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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Mar 12. 2024

싸움의 상처, 책 바르고 글로 감고...

"호~ 새살아 돋아라!"

나는 잘 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이 없어서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 않고도 이기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엔 뜀박질을 잘하고 남자 아이들 못지않게 공을 다루고 시골길을 두 손 놓고 자전거로 달릴 줄 아는 아이였다. 웬만한 남자 애들도 나에게 덤비지 않았다. 그 덕분에 4살 어린 남동생은 내 그늘에서 편안한 국민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가난해진 부모 탓에 고향의 여왕 자리를 내놓고 15살에 도시로 쫓겨왔다. 화가 난 얼굴로, 그나마 괜찮은 수학 성적으로 도시 아이들의 섣부른 텃세를 잠재웠다. 걸어서 30분 가까이 걸리는 중학교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버스 한 번 타지 않고 졸업했다. 자칫 외로울 뻔한 등하교 길을 영어 단어장과 과목 서머리 노트가 함께 해준 덕분에 졸업식 날 전교 3등으로 색동 메달을 목에 걸었다. 축하해주는 중학교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왕복 승차권이나 토큰(내 기억으로는 고등학교 시절 승차권이었다가 토큰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외에는 백원의 용돈도 없던 여고 시절, 치마 교복을 입지 않은 학교라 가난을 티내지 않고 숏컷(나는 지금까지 머리가 길었던 적이 거의 없다. 웨딩 드레스 입었을 때 정도?)에 빈티지스러운 복장으로 개성을 뽐내며 3년을 버틸 수 있었다. 졸업할 때쯤 여자 후배와 동창들에게 받은 편지가 라면 한 박스였다. 중성적인 외모와 목소리로 인기를 누리며 존재감을 뽐내던 시기였다. 소위 말하는 날라리도 날 건드리지 않았다. 욕설을 입에 담은 적도, 누구랑 싸운 적도 없는데 그냥 쎄 보였단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학원 강사로 시작해 남자 강사들이 득세하던 입시 강사로 지내면서도 주량과 체력이 받쳐줘서 기죽지 않고 돈을 벌었다. 무대 체질이 강사로서의 인기에 보탬이 되었고, 30대 중반 젊은 나이에 여자 원장 자리도 두려움 없이 앉았다. 속은 어떨지언정 겉으로는 상처 한 번 받지 않고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을 게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쎈 언니 같은 인상이 내것이 돼버렸다. 나이가 들면서 붙은 나잇살과 여전히 줄지 않는 주량, 걸걸해진 목소리와 강사 경력 25년 이상의 연륜, 그리고 책과 글로 다져진 마음의 근육까지, 이 정도면 앞으로의 인생에 나에게 싸움을 걸거나 소위 덤비는 이를 만나게 되지는 않을 거라 안심했다. 누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앞으로의 인생을 쿨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또 한번 배웠다. 지난 주 금요일에 생각지도 않은 폭탄을 맞았다. 그 사연을 자세하게 써보려고 했는데 그날의 상황을 헤집는 게 아직은 내키지 않는다. 50년 넘게 살면서 누군가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인지 그때 난 무척 당황했고 목소리도 좀 떨렸던 것 같다. 싸움의 자세가 멋지지 않았던 것 같아 그것이 영 맘에 걸린다. 정식으로 싸워본 적이 없어서 싸움의 기술을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막연하게 난 어떤 싸움에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것도 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당당한 상황이라면 따져볼 것도 없이 선빵 날리고 시원하게 승리를 외칠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지 못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고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큰소리 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어른스러운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무례한 말 폭탄을 화내지 않고 받았고, 맘에 없는 죄송하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내 맘에 생긴 폭탄 구멍은 책과 글쓰기로 메우고 있는 중이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여섯 권의 책을 빌려왔다. 학원 수업이 없는 4일 동안 그저 책만 읽자 싶었다. 싸움으로 생긴 상처에 약을 바르듯 책을 바른다. 어젯밤에는 나를 공격한 상대에게 시원하게 퍼붓는 꿈을 꿨다. 꿈이지만 나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통쾌했다. 나는 아직도 내 싸움의 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가 보다. 책으로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붕대 감듯 이렇게 글쓰기로 감는다. "호~ 새살아, 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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