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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진 Sep 02. 2019

한 번 더 와도 괜찮을 것 같아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둘째 날, Foncebadón



¡ 요란스러운 부엔 까미노 !


퇴근할 생각이 없는 달과 출근 중인 해


호시탐탐 테이블 위 음식을 노리는 고양이가 있다. Albergue El Caminante. 베이컨 세트, 커피 6.50€.


스물여섯의 나, 산티아고 순례길 걷고 있다!



"해진아, 오늘은 천천히 같이 걷자."


생각해보니 우린 대부분의 날들을 따로 걷고 있었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도착해야지.' '얼른 도착해서 짐 풀어야지.', 나는 도착할 다음 마을만 생각하며 앞만 보고 걸었다. 나는 지영이가 말하기 전까진 서로 속도를 맞춰 걷는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혼자 왔으면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혼자 왔어도 나는 잘 걸었을 거다. 밥도 잘 해 먹었을 거고 친구도 사귀었을 거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큰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단 한순간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걸을 수 있었을까?

물론 그 두려움, 외로움까지 직면하고 배우러 온 순례길이라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지금과는 또 다른 상황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도 있었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지영이와 함께여서 가능했던 것들이 나는 너무나 감사하다. 특별한 이 여행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지금이 너무나 소중하다.


그렇게 도란도란 음악을 들으며 걷던 중 지영이가 혹시 본인 때문에 내 페이스를 망친 건 아닌지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선뜻 답을 하지 못한 나는 곰곰이 내 기분과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내가 혼자 걷는 게 즐거울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앞, 내 뒤, 내 옆 어딘가에 네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 고마워 지영아."



    내 가방은 도이터 New Futura Pro 40이다. 어떤 가방을 살까 인터넷을 뒤지고 뒤지다가 디자인과 활용성을 모두 포기하지 않고 이 모델을 찾아냈다.

처음 사본 배낭이라 애착이 컸다. 이름도 지어줬다. Maximㅋㅋㅋㅋ 그때 한창 'Maximilian Hecker - I'll be a virgin, I'll be a mountain'을 듣고 있어서 막심으로 지어줬다.


어디서 누가 알려줬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가방 때문에 어깨 통증이 심하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가방 메는 법을 알려준 순례자가 있었는데. 누구였지..


아무튼 가방 메는 법! 가방은 허리춤의 벨트로 무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골반과 아랫배에 위치를 잡고 최대한 조이는 게 좋다. 그리고 어깨끈은 느슨하게 메야한다. 지영이는 어깨가 많이 아프다고 극단적으로 늘려놓은 상태다. 보통 저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나는 아웃도어 매장에서 허리 벨트 조이는 법만 배우고 어깨 끈에 대해선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순례길 초반엔 몸에 딱 맞게 조인 채 걸었는데 만약 계속 그렇게 걸었다면 어깨 부상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방의 짐을 어떻게 넣느냐도 영향을 준다. 가벼운 걸 아래로, 무거운 걸 위로 담아 넣는 게 좋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 오후 두 시, 폰세바돈 도착!


오늘 가야 될 알베르게의 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다른 알베르게들이 만원이어서 어쩔 수 없이 오게 됐는데 이곳도 이미 한 층이 다 차서 다락방으로 배정받았다.

침대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그나마 지정된 침대를 써야 하는 건 아니어서 최대한 얼룩이 없는 침대를 골랐다.


저녁은 엄청 큰 스테이크를 파는 레스토랑으로!
기대한 만큼 스테이크, 햄버거 모두 엄청 컸다. 맛도 좋았다. 각 12€.
분위기도 독특해서 소품 하나하나 다 둘러봤다. La Taberna de Gaia.


    숙소로 돌아오니 스페인 여자가 짐을 풀고 있었다. 팜플로나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한다. 모터를 손보고 있는 그를 보고서 그제야 나는 전기 자전거를 타는 자전거 순례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 쌩허벅지로는 힘들지..


도보 순례자들도 순례길 중간에 자전거를 대여할  있다. 가방 운송 서비스처럼 자전거를 대여할  있는 마을이 있다. 실제로 자전거 대여를 이용해본 캐런의 말로는..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본인 컨디션에 맞게 잘만 이용하면 도보 순례와는  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와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가방 이야기가 나왔다.


"내 가방 너무 무거운데 이제 더 이상 버릴 것도 없어."

"몇 킬론데?"

"9kg."

"뭐?! 하하. 이럴 땐 정말 조금씩만 챙겨야 돼. 그리고 익숙하지 않으면 힘든 건 당연해. 괜찮아."


언제쯤 익숙해질까.. 이미 이게 익숙함의 최대치인 것 같은데.. 계속.. 힘들 것 같네..


다시 생각나는 고도 1440m의 폰세바돈 전경



    잠들기 전, 크레덴샬을 펼쳐봤다. 벌써 한 면을 다 채웠네. 다시 걸을 생각 따윈 없다고 그러니 후회 없이 걷겠다고 걸어왔는데, 그 하루하루를 되짚어보니 한 번 더 걸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몽글몽글 차올랐다.

단순해지는 일상, 매일이 색다른 자연 풍경, 새로운 사람들, 또 익숙해지는 반가운 얼굴들.. 한 번 더 와도 괜찮을 것 같아, 순례길.


:)




10.07.18 폰세바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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