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이 하나의 삶을 이룬다!
아주 오랜만이다. 긴 휴가도, 좋아하는 소설을 쌓아놓고 읽는 것도. 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지, 그래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알게 된다. 책상 앞에서 책 한 권을 들고 이런 대단한 발견을 할 수 있다니... 이것이 소설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시간적 여유 덕분에 소설을 읽고 표시해둔 구절을 독서 노트에 옮겨 적는 수고를 기꺼이 한다. 그리고 잠시 이 구절이 왜 좋았는지, 내 생각은 어떤지 스스로 묻고 생각에 잠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이 수고로운 과정이 참 좋다.
클레어 키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내 글쓰기 선생님이었던 은유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작가이자 문학 평론가 신형철이 추천한 책이라서 손이 갔다. 길지 않은 소설이라 짧게 집중해서 읽기 좋다. 게다가 도서관에서 큰글자 도서로 대출할 수 있어서 더 편하게 읽었다. 이 책은 "아름답고 명료하며 실리적인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야기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평범한 한 남자가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 아니면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p.29
내 삶에서 가장 기억나는 멈춤의 시간은 2017년 4월 10일부터 재취업을 하기 전까지 3년 4개월 동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학원 강사를 시작해 거의 23년 동안 일하는 여자로 살다가 처음으로 돈 버는 일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읽고 쓰는 삶'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그 이후로 내 삶은 분명 달라졌다. 내 생애 첫 책을 출간했고, 재취업을 해서 지금까지 4년째 일하고 있지만 호흡을 고르며 내 속도로 뛰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4년 후, 남편과 함께 멈춤의 시간을 꿈꾸고 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p.44
나이 50이 넘어도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나, 이렇게 가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나는 남편과 함께 몸 건강하게, 지금처럼 작은 것에 만족하며 4년 후의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산다. 그것이 내 삶의 방향이자 목표이며 희망이다. 오늘 하루를 잘 꾸리며 살아가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 믿으며 성실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핏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 아버지도, 갑자기 불쑥 영국행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p.64
지금껏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었을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물론 그 기회를 잡았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였을지는 알 수 없지만 가끔은 궁금해진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가 놓친 기회를 잡았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말이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p.99
나를 비롯해 요즘 사람들 대부분은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는다. 여러모로 예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는데도 말이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세상인데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그래서 나와 내 가족 챙기는데만 급급하다. 펄롱처럼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 이들이 이 세상에 작은 영웅이 된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p.102
나는 좋은 사람인가? 받는 만큼 주기나 하고 사는가?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느라 덜 가진 자에게 나눠주려는 마음을 품지도 못하고 사는 건 아닌가? 나는 나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작은 사람인 건 분명하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는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p.120
한 사람의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미치는지, 얼마나 많은 우연이 있을 지를 생각한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내 가족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또는 하지 않는, 내 사소한 말과 행동이 그들에게 좋은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특히 우리 두 아들과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한 사람의 삶에 미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큰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 다른 이에게 그리고 내가 마주하는 모든 환경과 자연과 온세상에 다정하고 친절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것이 내 삶을 따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오래 기억될 좋은 영향력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인생을 성실히 살아내는, 화려하진 않지만 곳곳에서 소박한 향기를 품어내고 있을 이 세상의 '작은 영웅들'에게 존경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