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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Nov 23. 2023

박완서 읽기 3. 산문집 9《나를 닮은 목소리로》

세상살이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박완서 산문집을 읽으며 그동안 쓸 거리가 없다고 투덜댔던 나 자신이 무척이나 우스워졌다. 남편, 자식, 친구, 직장 동료, 옆집 사람, 시장 단골집 사장님까지 모든 이들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내가 귀담아 듣지 않았던 거다. 오늘 마주한 풍경, 수업하다 생긴 일, 길에서 우연히 본 일, 방송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나를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데 그것이 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거다. 매일 글을 쓰자 계획하고 과연 날마다 뭘 쓰나 걱정했는데 박완서 작가가 보여준다. 고개만 돌리면 이야깃거리라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할 얘기가 많다고, 평생 써도 쓸 거리는 차고 넘친다고 말이다. 앞으로 읽을 박완서 산문집만 8권이니 내 노트에 적힐 문장과 글쓰기 소재가 얼마나 많을지 생각만으로 벅차다. 쓸 게 없었던 게 아니라 그냥 안 쓴 거다. 이제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것 같다.  



박완서 산문집 9. 《나를 닮은 목소리로》를 읽으며 한편 한편 글의 제목 밑에 좋은 문장뿐만 아니라 낯선 단어들의 뜻까지 찾아 적어 놓았다. 혹시 한편이라도 빠뜨리게 될까봐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었다. 시험공부를 하는 아이처럼 글쓰기의 비법을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집중했다. 색깔펜으로 나의 글쓰기 소재가 될 만한 것이나 문득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했다. 좋은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머리를 흔들어 놓고 다시 가지런히 정돈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한다. 그래서 읽기 전의 나와 읽고난 후의 내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내 안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부분

돌이켜보면 우리는 가난했을 때 오히려 더 품위 있게 살았다. 가난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없었으니까. 형이나 언니가 다니는 학교에 아우가 들어가 그 교복을 물려 입는 것은 아우가 으스댈 만한 것이었지 결코 기죽을 일이 아니었다. 만약 형의 학교가 명문교일 때 부모는 아우에게 공부 잘하란 소리보단 형 교복 물려 입게 그 학교 가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건 보통이었다.

요새는 어떻게 된 게 자식 기죽이지 않는게 뭐든지 일류로, 고급으로, 새것으로 해주는 것인 줄 아는데 진짜로 기가 산 아이는 싸구려나 헌옷 입고도 전혀 신경 안 쓰고 늠름할 수 있는 아이여야 되지 않을까. 입은 옷이나 가진 물건에서 오는 잘난 척은 결코 기가 아니다. 기는 조은 기건 나쁜 기건 사람의 중심부에서 우러나는 것이지 소유로 은폐하거나 부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 잘살게 됐다고 쉽게 가진 것으로 자식들 기를 살리려 했다가 도리어 기죽은 아이, 비겁한 아이로 키운 게 아닐는지, 만 달러 시대에 우리가 가장 잘못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 p.50~51 <지금 우리의 심정> 중에서 


그저 공부만 잘해라 그게 효도다 하고 기르다가, 그저 너 하나만 잘되면 그게 효도다 하다가 그저 너희만 잘살아라, 부모 신세 안 지는 것만도 효도다, 그렇게 키워놓고 보니 도무지 받을 줄만 알지 줄 줄을 모르는 자식들을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그 벌로 자식한테 옷 한 벌 못 얻어 입고 떠날 채비를 해야 하는가.
- p.62 <수의 유감> 중에서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 받은 악인한테서도 연민할 만한 인간성을 발굴해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 데도 결코 달라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 p.87 <나의 문학과 고향의 의미>


피는 꽃을 보고 즐거워하는 대신 꽃을 피우는 대자연의 섭리의 일부가 될 테고, 육신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대신 무심한 바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옷깃을 스치게 될 터이다. 또 자식들은 가끔 내 생각을 하며 그리워도 하고, 나를 닮은 목소리로 제 자식을 나무라고, 나를 닮아 잘 웃으며, 열심히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나이들어가는 모습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죽은 에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자식들이 이 에미가 남기고 간 희미한 자국을 혐오하지 말고 따뜻이 받아들였으면 하는 게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미련 중의 하나이다.

 -p.99 <내가 꿈꾸는 나의 죽음> 중에서


한 가족이 각자 제 분수에 맞는 일을 분담할 때 그 가정이 얼마나 원활하게 돌아가고 서로가 이해하고 감사하고 존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체험한다는 건, 우리 사회, 크게는 이 세상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짜여 있다는 걸 깨닫는 시작이 된다. 

일을 해보면 모든 먹을거리나 물건들이 거저 생기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노동력의 결과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될 테고, 누군가가 놀고먹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노동력의 신세를 지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 p174~175 <상전들>


돌아가신 우리 엄마는 박완서처럼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우리 엄마는 너무 가난해서 밥 먹고 사는 거 걱정하느라 자식 네 명에게 세세하게 신경쓸 틈이 없었다. 국민학교만 나오고 진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평생을 살았으니 얼마나 고단했을까 싶다. 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의 가난은 자세히 모르지만 나도 함께한 가난은 또렷이 기억한다. 어린 나는 부모의 울타리에서 그저 견디기만 하면 됐지만 엄마는 책임까지 져야 했으니 날마다 전쟁 같은 삶을 살았겠지. 그때의 엄마 나이를 지나면서 엄마의 무심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같은 엄마로서 내 엄마의 아픔을 좀더 나눠갖지 못한 나를 탓했다. 요양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너무 늦게 엄마의 꿈은 뭐였냐고 묻는 내 질문에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의사"라고 말하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도 가슴에 사무친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다행히 박완서 같은 작가에게 우리 엄마에게서도 듣지 못한 조언을 듣는다. 가난에 대하여, 늙음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자식 키우는 일에 대하여, 작가로서의 삶에 대하여,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조근조근 들려준다. 다행이다 싶다. '나 어떡하지?' 하고 묻고 싶을 때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을 좀 바꿔보라고, 다른 사람들 하는 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옳게 먹으라고, 때로는 자상하게 때로는 따끔하게 말해주는 책이 있으니 든든하기까지 하다. 


《나를 닮은 목소리로》를 읽다보면 낯선 단어들을 마주하게 된다. 생급스럽다, 서모(庶母), 사위스럽다, 천격(賤格)스럽다, 참척(慘慽), 희구(喜懼), 더께, 세리(稅吏) 등 잘 쓰지 않거나 뜻을 정확히 몰랐던 단어가 많다. 오랫동안 국어를 가르쳤고, 지금 아이들에게 논술 선생님으로 불리고 있고, 글을 쓰겠다고 폼잡고 있는 내가 참 어휘력이 부족하구나 느끼게 된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우리말 공부에 힘써야겠다 다짐한다. 


독서노트에 색깔펜 메모들


1972년생 나의 세대의 특징을 뭐라 할 수 있을까? 50대의 나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늙고 싶은가? 나의 60대, 70대 그리고 80대, 앞으로 30년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 할까? 목표가 정해지면 어떻게 계획을 짜야 하나?

정치에 문외한이다.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고, 가끔은 부끄럽다. 

나에게 없는 비판 정신 - 뭘 알아야 욕도 하지. 나의 식견이 너무 좁다.

가난했던 시절에도 사는 재미가 있었다. 세 집이 화장실 한 칸 쓰던 시절... 연탄가스 마셨던 여고 때.

우리말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자식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받지도 않고, 부모는 죽을 때까지 퍼주기만 해야 하나? 내 자식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부담 없이 너무 가벼운 삶을 남겨주는 게 옳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요양병원에서의 엄마에 대한 기억. 엄마의 치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남긴 메모.

나는 무엇을 잊고 싶은가?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가?

나에게 고향, 엄마의 의미는?

나에게도 작가로서의 기질은 있나?

나도 작가의 눈을 갖고 있나?

내가 꿈꾸는 나의 죽음 - 나도 이 제목으로 글을 써봐야겠다.

나는 왜 이렇게 기억이 어설플까? 글을 쓰기엔 참 빈약한 나의 기억.

엄마를 기억할 만한 무언가가 남아있나?

일상이 그대로, 생생하게 글이 될 수 있구나.

나는 어디서 세대 차이를 느끼나? 학생들을 통해 요즘 아이들을 기록해보자.

옳은 말, 정당한 행동도 누군가에게는 악이 되고 상처가 될 수도...

요즘 내가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이유가 뭘까?

우리 아들들에게 만들어 주고 싶은 집의 이미지?


박완서 읽기 겨우 3권째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 지금도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내 안에서 웅성거리고 있다. 박완서 읽기를 마칠 때쯤 내 글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더불어 나란 사람도 지금보다는 조금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슴 벅찬 독서다.


다음 책은 박완서 장편 소설《목마른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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