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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진 Aug 28. 2019

아스토르가에서 휴식을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째 날, Astorga



스페인의 새벽달

    세수를 마치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마이클의 형이 문 앞에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안ㄴ..? 어? 어떻게 한국말? 어..??!"


수건을 안 챙겨가서 내 얼굴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후다닥 방으로 돌아갔다.


어제부터 보았던 이 가족들이 내 눈엔 참 인상 깊었었다. 짧은 인사들이 전부였지만 그 순간순간 느껴지길 부모의 눈빛은 인자했고 아이들의 미소는 건강해 보였다.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핸드폰을 켜 폴란드어 아침 인사를 검색했다. 지.. 엔... 도브.. 리... 오케이.


대충 옷을 갈아입고 복도로 나가니 부엌에서 모자가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쓰레기 버리러 가는 척 둘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Dzień dobry!"


마이클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


지금 걷는 이 구간이 달팽이가 제일 많은 곳 같다. 곳곳에 보이는 흰 껍질과 시커먼 덩어리들을 요리조리 피해봤지만 무슨 소용인가. 발 밑으로 우두둑 우두둑.. 껍질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을 먹기 위해 들린 Bar El Puente. 발 밑으로 조류들이 지나다닌다. 계카페?


지영이는 잘 오고 있나. 연락이 되질 않아서 출발한 줄도 몰랐는데 새벽 네시부터 걷고 있었단다. 간신히 연락이 닿았는데 낯선 이름의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지나온 길로 오는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거니.


Hospital de Órbigo.


해가 정말 뜨겁다. 그늘 밖은 위험해.


어제부터 콧물에 가래까지 기관지가 요란스러웠다. 땀도 닦아야 하고 콧물도 닦아야 하고. 바쁘다 바빠~


10시 45분, Buen Camino!


13시, 기부제 휴게소. 아스토르가까지 6km!


기부제 휴게소에서 이십 분 더 걸으면 보이는 아스토르가! 커다란 십자가 상이 있는 이곳에서 캐런을 다시 만났다.


"캐런, 가방 없으니까 편해?"

"응! 날개를 단 것 같아! 최고야!"


순례길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한국 사람들은 꼭 제 발로 제 짐을 꾸려 완주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이 있다고 하던데, 나는 버스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가방이 조금 신경 쓰였다. '내 짐은 내가 들고 가야지'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데 지금 날아갈 것 같다는 캐런을 보고 있으니 가방 없이 걷는 날이 궁금해졌다. 나도 해볼까?


저 뒤에 있는 마을이 아스토르가


햇빛을 받아 더욱 붉게 보이는 장미꽃



철로 위 보행육교를 지나 아스토르가 마을 초입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구글 지도가 이상하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길로 가면 10분이면 될 텐데, 35분이나 되는 경로로 안내하는 거다. 내가 보고 있는 길이 막혀있는 길인가? 위성 지도로 확인해봐도 막혀있을 법한 곳이 아니었다. 흠.. 구글 지도를 완전히 믿어선 안 되겠다.


초록색 바다 같다.


    오후 세시. 가파른 언덕길을 쥐어짜듯 오르고 나서야 알베르게 도착할  있었다. 오늘 묵을 숙소는 공립 알베르게로 성당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이곳에선 신부님이 직접 체크인을 도와주신다. 신부님 잘생기셨다 ;)


Asociacion de Amigos del Camino de Santiago Astorga y su Comarca. 숙박 5€.

벌써부터 침대수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영이 이름을 함께 예약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예약을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 공립 알베르게라 그런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 친구 늦지만 꼭 올 거라고 한 번 더 얘기하고서야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지영이는 지금 Hospital de Órbigo에서 아스토르가로 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새벽 네시 반에 레온에서 출발한 지영이는 어느 지점에서부터 내가 걸어온 길을 이탈해 또 다른 경로로 걷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지영이도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연락도 잘 안돼서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걱정됐는데, 결국 버스를 타기로 했다고 한다.


시간은 벌써 오후 여섯 시를 넘겼고 예상대로 알베르게는 자리가 다 찼다. 마중 나갈 겸 알베르게 앞에서 서성이는데 체크인을 기다리는 직원분도 함께 나와계셨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미소 지어 주셔서 감사했다.

한 시간 뒤 지영이는 녹초가 되어 도착했고 무사히 체크인을 마쳤다.


지영이를 위해 내가 차려준 밥상. 밥이 역대급으로 잘 됐다.


테라스에서 본 전경


아스토르가 시청


One direction, Many ways.

며칠 전 표석에서 본 글귀. 오늘 이 글귀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됐다.

이 여정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길에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 나와 다른 길로 돌고 돌아 결국 같은 곳으로 온 지영이를 보면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너무 웃기고 재밌었다. 내가 본 거 너도 봤냐고, 대체 어디서부터 엇갈린 거냐며 이야기하는 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08.07.18 아스토르가에서







스물한째 날, Astorga



뭔 모기가 이렇게 힘이 넘치냐.

    자고 일어났더니 왼쪽 다리가 엄청 부풀어 있었다. 뭐에 물린 것 같은데 아주 뜨겁고 딴딴했다. 베드 버그 인가 싶어 직원께 알렸더니, 베드 버그란다. 질겁해있는 나를 따라 곧장 방으로 온 직원은 후레시를 켜 내가 잔 매트리스를 뒤졌다. 몇 번 들쳐보더니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며 내 가방에 붙어서 날 문 것 같다고 곤란해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베드 버그 맞아 이거?


마침 옆 침대 멕시칸 커플이 자리로 돌아왔다. 상황을 묻고 내 다리를 보던 여자가 말했다.


"그거 베드 버그 아니야. 모기야. 아주 강한 모기."


그렇지? 아무리 봐도 베드 버그는 아니지? 십 년 감수했다. 하마터면 가방 속 곳곳을 들어내 세탁해야 하는 엄청나게 귀찮은 일을 해야 할 뻔했다. 약국 가서 안티 어쩌고 먹으라고 했는데 뭔지 까먹었다.. 기다리면 낫겠지 뭐.


    퇴실시간인 여덟 시가 조금 안된 시각, 우리는 알베르게를 나와 카페로 갔다. 천천히 츄러스를 즐기며 티비를 보는데 뉴스에서 산 페르민 축제가 나왔다. 포스터에서 본 그 축제가 지금 팜플로나에서 열리고 있나 보다.

즐거운 축제 분위기의 영상이 지나가고 소몰이 행사 '엔시에로'의 영상이 나왔다. 옆에 가만히만 있어도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뿔을 가진 소들과 경주를 하다니.. 사상자가 생길 수밖에 없어 보였다.


CHOCOLATERÍA SONRISAS.


입실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알베르게 짐을 맡겨 두고 아스토르가를 둘러보러 나왔다.


벤치에 누워 음악 감상~ 한적하고~ 날씨 좋고~


3주 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즐겼다. 너무 시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화한 도시도 아닌 이곳에서 적당하게 편안한 시간을.


Palacio Episcopal. 가우디의 초기작이라고 한다.


한적한 거리


이 동네 식당을 지도로 검색해보니 미슐랭 스타를 단 레스토랑이 꽤 있었다. Las Termas라는 유명한 레스토랑을 가려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랬지, 휴무날이었다.

맛집의 옆집도 괜찮다는 말이 있지 않나. 우리는 그 옆집으로 갔다.


El Capricho. 맛있었다. 맛있었지만.. 분명 방금 식사를 마쳤는데 두부 잔뜩 들어간 목살 김치찌개에 갓 지은 쌀밥이 간절해졌다.


젤라또 1.50€. 달콤달콤


Albergue San Javier. 숙박 10€.


또.. 또 탄산수 샀어!




09.07.18 아스토르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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