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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Nov 09. 2023

박완서 읽기 1. 《박완서의 말》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꽤 오랫동안 글이 안 써지니 조바심이 났다. 책을 출간하기 전에는 오히려 글을 쓰는 게 수월했다. 그런데 지금은 글을 쓰려고 마음먹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디서든 글을 쓰게 할 동력을 찾아내고 싶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영 글을 못 쓰게 되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소설, 에세이, 글쓰기 책 등 장르에 상관없이 이책 저책을 넘나들며 읽었다. 어디선가 '번쩍' 섬광처럼 글을 쓰게 될 아이디어를 얻고 싶었지만 잘 쓰인 책은 내게서 감탄만 끌어낼 뿐 글 쓰는 재주를 쥐어주지는 않았다. 어느 날 읽고 있던 책에서 박완서 작가 이야기가 나왔다. 박완서... 나이 40에 등단해서 80세에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소설, 산문 등 많은 책을 쓰시고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두터운 독자층을 보유하고 계신 분. 내가 쓰고 싶은 영역이 바로 산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꼭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소설이다. 그래, 박완서 작가님을 롤모델로 삼아보자. 그래서 시작했다. 박완서 읽기!


박완서 읽기의 첫 책은 '소박한 개인주의자의 인터뷰'라는 부제가 붙은《박완서의 말》이다. 박완서 작가가 스크랩하여 모아놓은 인터뷰 기록들 중 한 번도 출판되지 않은 것을 맏딸 호원숙이 엮은 책이다. 1990년대 대담록의 모음으로 생전 박완서 작가의 성격, 글에 대한 태도, 삶을 바라보는 관점 등을 읽을 수 있다. 시인 고정희는 박완서를 '편안한가 하면 날카롭고 까다로운가 하면 따뜻하며 평범한가 하면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작가'라고 평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오래 남는, 좋은 글은 올바른 생각과 바른 태도에서 나오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건 참으로 설레는 일이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한권 한권 읽어가다 보면 나도 괜찮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영글어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소설가 공지영은 박완서의 글을 '유려하고 반짝이고, 거침없는, 있을 자리에 꼭 그 단어가 들어가 박히는 힘'이 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녀를 '삶의 아픔을 겹으로 살아내는 글쓰기 작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그 아픔을 견디고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작가'라고도 극찬했다. 적절한 표현이다 싶다. 박완서는 한 해에 남편과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고도 글을 놓지 않았다. "불행의 제일 밑바닥에서도 글을 쓰는 일이 불행감을 조금 덜어주고 그래서 아주 뼛속까지 불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도 거기에서 내가 짓눌리지 않고 나를 그 속에서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게 참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고." 라고 그녀는 말했다. 글을 씀으로써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에서 좀 벗어나고 나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내 삶에서도 글이 그러한 역할을 꾸준해 해주었으면... 그러려면 부지런히 글을 써야겠지.


어느 정도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취미로 하기엔 글 쓰는 건 힘들어요.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는 게 지금까지 오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거 같아요.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속에서 웅성거려야 해요.



글이 안 써진다고 조급해하는 내게 하는 말인 것 같아 반가우면서도 부끄러웠다. 내 속에 고인 것이 없는데 바가지로 박박 긁어내고 쥐어짜기까지 하려니 글쓰기가 힘들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나의 경험과 깊은 사고의 결과가 차곡차곡 쌓여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절박해져야 그것이 좋은 글이 되고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박완서 읽기가 메마른 내 글쓰기에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그녀처럼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내 경험이 따뜻하고도 냉철한,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생산될 수 있을까? 별수 없다. 차오를 때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며 기다리는 수밖에.


 《박완서의 말》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박완서와 피천득의 대화였다.


박완서 : 제 경우도 먹고사는 일에는 사실 얼마 안 들어요. 그래서 안심이 되고 고마워요. 나중에 내가 돈을 조금밖에 못 벌게 되더라도 먹고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걱정이 안 되고 즐거워요.

피천득 : 많이 벌면 그것 때문에 노예가 될 것 같아요. 버릴 수도 없고, 어디 기부하자니 아깝고 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 돈을 계산하고 관리하고 하는 데 드는 시간이나 정력이 얼마나 크겠어요. 가만 보면 돈 모으는 이들은 돈 모으는 재미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박완서 : 정말 그래요. 인생에 귀하고 좋은 게 얼마나 차고 넘치는지 그런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아요.


박완서 : 어떻게 늙어야 하는가를 많이 생각해요. 저는 자신을 본질적으로 명랑한 사람이라고 여겨요. 그리고 늙어서도 그것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늙었다고 괜히 권위를 내세우거나 무게를 잡고 엄숙해지고 뻣뻣해지는 사람들은 정말 보기 싫어요. 그래봤자 위선, 가식이고 불행만 자초할 뿐이죠.

피천득 : 인생이란 어느 나이고 다 살 만한 거예요. 나는 한 발은 이미 무덤에 들어가 있는 사람인데 내 인생에 대해 지금도 만족하고 있어요. 남아 있는 나날을 여태껏 살았듯이 죄짓지 않고 좋은 사람 자주 만나면서 살면 그뿐이죠. 난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 웃을 수 있어요. 부재 속에서도 나의 글은 다른 이들의 생각 속에 존재하게 되겠지요.

박완서 : 선생님을 뵈면 모든 문제가 그렇게 쉬워지고 행복해질 수가 없어요. 저도 인생의 쓸데없는 허세나 욕심을 덜어버리는 작업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버리면 버릴수록 사람은 더 넉넉해지는 법이니까요.


죽을 때까지 읽고 쓰며 소박하게 사는 삶. 이것이 내가 간절히 원하는 삶이다. 그래서인지 먹고사는 일에 돈을 많이 쓰지 않고, 많이 벌려고 애쓰지 않으며, 돈을 모으는 것 말고도 인생에 귀하고 좋은 게 많다는 두 분의 말씀에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려는 삶의 방향이 괜찮은 거구나 싶어 안심이 되고 응원이 되었다. 내일 죽어도 오늘 웃을 수 있도록 좋은 글 쓰며 멋지게 나이들기, 허세나 욕심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넉넉하고 유쾌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닮고 싶은 두 작가의 대화을 읽으며 어떻게 나이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태도로 글을 써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박완서의 말》을 덮으며 박완서 작가의 첫 작품《나목》 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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