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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Nov 30. 2023

박완서 읽기 4. 장편 소설『목마른 계절』

결국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

1950년 6월 28일에서 9월 28일까지,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견뎌야 했던 인민군 통치하 3개월을 '적치 3개월'이라 한다.(문학평론가 정호웅 해설) 박완서의 장편 『목마른 계절』은 6·25 전쟁을 몸소 겪은 여성 작가가 당시 자신의 나이였던 스무 살의 여주인공 '허진'을 통해 적치 3개월을 지나 다음 해 5월까지의 지난한 시간을 그린 소설이다. 전쟁의 실상을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의 육성을 듣는 듯 생생하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처럼 사실적이고, 『아리랑』처럼 처참하고, 완독하지 못한 박경리의 『토지』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 나라에서 벌어진 우리 민족의 이야기인데 그동안 너무 몰랐다. 한국사 책 한 페이지, 몇 줄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당시 사람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며칠 밤을 아파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책에 빠져든 건 당연히 이야기꾼 박완서 작가 덕분이다. 기나긴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쉬울 만큼 푹 빠져 읽었다. 다시 한번 <박완서 읽기> 시작하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남과 북, 국군과 인민군, 어느 편에 서서 이기고 지고, 뺏고 빼앗기고를 주도하는 이들은 나름의 사상이나 뚜렷한 목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터가 된 생활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은 그저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저녁이 되면 가족이 따뜻한 집에 함께 모여 소박한 밥상에 이야기꽃을 피우는,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 전쟁으로 인해 무너지고 짓밟히고, 간절한 희망이 되었다가 절망으로 변하고, 살고자 애썼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고, 곁에서 가족이 죽어가는 걸 힘없이 바라만 봐야 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지 80여 년이 지나 박완서 작가를 비롯해 그때의 생존자들 대부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목마른 계절』과 같은 소설이 아니라면 어디서 누구에게 당시 이야기를 이토록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까. 귀한 간접 경험이다. 한국 전쟁을 다룬 영화나 소설에서는 대부분 전쟁터에서 싸우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주된 소재가 되는데 이 소설은 가족 때문에 피난도 가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을 해나가는지를 그리고 있어서 신선하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여성 작가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니 공감과 몰입이 잘될 수밖에 없다. 70년대 초반에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1978년에 책으로 출간했다는데 나는 이제야 읽고 뒤늦은 감탄을 하고 있으니 좀 생뚱맞다 싶기도 하다.


일순의 휴식도 용납됨이 없이, 정열이 고조된 애국 충성의 연속이 실제로 가능할까? 애국의 과로는 때때로 그녀를 몸살나게 했다. 아픈 곳이 분명치 않으면서도 꼼짝할 수 없는 중병 같기도 한 육신과 정신의 허탈 상태가 왔다.
그녀가 처음 며칠 가장 흥미 있어 하던 교양시간의 당사 공부도 너무도 끈질긴 투쟁과 숙청의 반복으로 그녀를 멸미나고 지치도록 했다.
P.93
어둡고 긴 밤, 지축을 흔드는 폭음과 포성, 마치 죽음의 촉수가 목덜미를 스티는 불길감 같은 쌔앵하는 차고 날카로운 박격폭탄의 공기를 가르는 긴 여운. 서울은 온갖 최신 화력으로 격렬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아직도 모진 집념과 독기 어린 악의의 지배하에 있었고 이 틈바구니에서 사람들은 이래 죽고 저래 죽고, 앉았다가도 죽고 섰다가도 죽고, 폭격에 죽고 포탄에 죽고, 반동이라 죽고 원한을 사 죽고, 이렇게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명분 없이 죽어가고도 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살아남아 죽을까 봐 떨며 끈질기게 평화를 기다렸다. P.204


'애국의 과로'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싶다. 대학 1학년 허진에게 강요된 애국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 곱고 예쁜 시절에 전쟁을 겪고 험한 소리를 듣고 못볼 꼴을 보며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던 스무 살 처녀의 마음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우리 둘째아들의 나이에 부모의 보호는커녕 거동조차 힘든 오빠를 지키고 늙고 약한 어머니와 전쟁통에 아이를 낳은 올케까지 돌보며 집안을 이끌어가는 허진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일찍 철이 든다더니 날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한 젊은 여성은 사투와도 같은 성장을 한다. 마지막엔 주인공 허진이 그렇게 그리워했던 남자 민준식을 만나 따뜻한 포옹이라도 하길 바랐는데 아들을 잃고 실성한 어머니의 자장가로 소설은 끝이 난다. 아쉽지만 세련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박완서 작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인지도 모르겠다.


내 식구의 염려로 내가 무사하듯이 내 염려로 내 식구가 무사하기를, 그리고 민준식이 무사하기를, 꼭 그렇기를 믿고 싶다.
p.408
공기...... 그 맛있음! 색색가지의 행복과 색색가지의 불행의 가능성이 용해된 감칠맛 있는 공기의 맛, 사람 살아가는 재미, 보람, 가능성의 풍성, 풍요가 있는 그 무미의 맛있음! 자기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함부로 어떤 거대하고 무자비한 힘에 의해 틀에 부어지고 마는 끔찍스러운 일을 당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자유로운 공기의 그 맛.
p.410


가족과 사랑하는 연인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깊고 진한 진심이 어디있을까? 전쟁이라는 무서운 놈도 사람의 목숨은 가져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해타산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선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가족에 대한 끝모를 사랑과 막중한 책임으로 버티는 허진을 온몸을 다해 응원했다. 끝내 살아남아 행복해지고 싶다는 허진의 의지에 박수를 쳤다. 함께한 추억은 너무 빈약하고 속이 타들어갈 듯한 그리움만이 남은 연인이지만 허진에게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것 같다. 결국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랑만이 중심을 잡고 희망을 보여준다. 오늘 새벽 2시, 『목마른 계절』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인공 허진처럼 자신의 감정에 뜨겁게 답하며 살아야겠다 싶다.


이 동족간의 전쟁의 잔학상은 그대로 알려져야 된다고 나는 생각해요. 특히 오빠의 죽음을 닮은 숱한 젊음의 개죽음을,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한 번으로 저세상으로 간 목숨, 반동이라는 고발로 산 채로 파묻힌 죽음, 재판 없는 즉결처분, 혈육간의 총질, 친족간의 고발, 친우간의 배신이 만들어낸 무더기의 죽음들, 동족간의 이념의 싸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런 끔찍한 일들을 고스란히 오래 기억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p.431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 상처와 아픔일 텐데 박완서 작가는 이야기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양한 인물의 삶을 사는 배우처럼 소설가도 각양각색의 주인공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양한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인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배우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설가도 지금의 나로선 그저 추앙만 할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 나만의 문체를 갖고 도저히 토해내지 않고는 못 견딜 만한 이야기 소재가 생기면 꼭 한 번은 소설을 쓰고 싶다. 나를 닮은 주인공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내는 이야기.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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