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모르파티-세월이 가면, 우리의 사랑은 무엇으로 남는가
늦가을 저녁, 소파 위에서 시작된 질문
“이모, 아모르파티가 그냥 ‘운명을 사랑해’ 이런 말이야?
노래 제목 같단 말이지.”
조카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고
아이패드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내가 최근 쓴 카르페 디엠(Carpe Diem) 글에
누군가 “다음엔 아모르파티도 해주세요”라는 댓글을 남긴 걸
조카가 흥미롭게 읽어본 모양이었다.
나는 화면을 잠시 꺼두고 조카를 바라봤다.
“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야.”
“또 철학 시작이다.”
조카는 투덜거리면서도
새 이야기 시작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아모르파티는 그냥
‘어쩔 수 없으니까 받아들이자’가 아니야.
상처까지 포함해서
이 삶 전체를 다시 선택하겠다는 태도에 가까워.”
조카는 이어폰을 살짝 빼며 되물었다.
“상처까지?
다시 선택해?
와… 그건 생각보다 세다.”
“그렇지. 실패한 사랑, 놓쳐버린 타이밍,
지금 생각해도 얼굴 달아오르는 흑역사까지.
그 모든 순간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나는 조카에게 가만히 물었다.
“너, 첫사랑 기억나?”
조카는 아이패드 뒷면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음… 우리 세대도 첫사랑은 있어.
근데 이모들처럼 막 ‘심장이 흔들리고 삶이 뒤집히는’ 그런 스케일은 아니고…
좋아요 누르고, 대화 이어가고,
서로 조용히 멀어지기도 하고… 그런 식?
가볍다는 말은 아니고…
그냥 방식이 많이 달라졌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맞아. 모양이 달라졌을 뿐, 없는 건 아니야.”
그때,
오래된 학원 복도가 스르르 내 앞에 펼쳐졌다.
누렇게 바랜 형광등,
문제집 냄새와 샤프심 냄새,
겨울 저녁의 공기.
그리고 그 위로
곰인형과 초콜릿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던 한 소년.
나는 조카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럼… 이모 세대 첫사랑 얘기, 들어볼래?”
그러자 조카는
마치 예고편을 기다리던 관객처럼
순식간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당연하지.
이모 버전의 로맨스 시네마, 시작해 봐.”
그렇게
나는 그 겨울 복도의 첫 장면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중학생이던 어느 겨울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변진섭의 <숙녀에게〉가
하루에도 몇 번씩 흘러나왔다.
나는 공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재생과 녹음 버튼을 동시에 꾹 눌렀다.
그 눌림의 감촉은 지금도 손끝에 남아 있다.
카세트 모터가 윙~하는 소리를 내는 동안
방 안의 숨까지 줄이며
헛기침 소리가 들어갈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 나이에 사랑이 뭔지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 노래가 좋았다.
가수의 감성인지, 멜로디인지,
그냥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숙녀가 될까?’
그런 유치한 상상을 하던 나이였다.
그날은 밸런타인데이였다.
문제집 종이 냄새, 샤프심 냄새,
누렇게 뜬 형광등 아래
수학학원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학원 밖에는 겨울 저녁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고,
우리는 다음 시간 교재를 바꿔 들고
우르르 교실을 옮기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한 소년이 곰인형과 초콜릿을 들고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흔히 말하던
‘학원 주윤발’ 타입이었다.
교복 재킷을 한쪽 어깨에 걸쳐 입고
앞머리를 홍콩 배우처럼 쓸어 넘기고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가 뺐다가
말투는 나른하지만 눈빛은 또렷하고.
그 시절 80~90년대 초반 청소년들에게
홍콩 영화는 하나의 우주였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주윤발과 장국영, 유덕화를 흉내 냈다.
그 소년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너 줘도 돼?”
곰인형 한 마리,
초콜릿 상자 하나,
그리고 반으로 접힌 편지 한 장.
편지를 펼치니
삐뚤빼뚤한 글씨로
〈숙녀에게〉 가사 일부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그 시절 마음이 움직이면
가사를 베껴 쓰는 것이 거의 의식이었다.
그 순간, 복도는 폭발했다.
“꺄아악~! “
“야, 뭐야! 대박이다!”
“우와, 진짜 영화 찍냐?”
휘파람, 웃음, 박수, 떠들썩함.
그 좁은 복도는
순식간에 한 편의 하이틴 영화 세트가 되었다.
나는 얼굴이 불타오르는 걸 느끼며
곰인형을 안고
머뭇머뭇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왔다.
집에 도착하자 언니가 말했다.
“이거 너무 예쁘다.
내가 가져가도 되지?”
나는 얼떨떨해서
“응…” 하고 내주었다.
그게 첫 고백 증거품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 얘기를 해주자 조카가 난리를 쳤다.
“아니!!! 그걸 왜 줘!!!
그거 완전 ‘첫사랑의 유물’이잖아!
이모 너무 순해, 진짜…”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언니가… 너네 엄마야.”
조카는 소파에서 굴러 떨어질 뻔하며 외쳤다.
“와~ 진짜 우리 집안은… 드라마네.”
그 소년은
거기서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그러면… 롯데리아에서
다 같이 만날래?
너 친구, 나 친구…”
직접 데이트 신청은 못 하고
내 친구와 자기 친구를 끼워 넣은
네 명의 만남.
그 시절에는 그게
가장 현실적이며 순한 방식의 ‘고백의 2단계’였다.
나는 언니 옷을 빌려 입고 나갔다.
중학생이면서도
허리춤을 살짝 잡아당겨
어른 흉내 내고 싶던 나이였기 때문이다.
롯데리아 불고기버거, 감자튀김, 콜라.
테이블 위로 흐트러진 케첩 자국.
친구들은 괜히 자리 바꾸기를 하고,
소년은 빨대를 씹으며 시선을 피하고,
나는 귓불이 빨개져서
말수까지 없어졌던 그날.
누가 봐도
그저 아이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우리가 모두
자기 인생의 첫 데이트 장면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어설픈 순간까지 포함해서,
부끄럽고 귀엽고,
조금은 웃기고 조금은 진지했던 그 시절의 감정들이
언젠가 내 안에서
아주 조용하게 하나의 문장으로 남을 거라는 것을.
“어설펐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있었던 게 참 고맙다.”
조카는 그 말을 듣더니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모… 나도 언젠가 그런 말 하게 되려나?”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세월이 가면… 다 자기 차례가 와.”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조금 더 조숙해졌다.
야자 끝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껴입고,
등엔 두툼한 가방이 파묻혀 있던 시절.
그때는 급식도 없어서
점심은 늘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고,
가방엔 김치 냄새가 은근히 배어 있곤 했다.
그 무렵,
내 삶의 리듬은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가 만들었다.
어느 날,
친구가 새하얀 마이마이를 꺼내 들며 말했다.
“야, 이 노래 알아? 〈세월이 가면〉.”
1988년 최호섭 1집 타이틀곡.
우리 또래에게는 오래된 명곡이면서도
이유 모르게 가슴을 흔들어놓는 ‘전설의 이별송’이었다.
그 친구는
원래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쉬는 시간마다
내 가방에 자기 거울을 슬쩍 넣어두고는
“찾아봐~“하며 웃던 장난꾸러기.
도시락 먹을 땐
자기 달걀말이를 젓가락으로 툭 건네던 그런 아이.
그런데 그날은 표정이 달랐다.
“이건… 내 노래야.”
나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말했다.
“너 이별도 안 해봤잖아.”
잠깐의 침묵.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
“… 내 첫사랑이 세상을 떠났어.”
나는 그만 멍해졌다.
늘 깔깔 웃던 아이가
그런 슬픔을 안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친구는 이어폰 한쪽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우리… 화장실 갈래?”
여학생에게
“화장실 같이 가자”는 말은
그냥 볼일이 아니라
감정과 비밀을 공유하는 작은 신호였다.
여자화장실 한 칸 안.
두 사람이서
이어폰 하나씩 나눠 끼고
조용히 <세월이 가면〉을 들었다.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우리는 소리 내지 않고
입술 모양으로만 따라 불렀다.
목소리를 내면
둘 다 울어버릴 것 같아서.
며칠 뒤, 그녀는
분홍 편지지를 한 장 건넸다.
글씨는 삐뚤었지만 꽉 차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해.
우리… 전생에 연인이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네가 이렇게 편한가 봐.”
그 말은
동성애의 고백도, 연애 감정도 아니었다.
10대가 가진 감정의 절대치를 표현하는
순도 100%의 ‘영혼의 언어’에 가까웠다.
그 후로도 그녀는
작고 진지한 선물들을 건넸다.
노란색 노트, 유럽 풍경이 그려진 엽서,
꽃향기가 가득한 미니 향수 샘플.
그땐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과한 진심조차
참 고맙고 애틋하다.
어느 날 밤,
라디오에서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호섭 씨의 이 노래,
당시엔 이런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작곡가였던 동생이
유학 간 여자친구를 떠나보낸 뒤
돌아오는 길에 느낀 그 슬픔을
가사로 적었다는 설이 있었죠.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인지 노래에는
묘하게 이별의 순간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문득 창밖을 바라봤다.
그땐 잘 몰랐다.
그 장면과 마음이
언젠가 내 삶에도
비슷한 모양으로 찾아올 줄은.
그때 그 친구는
우리 중 가장 먼저 연애를 하고,
가장 먼저 결혼했다.
SNS 속 그녀는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의 얼굴로 웃고 있다.
전생, 연인, 첫사랑.
그 모든 과장된 진심은
10대에게만 허락된 순도 높은 감정의 증거였을 것이다.
그녀가 했던 말이
조금 이해된다.
“세월이 가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거야.”
대학생이 되자
노래는 라디오를 넘어
노래방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옮겨갔다.
낡은 리모컨과 삐걱거리는 소파,
담배 냄새와 레몬향 방향제가 뒤섞인 공기.
좁은 방 안에서는
누구나 잠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숙녀에게〉를 불렀고,
누군가는 <세월이 가면〉을
그리고 누군가는
막 전국의 청춘을 휩쓸기 시작한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예약했다.
연구실에서 기타를 치던 R은
〈천일동안〉을 정말로 ‘살아서’ 부르던 사람이었다.
“그 천일동안 힘들었었나요.
혹시 내가 당신을 아프게 했었나요
용서해요 그랬다면
마지막일 거니까요.”
그 목소리가 기타 줄을 타고 흘러올 때면
그 노래는 단순한 발라드가 아니라
그의 하루와 밤,
그의 기쁨과 외로움까지
모두 꾹 눌러 담긴 일기장 같았다.
그러다 어느 해 겨울,
갑작스러운 사고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정확한 시기조차
우리 모두가 말끝을 흐리며 피하던 이야기.
남은 건
그가 연구실 책상에 놓고 간
손때 묻은 기타와
“천일이란 긴 시간 동안 널 사랑했어…”
그 한 줄의 울림뿐이었다.
그리고 비디오방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던 친구가 있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영화 엔딩 크레디트까지 묵묵히 보던 시절.
말이 많지 않아도
편안하게 흘러가던 사이였다.
서로를 아주 천천히 좋아하고 있었고,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사랑이 되었을지도 모를 사람.
그러던 어느 달,
내가 학업 때문에 미친 듯이 바빴던 시기,
그 한 달 동안
연락이 조금씩 끊어졌고,
그 사이
그의 집안 사정이 급하게 기울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들었다.
잘 살던 집이었는데
아버지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졌고,
계획에 없던 유학이
여러 사정이 겹쳐
‘지금 바로 떠나야 하는 길’이 되었다고.
우리는
제대로 인사 한마디도 못 했다.
그가 떠나던 날,
삐삐 음성사서함에 남긴 한 문장.
“나… 너를 좋아했어.”
그 말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돌아오려고 했지만
IMF가 터지면서
집안은 다시 흔들렸고
유학 생활도 길어졌다.
그렇게 한국과의 거리는
시간과 함께 멀어져 갔다.
몇 년 뒤,
우리는 메신저로 다시 연결됐다.
“아마… 여기서 계속 살 것 같아.”
그는 미국에서 다른 일을 시작했고
잠깐 한국에 머무른 동안
양가 소개로 알게 된
잘 알려진 집안의 딸과 결혼했다고 했다.
그 두 사람은
어쩌면 너무나 현실적이고
너무나 잘 맞아 보이는 조합이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 가슴이 시리다거나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조용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도 그 사람의 아모르파티겠구나.”
그의 삶은 이제
내 서사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영화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중학교 때
수학학원 복도에서
곰인형과 초콜릿을 건네던 소년.
그는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내 소식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내 전화번호가 바뀌어도
삐삐 번호가 바뀌어도
어떻게든 다시 알아내서
또 연락을 건넸다.
군대를 가기 전
그는 작은 ‘작별식’처럼
내 삐삐에 노래를 자주 녹음해 주었다.
띠리릭~
〈숙녀에게〉,
〈세월이 가면〉,
〈천일동안〉까지.
나는 늘 비슷한 대답을 했다.
“편하게 잘 다녀와.
몸 건강이 최고야.”
우리는 끝내
‘사귀는 사이’가 되지 않았다.
그의 감정은
항상
내 앞에서 조금 먼저 도착해 있었고,
나는 늘
한 걸음 뒤에서
조심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SNS에서 우연히 본 사진 한 장.
그는
중학교 때
함께 롯데리아에서 어색하게 햄버거를 먹던
내 친구와 결혼해 있었다.
얼마 전,
그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요즘 우리 딸이 〈숙녀에게〉를 너무 좋아해.
근데 그 노래 들을 때마다
네 생각이 나.
너 옛날에 60분짜리 테이프 한 장에
그 노래 한 곡만 꽉 채워서
계속 듣고 다녔잖아.”
그녀는
지금의 남편이
한때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얼마 뒤
SNS 타임라인에서
그 남편의 글도 보았다.
“내 딸이 〈숙녀에게〉를 들으면
첫사랑이 떠오른다.”
그 ‘첫사랑’이
바로 나라는 걸 알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고
화면을 천천히 내려보았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기보다는
잔잔한 미소가 먼저 올라갔다.
“그래, 세월이 가면…
이런 장면도 생기는구나.”
한때 내게 곰인형을 건네던 소년이
이제는 아빠가 되었고,
그의 딸은
리메이크된 〈숙녀에게〉를 따라 부르며
또 다른 세대의 첫사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내 안에서 아주 조용히
이 한 문장이 속삭인다.
“그래도, 그때가 있어서 다행이야.”
2000년대 초,
우연처럼, 선물처럼
이승환 콘서트 티켓이 내 손에 들어왔다.
기획사에서
“기사 한 줄만 써주시면…”
하고 건넨 티켓.
취재 목적이었지만
솔직히 내 발걸음은
기자보다는 ‘관객’에 가까웠다.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서
나를 훅 데려가는 노래 한 곡을
마주하고 싶었다.
공연장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밴드가 자리 잡으며
공기가 달라지는 순간.
“천일동안 난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어왔었던 거죠…“
〈천일동안〉의 첫 소절이
어둠을 갈라 터져 나왔다.
그 한 문장이
가슴을 아주 천천히,
칼날처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때야 알았다.
왜 이 노래가
그렇게 많은 밤을 버티게 했는지.
왜 수많은 청춘이
자기 사연을 이 노래에 얹어 흘려보냈는지.
가사 한 줄 한 줄이
몸을 통과해 나갈 때마다
내 옆에 서 있던 이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기타 치던 ‘R’.
비디오방에서 영화 끝날 때까지
나란히 앉아 있던 그 친구.
학원 복도에서
곰인형을 건네던 소년.
그리고
내 곁을 스쳐 갔던
‘거의 사랑이 될 뻔했던’ 사람들.
R은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은
함께 노래 부르던 우리 시절을
한 번에 닿아버리는 문처럼 느껴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잡았던 기타 넥과
이승환의 절규가
내 귀 안에서 겹쳐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공연장 바닥에
쿵 하고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공연장을 빠져나와
혼자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도시의 바람 소리와
사람들 발걸음 사이로
후렴이 계속 울렸다.
“천일동안… 너를 사랑했었다는 그 말이…”
가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내 안쪽을
계속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집에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가 술렁거렸다.
며칠 뒤,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다시 〈천일동안〉이 흐르기 시작했다.
”난 자유롭죠 그날 이후로
다만 그냥 당신이 궁금할 뿐이죠. “
따뜻한 라떼 잔을 들고 있던 손이
순간 떨렸다.
심장이 하나 빠지는 것처럼.
나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숙였다.
숨을 들이마시지 않으면
눈물이 바로 떨어질 것 같아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슬퍼할 대상은 없었다.
누군가의 뒷모습도 없고,
떠나간 연인의 흔적도 없고,
실연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조용히,
자꾸 흘러내렸다.
그건 누군가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나,
그 시절의 우리들,
노래 부르던 여러 목소리,
함께 웃던 시간,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온도들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사랑이 아니라
젊음 자체가 슬픈 날이 있다.
창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라떼 잔을 다시 들어 올리는 동안,
나는 아주 천천히 혼잣말을 했다.
“그래. 그 시절, 우린 참 열심히 살았었지. “
“근데 이모, 아모르파티는 도대체 누가 만든 말이야?”
조카가 다시 묻는다.
“예전 스토아학파 철학자들도 썼지만,
이 말을 인생의 슬로건처럼 만든 건 니체야.”
나는 조용히 니체 이야기를 꺼냈다.
1882년, 로마.
프리드리히 니체는
스물한 살의 루 안드레아스-살로메를 만난다.
그녀는 똑똑했고, 자유로웠고,
그 시절에는 드물게
“나는 누구의 아내도 되지 않겠다.”
라고 말하던 젊은 철학가 지망생, 문학도,
사상가의 씨앗 같은 존재였다.
니체는 그녀에게
두 번, 어쩌면 세 번까지 청혼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살로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보다
당신의 지적 동료로, 인생의 동반자로 남고 싶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살로메는 훗날
기자로 활동하던 프리드리히 카를 안드레아스와 결혼했다.
전통적인 ‘가정’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며
정신적·지적 연대를 유지하기 위한
특이하고 독립적인 결합 방식이었다.
그녀는 결혼했지만,
여전히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았다.
그 무렵, 니체는
인간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의지하던
작곡가 바그너와 관계가 틀어진다.
사랑도, 우정도, 신뢰도 흔들리고
몸은 자주 아팠고
정신마저 피로해지던 시기.
그런데 그런 니체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쓴 책
<에케 호모(Ecce Homo)>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인간의 공식은 아모르파티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아무것도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
조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무것도… 안 바꾸겠다는 거야?
실패도, 실연도, 창피한 순간도 다?”
“응. 니체 입장에서라면,
살로메에게 거절당한 일도,
바그너와 틀어진 일도,
아파서 끙끙 앓던 밤도
‘그래도 이 삶이어서 다행이다’ 하고
다시 선택하겠다는 거지.”
조카가 숨을 멈춘다.
“…그 정도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모르파티는
‘포기하고 받아들여라’가 아니라
‘상처까지 포함해서 다시 선택하겠다’는
엄청난 태도야.”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문득 내 10대와 20대, 30대가
한꺼번에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수학학원 복도에서
곰인형과 초콜릿을 건네던 소년,
롯데리아 테이블에 둘씩 앉아
불고기버거를 베어 물며
어른 흉내를 내던 네 명의 중학생,
화장실 칸에서 마이마이 이어폰을 나눠 끼고
〈세월이 가면〉을 듣던 친구,
비디오방 의자의 어둠 속에서
엔딩 크레디트를 끝까지 함께 보던 사람,
연구실 한쪽에서
낡은 기타로 〈천일동안〉을 치던 ‘R’.
그날들은
그냥 부끄럽고,
그냥 설레고,
조금 과장되고,
조금 아팠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서른을 지나고, 마흔을 지나고,
지금 이렇게 조카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이 순간이 되니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모르파티란,
그 사람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중얼거리는 말이다.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이모한테 아모르파티는…
결국 옛날 친구들 다 용서하는 거야?”
조카가 장난기 섞인 얼굴로 묻는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 용서?
그들이 나한테 잘못한 게 있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모르파티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게 아니야.
그들이 있었던 시간을
지워졌으면 좋겠다고 바라지 않는 것.”
조카가 눈을 찡긋한다.
“음… 그러니까
‘그때 나는 그런 사랑을 했고,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
이렇게 인정하는 거?”
“그래. 그게 더 가깝지.”
조카가 소파에 깊게 파묻히며 중얼거린다.
“그럼 내 아모르파티는…
입시 망한 나,
썸 타다 흐지부지된 연애들까지
다 사랑하는 거네?”
“응. 그 실패한 모양 그대로.”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돌아보면,
‘그때 안 망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날이
문득 올 수도 있거든.”
조카는 천장을 바라보며 혀를 찬다.
“야… 그거 꽤 힘든 철학이네.”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겨울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2025년의 저녁,
유리창에 스치는 바람 소리,
멀리서 천천히 멈춰 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그 순간, 문득 깨닫는다.
중학생이던 나,
고등학생이던 나,
대학생이던 나,
콘서트장에서 울던 나,
그리고 지금 조카와 소파에 나란히 누워
아모르파티를 이야기하는 나.
이 모든 시간들이
기억의 끈처럼 한 줄에 이어져
지금 여기, 이 순간을 만들었다는 사실.
조카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이모, 그럼 2026년에 이모의 아모르파티는 뭐가 될까?”
나는 대답 대신
조카의 발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웃었다.
“글쎄.
그건… 우리가 앞으로 써야 할 이야기겠지.”
그 말은
나에게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같이 던지는 질문이었다.
• 니체와 아모르파티
• Amor fati: “운명을 미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 니체는 <에케 호모>와 <즐거운 학문>에서
“위대한 인간의 공식은 아모르파티다”라고 말했다.
• 요약하자면:
“피할 수 없는 삶이라면, 울며 버티는 대신 그 안에서 춤출 방법을 찾자. “
• 루 안드레아스-살로메와 니체
• 1882년 로마, 철학 지망생 루 살로메와의 만남.
• 니체는 그녀에게 두 번 이상 청혼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 살로메는 “나는 아내가 아니라 지적 동료이고 싶다”라고 답했다.
• 이 실패한 사랑과 바그너와의 결별은
니체가 말한 ‘그래도 이 삶을 다시 선택하겠다”는 태도,
아모르파티의 정조와 겹쳐 읽힌다.
• 〈숙녀에게〉(변진섭)
• 1989년, 변진섭 2집 <너에게로 또다시> 수록곡.
• 공개 고백, 학원 복도, 곰인형과 함께
80·90년대 학번의 ‘첫 설렘 B.G.M’.
• 이 노래 들으면 네 생각난다”는 말이 고백의 정석이던 시절.
• <세월이 가면〉(최호섭)
• 삼 형제가 함께 만든 독특한 프로젝트.
• 유학·공항·기다림의 정서를 담은 곡이라는
‘유학 이별설’이 한동안 라디오를 떠돌았다.
• 아직 이별조차 겪어보지 않은 10대에게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예감을 주던 노래.
• 〈천일동안〉(이승환)
• 1995년 발매, 군대·장기 연애 종결의 ‘공동 애가’.
• “이승환의 실제 연애사”라는 설도 있으나
중요한 건 수많은 청춘의 사연이 이 노래에 실렸다는 사실.
• 1980~90년대 홍콩 영화의 그림자
•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곽부성…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 비 내리던 골목의 슬로모션.
• 그들을 따라 머리를 넘기고
코트를 휘날리며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남학생들.
• 우리 모두 스크린에서 배운 방식으로
첫사랑을 연출하던 시절.
다시 조용해진 저녁,
조카는 이어폰을 끼고 플레이리스트에 뭔가를 추가했다.
“이모, 오늘은
〈천일동안〉, 〈세월이 가면〉, 〈숙녀에게〉
각 한 번씩만 들어볼게.
나도 내 아모르파티를
조금 연습해 보려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세월이 가면…
그 노래들이 언젠가
너에게도 이상하게 꼭 맞는 날이 올 거야.
그게… 조금 슬프면서도,
또 어쩐지 고마운 지점이지.”
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
아모르파티.
결국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의 노래를,
우리의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세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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