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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Dec 07. 2023

박완서 읽기 5.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삶의 모든 것이 글이 될 수 있다.

박완서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2010년 8월에 출간된 책이다. 작가는 다음 해인 2011년 1월에 눈을 감으셨다. 그러니 이 책은 박완서의 마지막 이야기일 것이다. 나이 80을 앞두고 분명 병이 든 몸으로 쓴 글일 텐데(물론 2008에 연재했던 글도 함께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박완서의 글은 여전히 현실 속에서 살아있다. 담담히 과거를 돌이켜보고, 여전히 잘 모르고 부족한 자신을 반성하고, 예전의 인연을 그리워한다. 40년 작가의 길을 걸어온, 우리나라 문학계의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박완서의 글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그리 멀지 않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글을 쓴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30년 후에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앞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나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졌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p.20
실없는 농담 말고 후대에 남길 행적이 뭐가 있겠는가.
p.29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
 p.31


못 가본 길에 대한 새삼스러운 미련은 노망인가, 집념인가. 올해가 또 경인년이기 때문인가, 5월이란 계절 탓인가, 6월이 또 오고 있기 때문인가.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다. 그 두 개의 나는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p.26


나를 스쳐 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그나저나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고통의 기억뿐 아니라 기쁨의 기억까지 신속하게 지우면서. 나 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p.156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좋아한다는 말에 '나도 지금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있어요.'라고 혼잣말을 하며 반가워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축구에 열광했다는 말에 그녀가 응원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웠다.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던 세상'을 살아내면서 무척이나 고단했을 텐데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다'며 빨리 흐르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모습에 안타까웠다. 박완서의 몸은 이승을 떠났지만 글은 이렇게 남아 한참이나 어리고 미숙한 나를 야단치고 다독이고 옳은 길로 이끈다. 생전에 얼굴 한번 뵙지 못한 게 아쉽고 그분의 글로 이런 혜택을 누리면서도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없어 송구스럽다. 


글로 모든 것들을 쏟아내는 삶은 어떨까?(물론 박완서 작가가 아직까지 살아 계셨더라면 더 쓸 말들이 많았겠지만) 숨길 게 없으니 무척이나 홀가분하지 않을까? 아니면 너무 탈탈 털어낸 것 같아 좀 허전하려나? 자신이 쓴 글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좀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연애인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아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어떤 행동을 해도 의식하게 되지 않았을까? 아니지, 연륜이 쌓이면서 그런 것들은 극복이 되겠지. 마음이 흐트러지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었을 때 내가 쓰는 글, 쓰고 싶은 글이 길잡이가 되어주니 든든하기도 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자꾸만 박완서 작가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글을 쓰가다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p.215~216


박완서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독서 노트


박완서 작가가 2008년에 <친절한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 실려있다. 그녀가 골라낸 책들에 대한 간단한 소감을 적어놨는데 노트에 제목을 모두 적어 놓았다. 기회가 되면 한권 한권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도서관과 교보문고 앱으로 찾아보니 어떤 책들은 품절되고 도서관에도 없다. 급한 마음에『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애송시 100편』2권을 주문했다. 박완서처럼 글쓰기의 대가도 글이 막힐 때 시의 도움을 받는다니 따라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박완서 작가가 스스럼없이 스승이라고 칭하는 이청준의 글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이청준은 너무 유명한 작가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은 학원 강사 시절 아이들의 교과서와 참고서를 통해 교재로 가르치며 맛본 게 다다. 내가 글을 못 쓰는 이유가 좋은 작가들의 글을 부지런히 읽지 않아서인 것 같아 지금이라도 읽어야지 하는 마음에 『별을 보여드립니다 검색했는데 모두 절판, 품절되었고 2013년에 열화당에서 나온 세트는 책 가격이 15만원(할인해도 135,000원)이다. 욕심은 났지만 부담스러워서 우선 중고서점에 한 권 남아있는 초판을 주문했다. 그 서점에도 한 권 남아있는 것 같은데 안전하게 내손에 들어온다면 엄청난 행운처럼 설렐 것 같다. 


선생님이 필생의 업적으로 남기신 『토지』에는 우리의 파란만장한 근세사의 모든 국면과 모든 직업, 고귀한 인간성으로부터 바닥 상것의 비천함까지 천태만상의 인간군상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박제를 만들어 모자이크 한 게 아니라,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비천한 것들이 존엄해지기도 하고 잘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비천해지고 하는 게, 마치 지류의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생육하는 것과 같은 장관입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p.255~256


박완서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의 3부 '그리움을 위하여' 부분엔 김수환 추기경, 박경리 선생, 박수근 화백에 대한 추모와 그리움이 담겨 있다. 이런 분들과 인연을 맺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오신 박완서 작가가 부러웠다. 어른에게 듣는 더 큰 어른들의 이야기라 경건한 마음으로 귀기울이며 글로나마 그분들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김수환 추기경의 책도 찾아보고 싶고 그분의 생애도 궁금해졌다. 기회가 된다면 박수근 화백의 그림도 전시회에 직접 가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통영에 가서 박경리 기념관에 꼭 들러봐야지 싶은데, 그보다도『토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이 먼저였다. 시작만 하고 완독을 하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번에 다시 시작하면 꼭 끝을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박완서 작가의 산문을 통해 삶의 모든 것이 글이 될 수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경험하고 생각하고 읽고 만나는, 일상의 큰일부터 작은 일까지 그녀의 손을 거치면 평범한 것들이 특별해지고 소중해진다. 쓸 거리가 없다는 말은 비겁한 변명일 뿐 쓰기에 게을러서, 생각이 깊지 않아서, 관찰에 인색해서, 글보다 급한 게 많아서, 그만큼 글쓰기가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놓쳐버린 시간이 아깝고,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 경험이 안타깝고, 붙잡지 못한 생각들과 그저 스쳐간 인연이 아쉽다. 흔적 없이 죽어간 나의 모든 것을 글로 다시 살려내고 싶다. 남은 날들은 글로 남기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가치 있게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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