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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Nov 16. 2023

박완서 읽기 2. 《나목》

재수생 둘째아들 수능일에 쓰는 책리뷰라서.

오늘은 우리 재수생 둘째아들의 수능날이다. 새벽부터 잠이 깨 뒤척이다 결국 5시부터 일어나 김밥 쌀 준비를 했다. 지난 해에는 보온 도시락에 국이며 볶음이며 반찬을 어떻게 구성할까 고민했는데 이번에는 아들이 그냥 김밥을 싸달란다. 먹기 편할 것 같다고. 준비하기도 편하다. 우리 두 아들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다른 건 몰라도 체험 학습 갈 때마다 김밥 도시락만큼은 빠짐없이 내 손으로 싸 줬으니까. 집마다 장맛이 다른 것처럼 김밥도 넣는 재료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낸다. 내가 만드는 우리 집만의 김밥은 김치 김밥이다. 잘 익은 김치를 쫑쫑 썰어서 손으로 꼭 짠 다음 고소한 들기름에 설탕 살짝 넣고 살살 볶는다. 각종 재료와 함께 그 볶음 김치를 넣으면 김밥천국에서도 맛볼 수 없는 우리 집만의 김치 김밥이 완성된다. 아들들은 그 김밥을 언제나 좋아했다. 지금도 군대 간 큰아들이 휴가 나오면 한 번은 꼭 해주는 메뉴이기도 하다. 오늘 김밥은 가장 좋고 비싼 재료들만 넣고 한줄 한줄 정성을 담았다. 좋은 기운이 새어나갈 새라 김이 풀리지 않게 꼭꼭 싸서 모양 예쁜 것들로만 가지런히 담았다. 그리고 어제 마트에서 사온 딸기(아들의 수능일이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사지 않았을 가격이었다. 손이 후덜덜했지만 우리 아들 오늘 시험만 잘 볼 수 있다면 이 까잇것 하면서 시장 바구니에 담았다.)와 따뜻한 물을 도시락 가방에 담았다. 거기에 내 간절한 바람과 애틋한 사랑까지.



지난 해에는 시험 보는 학교까지 데려다 줬는데 올해는 혼자 걸어 가겠단다.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지만 오늘은 그저 아들의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고집부리지 않았다. 도시락에 짧은 메시지라도 적어 넣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부담이 될까 싶어 꾹 참았다. 안절부절하는 엄마 마음을 아는지 문자가 왔다. "잘 도착했어 잘 보고 올게~" 이 한 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에고, 우리 착한 새끼. 엄마 걱정할까봐 이렇게 문자도 해주고' 그냥 감동이다. 무심한 듯 티 안 내는 아빠의 마음도 아는지 아빠에게도 문자를 보냈단다. 우리 아들, 이렇게 배려심 있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그 상투적인 말을 오늘만큼은 굳게 믿고 싶다. 재수하는 동안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고 묵묵히 여기까지 와준 우리 아들에게 꼭 복과 운이 따라와주길...



책은 언제 어떤 마음으로 읽었느냐에 따라 그 책에 대한 감상도 기억도 달라진다. 박완서의 《나목》은 훗날 우리 둘째아들 수능일과 함께 기억될 것 같다. 사실 잠을 설쳐서 눈이 뻑뻑하기도 하고 아들의 시험 시작 시간과 함께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아 오늘 글을 쓸 수 있을까 싶었다. 재수생 아들 수능일인데 하루 연재 약속 못 지켰다고 대수냐 싶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긴장과 불안에 맞서 열심히 시험보고 있을 우리 아들을 위해서라도 엄마인 내가 자기 할 일을 못 하면 안 되지, 엄마도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며 기도해야 소원을 들어주는 신도 마음이 움직이겠지 하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목》을 읽으면서 기가 죽었다. 한 남자의 아내로, 다섯 아이의 엄마로 살던 박완서 작가가 나이 40에 소설가로 첫 발을 디딘 데뷔작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것도 장편소설을 이렇게 잘 쓰면 어쩌자는 건가. 아니, 나같은 사람은 어쩌라는 건가. 작가는 정말 타고나는 거란 말인가? 재능이 없는 내가 노력만으로 글을 잘 쓸 수는 있는 걸까? 타고난 언어 감각이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남다른 사람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샘이 났지만 우선 책이 재미있으니 계속 읽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전쟁이 몇 번이고 되풀이될 테고 그 사이에 전쟁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골고루 나누리라고. 나는 다만 재난의 분배를 먼저 받았을 뿐이라고. (p.63)


전쟁의 노도가 어서 밀려왔으면, 그래서 오늘로부터 내일을 끊어놓고 불쌍한 사람을 잔뜩 만들고 무분별한 유린이 골고루 횡행하라. 광폭한 쾌감으로 나는 마녀처럼 웃으면서도 그 미친 전쟁이 당장 덜미를 잡아올 듯한 공포로 몸을 떨었다. 다시는 다시는 그 눈먼 악마를 안 만날 수 있다면.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이 두 가지 절실한 소망은 항상 내 속에 공존하고, 가끔 회오리바람이 되어 나를 흔들었다. 미구에 나는 동강나버리고 말 것이다. (p.124)


살면서 나만 불행한 것 같아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안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보면 모두가 행복한 듯하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행복을 경쟁하다 결국 불행으로 치닫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행복 배틀>이라는 드라마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안다. 보이는 것과 그 속내는 다르다는 걸. 우리 두 아들이 재수를 하게 됐을 때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에 떡하니 붙는 자식을 둔 사람들을 겉으로는 축하하면서도 속으로는 대학 잘 갔다고 그게 다는 아니라며 속으로 질투하고 어떤 식으로든 내 처지를 합리화하곤 했다. 그렇다고 축하하는 마음이 진심이 아니었던 건 아니다.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야 내가 괜찮으니까, 그래야 내가 버틸 수 있으니까. 


겨우 자식 키우는 일로 마음이 이런데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나를 소설이 끌고간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끔찍하게 예뻐하던 아버지를 잃고 전쟁통에 두 오빠마저 잃은 이경은 살겠다는 의지를 놓은 채 헛깨비처럼 살아가는 엄마를 애틋해하며 산다. 그런데 그 엄마에게서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 (p.302)라는 말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이경은 한 가닥 잡고 있던 끈이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내뱉는 모진 말. 내 편이라고 생각했고 가장 의지했고 그래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듣는 말은 죽을 만큼 힘들 때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이토록 모진 말일 때는 평생 가슴에 박힌 바늘이 되어 움직일 때마다 가슴 속 여기저기를 찌른다. 너무 깊이 박혀 뺄 수도 없고 무시하고 삼켜버리기엔 너무 크고 날카롭다. 


나는 이불을 푹 썼다.
그래도 들리는 흉가를 흔드는 바람소리. 행랑채의 뚫어진 지붕으로 휘몰아쳐 들어와 부서진 기왓장을 짓밟고, 조각난 서까래를 뒤적이고 보꾹의 진흙을 떨구고, 찢어져 늘어진 반자지와 거미줄을 흔들고, 쌓인 먼지를 날리느라 마구 음산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바람은 이불 속에서 귀를 막아도 사정없이 고막을 흔들어댔다. (p.64)


바람이 보이는 듯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이불을 푹 써도 우리 집에 바람이 부는 듯했다. 휙 하고 바람이 부는 순간을 붙잡고 작가의 시선이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하나하나 다 훑고 간다. 다 아는 단어로 아무도 쓰지 않은 표현을 한다. 내가 말하는 바람은 흔하디 흔한데 박완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람은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바람이다. 세심한 시선, 색깔이 분명한 표현, 막히는 데 없는 자연스러운 문장, 말하기가 아닌 보여주기. 박완서의 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으려는 신입 학생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다.  


나는 옥희도 씨와 더불어 좀 더 긴 사랑을 설계하고 싶었다. 목이 긴 여자로부터 그를 빼앗아 나에게 몰두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윤리 도덕 따위에 훼방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혼신의 힘으로 온갖 도덕적인 것을 배척해야만 하는 것이다. (p.326)


박완서 작가는 1년 동안 PX에서 함께 근무했던 박수근 화가에 대해 처음엔 전기문 형식으로 글을 쓰려고 했단다. 그런데 함께한 기간이 짧기도 하고 사실대로만 쓰려니 재미가 없고 자꾸만 이야기를 덧붙이게 되더란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박수근보다 자신을 대변하는 여자 주인공 이경의 비중이 더 커졌다고 한다. 그렇게 《나목》은 소설이 되었다고. 옥희도 씨와 이경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야기가 좀 밋밋했을 것 같기는 하다. 역시 박완서 작가는 소설가의 감각을 타고난 것이 아닐런지.


박수근 <나무와 여인>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p.376)


어젯밤《나목》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박수근의 그림 <나무와 여인>을 찾아 한참을 들여다 봤다. 이 그림의 나목이 지금의 내 마음 같고, 시험장에 있을 우리 아들의 처지 같기도 하다. 오늘 우리 둘째아들은 두 번째 수능을 보러 갔다. 시험은 두 번째라 익숙한 게 아니라 두 번째이니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리라. 마음 편히 보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될까? '봄에의 믿음'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체대 입시라 수능을 보고 1월까지 실기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 둘째가 내년 봄에는 원하는 대학의 교정에서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싶다. 시험을 보는 마음은 춥고 떨리겠지만 머지 않아 봄이 올 거라고 믿고 늠름하게 잘 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해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도 꿋꿋하게 글을 쓰며 작가로서의 자리를 지켰던 박완서 작가의 단단한 마음을 닮고 싶다. 그동안 힘들었을 우리 아들에게 어떤 결과, 어떤 상황에서든 든든한 엄마로 서 있어야지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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