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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Mar 18. 2024

나는 왜 읽고 무엇을 쓰는가?

아룬다티 로이《작은 것들의 신》으로 <쓰려고 읽는다> 연재를 마친다!

은유의 책 《해방의 밤》을 읽다가 아룬다티 로이라는 작가를 알게되었다.《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와 명예가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을 '소설 공장'처럼 취급하는 게 싫다며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멋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돈과 명성을 마다하는 용기라니... 그녀의 작품을 빨리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 길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작은 것들의 신》을 빌려 왔다.


그런데 이 책이 쉽게 읽히지 않았다. 정말 지겹게 진도가 안 나갔다. 첫 몇 장을 읽는데 인도의 자연이나 문화가 낯설어서인지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앞부분을 두 번 반복해서 읽었다. 460여 페이지 중에 100페이지 정도를 읽고났는데도 과연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 다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읽고나면 뭔가 남는 게 있기나 할는지, 여러 가지 의심이 들었다. 몇 번이나 그만둘까 갈등했다. 그런데 이상한 오기가 발동했다. 아무튼 끝까지 가보자고 말이다. 포스트잇에 인물 관계와 정보를 적어가며 읽었다. 기어코 끝까지 읽어냈다. 다른 어떤 소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묘사와 문체, 어두움 속에 느껴지는 강렬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어렴풋하게 글의 메시지도 전해졌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보니 곳곳에 작은 포스트잇을 많이도 붙여놨다. 기억하고픈 문장이 많았다는 의미다. 


암무는 에스타와 라헬 남녀 쌍둥이의 엄마다. 남편과 일찍 이혼하고 친지들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키우다가 쌍둥이 중 오빠 에스타를 아버지에게 보낸다. 쌍둥이는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보냈던 추억을 마음에 간직한 채 떨어져서 살게 된다. 엄마 암무는 서른하나에 죽고 에스타는 다시 돌아왔다. 오빠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라헬도 돌아온다. 아룬다티 로이는 현재와 과거를 왕복하며 이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쌍둥이 외할머니의 힘겨웠던 결혼 생활, 옥스퍼드 장학생 외삼촌의 불우한 삶, 어린 외사촌의 죽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외고모할머니의 완성되지 않은 사랑, 쌍둥이 엄마 암무의 안타가운 사랑과 비극적인 결말 등 쌍둥이를 둘러싼 가족과 친지들의 이야기는 당시 인도의 계급 제도와 독특한 문화와 섞여 각양각색으로 얽혀 있다.  


그들은 암무가 죽었을 때만큼이나 나이가 들었다. 서른하나.
늙지도 않은.
젊지도 않은.
하지만 살아도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
p.14

에스타는 늘 조용한 아이였기에 정확히 언제(어느 달, 어느 날은 고사하고 어느 해)부터 그가 말문을 닫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혀 말을 하지 않게 된 때 말이다. 사실은 '정확히 언제부터'라는 것은 없었다. 조금씩 사세가 기운 가게가 문을 닫는 것과 같았다. 말문을 닫는 과정은 그렇게 알아채기 어려웠다. 얘깃거리가 다 떨어져버려 더이상 할말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에스타의 침묵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전혀 요란스럽지 않았다. 그것은 책망하거나 항의하기 위한 침묵이 아니었고, 오히려 여름잠, 동면, 폐어들이 건기를 견뎌내기 위해 하는 일 같은 심리적 조치였으니 에스타의 경우엔 그 건기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p.24

사랑을 나눌 때, 그는 그녀의 눈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 눈은 마치 다른 사람의 눈처럼 반응했다. 그냥 무언가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강 위의 배를. 아니면 모자를 쓰고 안개 속을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p.35

사진발이 좋은 그는 작은 체구에 비해 머리가 조금 큰 듯했지만 말쑥하고 세심하게 가꾼 모습이었다. 막 이중턱이 생길 참이라 만일 아래를 내려다보았거나 고개를 끄덕였더라면 그 턱이 더 강조돼 보였을 것이다. 사진 속에서 그는 이중턱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오만해 보일 정도로 치켜들지는 않게 신경썼다. 밝은 갈색 눈은 품위는 있지만 사악해 보여서, 사진사의 아내를 살해할 음모를 품은 채 그에게 예의바르게 보이려 애쓰는 사람 같았다. 윗입술 가운데 부분에는 작은 살덩어리가 솟아 있어, 토라져서 입술을 빼죽 내미는 것처럼, 어린아이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빨 때처럼 아랫입술을 덮고 있었다. 턱에는 가늘고 긴 보조개가 있어서 잠재된 광적인 폭력성의 위험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일종의 억제된 잔인성이었다. 그는 카키색 승마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평생 말이라곤 타본 적이 없었다. 그의 승마화는 사진관 조명에 빛나고 있었다. 상아 손잡이가 달린 승마용 채찍이 무릎 위에 단정히 놓여 있었다.
p.77

가족은 이게 문제였다. 거만한 의사들처럼 정확하게 어디를 건드리면 아픈지 알았다.
p.103

소각로의 철문이 올라가자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의 낮은 웅웅거림이 붉은 포효가 되었다. 열기가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뒤 라헬의 암무는 먹이가 되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그녀의 피부, 그녀의 미소, 그녀의 목소리. 아이들을 재우기 전에 키플링을 인용해서 애정을 표현하던 방식, 우리는 한 핏줄이다, 너와 나. 그녀의 굿나이트 키스. 한 손으로 그들의 얼굴을 단단히 잡고(뺨은 눌리고 입은 물고기 같아진) 다른 손으로 머리 가르마를 타고 빗질을 해주던 방식. 라헬이 다리를 넣을 수 있도록 속바지를 들고 있던 방식. 왼다리, 오른다리. 이 모든 것이 짐승에게 먹이로 던져졌고 짐승은 흡족해했다.
그녀는 그들의 암무였고 그들의 바바였으며 그들을 '두 배'로 사랑했다.
p.227

그 많은 세월이 흘러 지금에야 라헬은 어른의 시선으로 되돌아보고 그의 행동이 다정했음을 깨달았다. 성인 남자가 세 마리 너구리를 환대해 진짜 숙녀처럼 대해주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꾸며낸 공상에 직관적으로 대응해 어른의 무신경함으로 그것이 훼손되지 않게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혹은 애정으로.
이야기를 산산조각내기란 얼마나 쉬운가. 일련의 생각을 끊는 일도. 도자기 조각처럼 조심스럽게 지니던 꿈의 단편을 부수는 일도.
벨루타가 그랬듯 그냥 있는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p.266

'어둠의 심연'으로 여행을 떠나는 동료에게 그들이 말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a) '누구에게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
그러니
(b) '준비해두는 게 상책이야.'
p.367

쌍둥이는 어머니의 말 - "너희들만 없었다면 나는 자유로웠을 거야! 너희들이 태어난 그날 고아원에 버렸어야 했는데! 너희는 내 목에 매달린 맷돌이야!" - 의 무게에 짓눌려 아무것도 들 수가 없었다.
p.399

그는 누구였나?
그는 누구일 수 있었나?
'상실의 신'.
'작은 것들의 신'.
'소름과 문득 떠오르는 미소의 신'
그는 한 번에 한 가지만 할 수 있었다.
그녀를 만지면 말을 걸 수 없었고, 그녀를 사랑하면 떠날 수 없었고, 말을 하면 귀기울일 수 없었고, 싸우면 이길 수 없었다.
암무는 그가 그리웠다. 온몸으로 그를 갈망했다.
p.450

그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그의 아름다움의 본질을 이해했다. 어떻게 노동이 그의 몸을 만들어왔는지. 어떻게 그가 형상을 깎았던 나무가 그의 형상을 깎았는지. 그가 대패로 밀었던 목판 하나하나가, 그가 박았던 못 하나하나가, 그가 만들었던 물건 하나하나가 그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에게 흔적을 남겼다. 그에게 강인한 힘을, 섬세한 우아함을 선사했다.
p.455

더 나중에도, 이날 이후 이어진 열세 번의 밤 동안에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p.461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읽으며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작은 것들이 태어나서 사랑하고 이별하고 상처받고 죽고 잊혀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 곳곳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작은 것들에게 동료애를 느낀다. 듣지 못하더라도 위로와 응원을 말을 전하고 싶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이토록 작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내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옳은 걸까,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읽고 무엇을 쓰는가,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흔들었다. 글을 쓰며 커튼 사이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 정경이 오늘은 무척 답답해 보인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만나고 싶다. 사춘기에나 어울릴 법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일 수 있나, 나는 누구여야 하나,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쓰려고 읽는다> 19화로 연재를 마친다. 내가 왜 읽는지, 무엇을 쓰려는지, 좀 더 명확해진 후에 글을 쓰고 싶다. 그냥 읽자, 무조건 쓰자, 그러다보면 뭐가 보이겠지 했는데 아직 나는 나의 신을 찾지 못했다. 길을 잃었을 때 선명한 빛이 되어 나를 이끌어주는, 나만의 신이 책 속에서 불쑥 나오거나 글을 쓰다보면 우연인 듯 만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책을 읽어도 불안은 잠재워지지 않고 글을 써도 눈앞이 환해지지 않는다. 어떤 때는 책을 읽어서 마음이 더 소란스럽고, 또 어떤 때는 글을 쓰다가 더 어두워지고 막막해지기도 한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작은 것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그래야 내 마음의 소리에 응답하는 독서, 주저하지 않고 춤추듯 자연스러운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룬다티 로이처럼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과감히 선택하고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무척이나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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