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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Mar 04. 2024

할 일이 많다. 살아야겠다.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아침의 피아노》

큰언니의 몸과 마음, 그리고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다. 읽는 내내 한숨 쉬었고 아팠고 슬펐다. 암으로 힘겨워하다 벌써 6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난 아빠가 생각났다. 엄마는 아빠를 보내고 요양 병원에서 코로나를 맞았다. 홀로 외로움을 견디다 결국 2년 전에 아빠 곁으로 갔다.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오늘 큰언니는 병원에서 쓸 수 있는 마지막, 항암 약을 맞으러 간다. 걱정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는 내가 무력하다. 《아침의 피아노는 철학자 김진영이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서 쓴 기록이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의 약 13개월 동안의 메모다. 살아있는 날에 대한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번에 쓱 읽어낼 수가 없다. 중간중간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기다 슬픔에 잠겼다. 책 표지에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읽고 다시 책을 펼쳐 이어 읽었다.   


요즘 불면증이 다시 도져 새벽에 자꾸 깨는 바람에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졌다. 아침에 피아노 소리를 듣는 건 아니지만 나는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순간, 동트는 그때를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좋다. 아침을 마중나가 하루를 환대하는 기분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새벽에 일어나 《아침의 피아노를 마저 읽었다. 내가 맞이한 오늘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함부로 살지 않기, 허투루 보내지 않기, '사랑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를 다짐한다. 죽음을 명확히 느끼며 삶의 순간을 기록한 철학자 김진영의 말은 옳다. 성공한 자의 충고보다 환자의 정체성을 지키며 존재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그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난 나의 마지막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김영민 교수가 쓴 책 제목처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나도 제대로 죽기 위해서 하루하루 잘 살아내고 싶다.


아침. 다시 다가온 하루. 또 힘든 일도 많으리라. 그러나 다시 도래한 하루는 얼마나 숭고한가. 오늘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기.
p.261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p.51

부드러운 건 힘이 세고 힘이 센 것은 부드럽다.
p.58

이제 나는 나의 삶을 혼자서 다 껴안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이토록 무거웠던가.
p.70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나의 몸은 타자들의 그것과 분리될 수도 격리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나의 몸은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내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내가 나의 삶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고 내 몫을 찾아야 하는 이유이고 근거이며 '환자의 정체성'이다. 
p.80

꽃들이 시들 때를 근심한다면 이토록 철없이 만개할 수 있을까. p.97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 p.99

지금 살아 있다는 것 -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p.103

다가오는 시간들, 다가오는 것들 앞에서의 인내와 힘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 새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니 노래하자. p.120

길은 언제나 곡선이다. 길을 가다 보면 다른 길이 기다리고 또 만들어진다. 그것이 생 스스로 가는 길이다. p.121

몸을 지키는 일이 정신을 지키는 일이고 정신을 지키는 일이 몸을 지키는 일이다. p.160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p.242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나는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사랑할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존재이고 진실이고 의무이다. p.244

모든 것은 걷는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걷는다. 보행이 생이다. 나는 이 보행의 권위와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 p.248


책을 읽다가 문득 두려워졌다. 아빠가 담도암으로 2년 반을 고생하다 돌아가셨는데 큰언니도 같은 암 판정을 받고 1년 6개월 째 항암 치료 중이다. 가족력이 생긴 것이다. 가족력은 유전, 생활습관,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데 나는 아빠처럼 몸을 혹사하는 편이고 언니와 나는 아빠의 입맛을 닮았다. 우리나라 암 발병률을 검색해보니 80세 정도까지 산다고 봤을 때 암에 걸릴 확률이 40% 가까이 된단다. 이런, 큰일이다. 남편과 나 모두 50대가 되었는데도 건강에 대해 너무 안일했나 보다. 70대에 암과 싸우느라 43kg까지 말랐던 아빠, 아직 50대인데 몸에 암이 퍼져 20kg 가까이 체중이 빠진 큰언니를 보면서도 난 아직 예전처럼 먹고 마신다. 내 일로 닥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이 오늘은 무섭고 부끄럽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기대수명(83.6세)까지 생존할 경우 암에 걸릴 확률은 38.1%였으며, 남자(80.6세)는 5명 중 2명(39.1%), 여자(86.6세)는 3명 중 1명(36.0%)에서 암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출처 : 국가암정보센터


《아침의 피아노의 마지막 메모는 234번째 '내 마음은 편안하다'이다. 이 말이 이토록 슬픈 말이었던가. 죽음이 임박해 있는 사람의 마지막이 과연 편안할 수 있을까. 이 말을 쓰기까지 그는 자기 자신과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인 걸까. 그는 작가의 말에 '이 책이 나와 비슷하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 조금이나마 성찰과 위안의 독서가 될 수 있다면' 이라고 이 글을 쓰는 이유를 밝혔다. 큰언니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마 난 결국 언니에게 이 책을 건네지 못할 것이다. 입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죽음'이라는 말을 언니와 공유할 자신이 없다. 아직은 언니와 삶을 이야기할 것이다. 봄에 꽃구경을 어디로 갈지, 다음에 만날 때는 무엇을 먹을지. 


《아침의 피아노를 덮고나니 내 남은 삶이, 오늘 하루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또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렸다. 죽는 날까지 몸도 정신도 마음도 걷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프지 않도록 건강을 보살펴야 한다. 매일 읽고 쓰며 정신과 마음은 수시로 살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몸은 너무 함부로 대했다. 나쁜 거 먹지 않고 좋은 걸로 챙겨 먹기, 잘 자고 잘 쉬기, 적당히 걷고 근력 운동 꾸준히 하기 등 알고 있는 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내 몸을, 정신을, 마음을, 그리고 내 삶을, 하루를, 순간을 잘 보살피기(p.277).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기, 나와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 글쓰기. 할 일이 많다. 살아야 할 이유다. 살아야겠다. 마지막까지 잘 살아내야겠다.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함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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