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스물째 날, Astorga
세수를 마치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마이클의 형이 문 앞에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안ㄴ..? 어? 어떻게 한국말? 어..??!"
수건을 안 챙겨가서 내 얼굴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후다닥 방으로 돌아갔다.
어제부터 보았던 이 가족들이 내 눈엔 참 인상 깊었었다. 짧은 인사들이 전부였지만 그 순간순간 느껴지길 부모의 눈빛은 인자했고 아이들의 미소는 건강해 보였다.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핸드폰을 켜 폴란드어 아침 인사를 검색했다. 지.. 엔... 도브.. 리... 오케이.
대충 옷을 갈아입고 복도로 나가니 부엌에서 모자가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쓰레기 버리러 가는 척 둘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Dzień dobry!"
지금 걷는 이 구간이 달팽이가 제일 많은 곳 같다. 곳곳에 보이는 흰 껍질과 시커먼 덩어리들을 요리조리 피해봤지만 무슨 소용인가. 발 밑으로 우두둑 우두둑.. 껍질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영이는 잘 오고 있나. 연락이 되질 않아서 출발한 줄도 몰랐는데 새벽 네시부터 걷고 있었단다. 간신히 연락이 닿았는데 낯선 이름의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지나온 길로 오는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거니.
어제부터 콧물에 가래까지 기관지가 요란스러웠다. 땀도 닦아야 하고 콧물도 닦아야 하고. 바쁘다 바빠~
기부제 휴게소에서 이십 분 더 걸으면 보이는 아스토르가! 커다란 십자가 상이 있는 이곳에서 캐런을 다시 만났다.
"캐런, 가방 없으니까 편해?"
"응! 날개를 단 것 같아! 최고야!"
순례길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한국 사람들은 꼭 제 발로 제 짐을 꾸려 완주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이 있다고 하던데, 나는 버스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가방이 조금 신경 쓰였다. '내 짐은 내가 들고 가야지'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데 지금 날아갈 것 같다는 캐런을 보고 있으니 가방 없이 걷는 날이 궁금해졌다. 나도 해볼까?
철로 위 보행육교를 지나 아스토르가 마을 초입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구글 지도가 이상하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길로 가면 10분이면 될 텐데, 35분이나 되는 경로로 안내하는 거다. 내가 보고 있는 길이 막혀있는 길인가? 위성 지도로 확인해봐도 막혀있을 법한 곳이 아니었다. 흠.. 구글 지도를 완전히 믿어선 안 되겠다.
오후 세시. 가파른 언덕길을 쥐어짜듯 오르고 나서야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묵을 숙소는 공립 알베르게로 성당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이곳에선 신부님이 직접 체크인을 도와주신다. 신부님 잘생기셨다 ;)
벌써부터 침대수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영이 이름을 함께 예약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예약을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 공립 알베르게라 그런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 친구 늦지만 꼭 올 거라고 한 번 더 얘기하고서야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지영이는 지금 Hospital de Órbigo에서 아스토르가로 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새벽 네시 반에 레온에서 출발한 지영이는 어느 지점에서부터 내가 걸어온 길을 이탈해 또 다른 경로로 걷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지영이도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연락도 잘 안돼서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걱정됐는데, 결국 버스를 타기로 했다고 한다.
시간은 벌써 오후 여섯 시를 넘겼고 예상대로 알베르게는 자리가 다 찼다. 마중 나갈 겸 알베르게 앞에서 서성이는데 체크인을 기다리는 직원분도 함께 나와계셨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미소 지어 주셔서 감사했다.
한 시간 뒤 지영이는 녹초가 되어 도착했고 무사히 체크인을 마쳤다.
One direction, Many ways.
며칠 전 표석에서 본 글귀. 오늘 이 글귀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됐다.
이 여정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길에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 나와 다른 길로 돌고 돌아 결국 같은 곳으로 온 지영이를 보면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너무 웃기고 재밌었다. 내가 본 거 너도 봤냐고, 대체 어디서부터 엇갈린 거냐며 이야기하는 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08.07.18 아스토르가에서
스물한째 날, Astorga
자고 일어났더니 왼쪽 다리가 엄청 부풀어 있었다. 뭐에 물린 것 같은데 아주 뜨겁고 딴딴했다. 베드 버그 인가 싶어 직원께 알렸더니, 베드 버그란다. 질겁해있는 나를 따라 곧장 방으로 온 직원은 후레시를 켜 내가 잔 매트리스를 뒤졌다. 몇 번 들쳐보더니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며 내 가방에 붙어서 날 문 것 같다고 곤란해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베드 버그 맞아 이거?
마침 옆 침대 멕시칸 커플이 자리로 돌아왔다. 상황을 묻고 내 다리를 보던 여자가 말했다.
"그거 베드 버그 아니야. 모기야. 아주 강한 모기."
그렇지? 아무리 봐도 베드 버그는 아니지? 십 년 감수했다. 하마터면 가방 속 곳곳을 들어내 세탁해야 하는 엄청나게 귀찮은 일을 해야 할 뻔했다. 약국 가서 안티 어쩌고 먹으라고 했는데 뭔지 까먹었다.. 기다리면 낫겠지 뭐.
퇴실시간인 여덟 시가 조금 안된 시각, 우리는 알베르게를 나와 카페로 갔다. 천천히 츄러스를 즐기며 티비를 보는데 뉴스에서 산 페르민 축제가 나왔다. 포스터에서 본 그 축제가 지금 팜플로나에서 열리고 있나 보다.
즐거운 축제 분위기의 영상이 지나가고 소몰이 행사 '엔시에로'의 영상이 나왔다. 옆에 가만히만 있어도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뿔을 가진 소들과 경주를 하다니.. 사상자가 생길 수밖에 없어 보였다.
입실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알베르게에 짐을 맡겨 두고 아스토르가를 둘러보러 나왔다.
3주 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즐겼다. 너무 시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화한 도시도 아닌 이곳에서 적당하게 편안한 시간을.
이 동네 식당을 지도로 검색해보니 미슐랭 스타를 단 레스토랑이 꽤 있었다. Las Termas라는 유명한 레스토랑을 가려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랬지, 휴무날이었다.
맛집의 옆집도 괜찮다는 말이 있지 않나. 우리는 그 옆집으로 갔다.
09.07.18 아스토르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