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왕관이 무겁다는 건
그만큼 많은 시선 속에서
나도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는 뜻이라는 걸.
아스피린은
두통을 잠시 꺼주는 약이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내 삶에 처음 내려본
조용한 처방전이기도 했다.
“괜찮아. 이 정도의 두통은
자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통증일 때가 있어.”
그 말을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던 시절,
내 안의 작은 의사, 작은 철학자, 작은 작가가
나도 모르게 나를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전, 가수 아이유의 〈드라마〉를 듣다가
나는 또 한 번 걸음을 멈췄다.
노래는 이렇게 속삭인다.
“나도 한때는 그이의 손을 잡고…”
누군가의 손만 잡아도 세상이 환해지던 시절,
골목의 간판 하나, 카페의 조명 하나까지도
마치 나를 위한 세트처럼 보이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노래는 곧,
조명이 꺼진 무대에 혼자 남겨진 사람을 비춘다.
드라마가 끝난 뒤
그 이후의 시간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많은 이들은 이 노래를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닌 누군가”의 이야기로 듣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우리는 한 번도 무대를 떠난 적이 없다.
정작 중심에 서본 적조차 드물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가끔 말한다.
“이제는 내려올 때도 됐잖아.
넌 90년대 학번이잖아.”
하지만 사실 우리는
무대 한가운데를 차지해 본 적이 거의 없다.
80년대 학번 선배들처럼 시대를 흔들지도 않았고,
MZ세대처럼 세상을 재정의하지도 않았다.
그저 앞과 뒤 사이의 빈틈을 묵묵히 메우며 살아온 세대였다.
삐삐 번호를 외웠고,
전화카드를 긁어 썼고,
마이마이를 허리에 차고 다녔으며,
CD의 스킵을 걱정하며 걷고,
mp3로 세대가 바뀌는 장면까지 모두 목격했다.
세상의 두 세대 사이를
우리는 그렇게 오래, 길게 버텼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사람들은 조심스레 묻는다.
“이제 내려올 때 되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아니요.
지금이 오히려 우리의 ‘첫 무대’입니다.
젊을 때 스포트라이트를 가져본 적 거의 없던 세대,
늘 양보하고 조율하느라
자기 무대를 뒤로 미뤄두고 살았던 세대.
이제야
자식이 자라고,
일터가 정리되고,
관계가 제자리를 찾으며
마침내 자기 목소리로 장면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정면 카메라를 바라볼 차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90년대 학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가장 뜨거운 하이라이트다.
우리는
누군가의 긴 머리 소녀였고,
누군가의 보랏빛 향기였고,
누군가의 첫사랑의 대상이었고,
누군가의 뮤즈였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장면을 쓰는 사람들이다.
이 문장은
그 모든 시절을 통과해 온
우리 세대를 향한 작은 선언이다.
“우리는 아직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드라마를 쓰는 중이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감독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
아스피린 같은 사랑의 통증도 지나갔고,
유행이 바뀌며 우리를 스쳐간 감정의 파도도 지나갔고,
세대의 틈에서 어깨를 좁혀 살아야 했던 시간도 뒤로 멀어졌다.
이제 남은 건
그 시절을 기억하는 우리의 엔딩 크레디트와,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도 않은
다음 장면들뿐이다.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막, 시작하는 중이다.
1) 둘다섯 〈긴 머리 소녀〉 (1970년대 포크송)
• 1970년대 감성을 대표하는 포크 듀오 둘다섯의 히트곡
• 빗소리, 개울가, 징검다리의 이미지가 겹겹이 쌓인 순정 감성
• 많은 사람들은 이 곡에서 자연스럽게
황순원 <소나기> 속 소녀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긴 생머리, 비 오는 들길, 말없이 건네는 마음
• <소나기>가 그 시대의 문학적 첫사랑이었다면,
〈긴 머리 소녀〉는 음악이 된 첫사랑의 얼굴이었던 셈
• 90년대 학번들의 어린 시절에도 라디오에서 자주 들리던 • 남학생들이 좋아하는 소녀에게 “이 노래 너 같아”라고 은근히 건네던 말없는 고백의 코드
2) 강수지 〈보랏빛 향기〉 (1990)
• 90년대를 연 ‘신비주의 원조 아이콘’
• 긴 머리, 보랏빛 원피스, 청초한 이미지의 대명사
• 90년대 초 여신형 감성의 탄생
• ‘보랏빛 소녀’라는 별명을 나누던 시대
• ‘보랏빛·첫사랑·청순함이 90년대 감성의 핵심 공식
• 여학생들 사이에서 “강수지 닮았다”는 말 한마디가
이미지와 정체성을 처음 질문하게 만들던 시절
3) 하수빈 〈노노노노〉 (1992)
• 청초·몽환 계보의 두 번째 대표 아이콘
• 강수지보다 한층 더 ‘소녀적인 순수함’을 지닌 이미지
• 93~94년도 복도에서
“너 하수빈 느낌 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가던 시절
• 90년대 여학생들의 분위기·이미지를 가늠하는 또 하나의 기준
• 조용한 성격 + 긴 머리 자동으로 “하수빈 같다”던 공식
4) GIRL – 〈Aspirin〉 (1995)
• 90년대 중반 감성 록을 대표한 남성 4인조 밴드
• 사랑의 두통·청춘의 통증을 ‘아스피린’이라는 메타포로 표현
• 90년대 학번들의 사랑과 성장이 겹쳐졌던 노래
• 라디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던 시절
• ‘아스피린’ = 단순한 약이 아닌
우리가 우리 삶에 처음 내렸던 자기 처방전의 상징
• 고등학교~대학 초입,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곡 중 하나
5) 아이유 〈드라마〉 (2024)
• 나도 한때는 누군가의 드라마 속 주인공이었다”로 시작하는 노래
• 그러나 결국 말하는 건
‘이제는 내가 내 인생의 드라마를 다시 쓴다”는 선언
• 90년대 학번이 어느덧 어른이 된 지금
가사가 더 깊게 파고드는 이유
• 청춘을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감독·작가·주인공을 스스로 맡아야 하는 시간의 음악
•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무대에서 내려온 적 없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드라마를 쓰는 중이다.”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