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
일순의 휴식도 용납됨이 없이, 정열이 고조된 애국 충성의 연속이 실제로 가능할까? 애국의 과로는 때때로 그녀를 몸살나게 했다. 아픈 곳이 분명치 않으면서도 꼼짝할 수 없는 중병 같기도 한 육신과 정신의 허탈 상태가 왔다.
그녀가 처음 며칠 가장 흥미 있어 하던 교양시간의 당사 공부도 너무도 끈질긴 투쟁과 숙청의 반복으로 그녀를 멸미나고 지치도록 했다.
P.93
어둡고 긴 밤, 지축을 흔드는 폭음과 포성, 마치 죽음의 촉수가 목덜미를 스티는 불길감 같은 쌔앵하는 차고 날카로운 박격폭탄의 공기를 가르는 긴 여운. 서울은 온갖 최신 화력으로 격렬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아직도 모진 집념과 독기 어린 악의의 지배하에 있었고 이 틈바구니에서 사람들은 이래 죽고 저래 죽고, 앉았다가도 죽고 섰다가도 죽고, 폭격에 죽고 포탄에 죽고, 반동이라 죽고 원한을 사 죽고, 이렇게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명분 없이 죽어가고도 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살아남아 죽을까 봐 떨며 끈질기게 평화를 기다렸다. P.204
내 식구의 염려로 내가 무사하듯이 내 염려로 내 식구가 무사하기를, 그리고 민준식이 무사하기를, 꼭 그렇기를 믿고 싶다.
p.408
공기...... 그 맛있음! 색색가지의 행복과 색색가지의 불행의 가능성이 용해된 감칠맛 있는 공기의 맛, 사람 살아가는 재미, 보람, 가능성의 풍성, 풍요가 있는 그 무미의 맛있음! 자기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함부로 어떤 거대하고 무자비한 힘에 의해 틀에 부어지고 마는 끔찍스러운 일을 당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자유로운 공기의 그 맛.
p.410
이 동족간의 전쟁의 잔학상은 그대로 알려져야 된다고 나는 생각해요. 특히 오빠의 죽음을 닮은 숱한 젊음의 개죽음을,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한 번으로 저세상으로 간 목숨, 반동이라는 고발로 산 채로 파묻힌 죽음, 재판 없는 즉결처분, 혈육간의 총질, 친족간의 고발, 친우간의 배신이 만들어낸 무더기의 죽음들, 동족간의 이념의 싸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런 끔찍한 일들을 고스란히 오래 기억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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