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스물아홉째 날, Sarria
오전 여덟 시, 버스 정류장을 찾아 안내받은 곳 주변을 돌아다녔다.
오늘 버스를 타고 갈 마을 사리아는 순례길에서 중요한 장소다. 100km가 남은 지점이기도 하고, 최소한 사리아에서부터는 걸어야 순례길을 완주했다는 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은 100km를 지치지 않고 무사히 걷기 위해 쉬어가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안전하고 건강하게!
오늘 예약한 알베르게는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것 같았다. 무뚝뚝해 보이던 사장님께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이대로 쭉 별일 없이 걷는다면 다음 주면 산티아고에 들어가게 된다. 벌써 산티아고라니.. 그런데 마침 우리가 머물기로 한 날에 큰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지금 이 순례길을 걸었던 성 야고보의 축일로, 축제 기간 동안 도시 전체가 축제의 현장이 되고 축일 당일에는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특별한 향로 미사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축일인 7월 25일에 맞춰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많다고 한다. 이 말은 즉 우리가 걷게 될 길에 사람이 엄청 많을 거라는 뜻! 그렇지 않아도 사리아부터만 걸어도 완주를 인정받을 수 있어서 사리아부터 산티아고까지 공립 알베르게 자리가 치열할 거라던데.. 더 치열할 것 같다.
우리는 마음 편하게 사설 알베르게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럴 때 돈을 써야지.
숙소 근처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쇼핑도 하고 사리아에서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문어요리도 먹어보고.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사리아 성당의 세요를 받으러 가는 길. 영차영차 오르막을 올라 들어간 성당에선 직원께서 밝은 인사로 반겨주셨다. 세요를 찍어주시고는 벽에 있는 포스터를 찍어 가라고 하셨는데 사리아 이후부터 들릴 마을의 성당 목록이었다. 사리아부터는 들리는 모든 숙소와 성당의 세요를 모아야 증서를 발급받을 때 문제가 없다고 한다.
내가 느낀 순례길 위에서의 즐거움 중에는 스페인어를 익혀가는 것도 있었다. 올라, 그라시아스, 우노, 도스, 뜨레스 밖에 모르던 나도 순례길을 걸으면서 자연스레 입에 붙은 문장들이 있는데,
1. Hola. (안녕.)
2. ¡Buen camino! (즐거운 까미노 되길!)
3. Gracias. / Muchas gracias. (고마워. / 정말 고마워.)
4. ¿Qué tal? / ¿Cómo estás? (잘 지냈어?)
5. ¡Buenos días! (좋은 아침!)
6. Café con leche. (우유를 넣은 커피.)
7. ¿Cuánto cuesta? (얼마예요?)
8. uno, dos, tres, cuatro, cinco (1,2,3,4,5)
9. Perdón. (실례합니다.)
10. Por favor. (부탁합니다.)
굳이 암기할 필요는 없는 아주 간단한 문장들이다. 실제론 영어를 훨씬 많이 썼지만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스페인 사람도 많았다.
취침 시간이 되어 순례자들이 하나 둘 숙소로 돌아왔다. 내 옆 침대엔 한 가족이 배정을 받았는데, 십 대 남자아이와 그의 부모가 함께 순례길을 온 모양이다. 부모가 짐 정리를 하는 동안 아이는 어눌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며 침대 위를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런 그를 부모가 다가와 진정시켰다. 장애가 있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길에서 장애인 순례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장애인이 걷는 순례길은 어땠을까? 제약이 됐던 부분이 있지는 않았는지 잠깐이나마 걸어온 길들을 되돌아보았다.
누적된 피로로 무릎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가방 깊숙이 묵혀뒀던 보호대가 빛을 발할 때가 됐군. 부족한 근력으로 근근이 살다가 한 달 가까이 쉴 틈 없이 걸었으니 관절이 놀라도 진작에 놀랐을 것이다. 한편으론 이만큼 걷고 나서 통증이 생긴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내 관절 조금만 더 힘내자 고지가 눈앞이다!
17.07.18 사리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