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스물셋째 날, El Acebo de San Miguel
날씨가 심상치 않다. 사방에 안개가 자욱했다. 비가 쏟아지려나? 출발해도 괜찮은 거겠지?
잠깐 들린 마트에서 바나나와 초코우유를 샀다. 우비를 살까 말까, 고민하고 말았다. 비가 와봤자 소나기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출발 10분 뒤,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지만 온통 뿌연 하늘이 신기하기만 했다.
출발 20분 뒤, 바람의 세기가 굉장히 세지고 빗방울의 굵기도 굵어졌다. 이거..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은데?
출발 30분 뒤, 우리는 맨몸으로 비바람에 우박까지 맞고 있었다.
출발 40분 뒤, 온몸이 젖었다. 푹 젖어버린 기능성 옷들이 바람에 펄럭여 철썩철썩 몸에 붙을 때마다 너~무 추웠다. 보조가방은 괜찮나? 돈이랑 여권, 보조배터리랑 핸드폰은?! 얼른 재정비할 곳을 찾아야 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만을 외치다가 드디어 대피소를 발견했다. 그 유명한 철의 십자가 있는 곳이었다.
저 십자가가 피뢰침 역할을 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저 근처에 서성이다 벼락을 맞지는 않을까. 머릿속에선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내 몸과 눈은 멍하니 십자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마트라도 있을 줄 알았던 대피소는 아무것도 없는 그냥 대피소였다. 이걸 어쩌지. 다시 돌아갈 수도 없잖아.
일단 모든 전자기기는 지퍼백에 넣고 옷으로 감싼 뒤 가방에 넣었다. 돈과 여권도 지퍼백에 동봉했다. 가방엔 방수커버가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맨 위에 수건을 깔아 두고 커버를 씌웠다. 그리고 각자 챙겨 온 바람막이를 입었다. 방수 기능은 없는 포켓 바람막이어서 이마저도 곧 젖겠지만 너무 추운데 어쩌겠나 이거라도 입어야지.
민지도 근처 바에서 대피 중이라는데 다행히 다시 돌아갈 수 있어서 바에서 만난 한국분들과 함께 돌아갈 거라고 했다. 하.. 우리는.. 계속 가야지. 얼굴을 손으로 쓸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빗줄기를 쏟아내는 하늘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음 굳게 먹고, 다음 대피소까지 출발.
아까와 같은 대피소인 줄 알았는데 기부제 음식과 물품들이 있는 알베르게였다. 우리를 맞이해주신 관리인께서 길에 대한 정보를 주셨다. 산길로 이어지는 순례길로 가지 말고 도로로 가라고,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도로로 가는 게 안전하다고 알려주셨다. 뒤이어 들어온 순례자들에게도 이 정보를 전달하고 우리는 다시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빗 속에 뛰어든 내 몰골은 아마 가관이었을 거다. 모든 게 젖어버린 몸뚱이는 뭐, 말할 것도 없고. 모자의 창 덕분에 그나마 눈은 뜨고 걸을 수 있었는데 얼굴 위로 끊임없이 흐르는 빗물 닦아내랴, 방심하면 주르륵 흘러내리는 콧물 훌쩍이랴.
한 번은 눈치 없이 자꾸 흐르는 콧물에 화가 나 나뭇잎 하나를 낚아채 그걸로 코를 풀었다. 엉엉 울면서, 그 와중에 걸음은 멈추지 않고, 코를 풀었다. 우씨.
빗줄기가 조금, 아주 조금 약해졌다. 신발이 완전히 젖었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아챘다. 젖는 게 당연한데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걷고 있었다. 단전에서부터 차오르는 한숨을 내뱉으며 지영이를 보는데 눈이 마주치자 둘 다 웃음이 터졌다.
"야, 이 정도면 조난 아니냐."
"ㅋㅋㅋㅋ맞아ㅋㅋㅋㅋ."
"근데 또 진짜 조난당할 것 같진 않아. 조난당하지 않을 걸 알아서 계속 걸어야 돼 우리ㅋㅋㅋㅋ."
폰세바돈부터 10.5km, 세 시간 반. 그렇게 우리는 마을 엘 아쎄보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서 안도의 욕이 절로 나왔다. 살았다! 살았어!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윗옷을 벗어내고 수건으로 상의를 둘렀다. 누가 보든 말든.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입실 시간을 기다릴 수 없었다.
알베르게 직원분들도 우왕좌왕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일단 체크인을 하고 입실 시간을 기다리려 했는데 다행히 바로 방을 안내받았다.
원래 이 알베르게에 있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려 했는데.. 수영장은 무슨.. 숙소 오는 길에 물놀이 실컷 했네.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이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보조가방은 침수됐고 배낭은 어깨끈을 타고 흐른 빗물로 밑부분만 조금 젖어있었다. 모든 물건들을 닦아내고, 침낭과 양말, 신발을 테라스에 널었다. 과연 내일까지 마를까? 안 마르면 택시를 타야 하나?
으슬으슬 추운 것이 지금 안 쉬면 진짜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절대 아프지 않을 거라며 주섬주섬 비상약 파우치에서 감기약을 꺼내 먹었다. 이제 한숨 자야지. 이곳 담요가 두툼해서 한순간에 잠에 들었다.
한숨 잤는데도 시간은 아직 세시. 바로 내려가니 지영이가 앉아있었다. 파니니를 사 먹었다길래 나도 뭔가 먹어야겠다 싶었다. 뭘 먹을까 메뉴를 보다가 송아지 핫 샌드위치를 골랐다. 별로 들어간 것도 없는데 맛이 좋았다.
오늘 저녁은 메뉴 델 디아. 토마토 수프와 치킨구이, 그리고 디저트는 딸기를 선택했다. 짭조름한 토마토 수프가 내 입맛에 잘 맞았다. 그렇게 한술 두 술 수프를 먹고 있는데 옆자리 영국 남자가 한국에도 콜드 수프가 있냐고 물었다. 처음엔 없다고 했는데 동치미가 생각나서 있다고 했다. 마! 우리도 있다! 콜드 수프!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긴 곳은 휴게실 소파. 이곳에서 다 같이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 조금 전 식사 테이블에서 여러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던 중년의 여자가 앉았다.
이 여자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신디. 신디의 이야길 들어보니 이 유쾌함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에너지란 게 느껴졌다.
"나는 한 평생 교사로 일하면서 미국을 떠나본 적이 없었어. 그러다 이번에 하던 일을 멈추고 유럽 여행을 온 거야. 그런데 너무 좋아. 친절한 사람들, 아름다운 자연. 나는 뭐든 미국이 최고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고. 너무 좋아 유럽!"
11.07.18 엘아쎄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