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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Aug 24. 2021

9.백 년 된 목조 고(古) 주택에서 하룻밤

롬(LOM)

 여행 동선을 짤 때 가장 염두에 둔 건 운전 시간을 하루 2~3시간 이상 넘지 않게 제한하는 거였다. 두 달 전 토스카나에서 운전할 때, 아무리 운전을 좋아하는 신랑이라지만 날이 몹시 더운 탓에 몇 시간을 연달아 운전을 하면 확실히 지치는 기색이 보였다. 우리의 7박 8일 노르웨이 여행 큰 그림은 5일 동안 릴레함메르에서 렌터카를 픽업해 서쪽 끝에 있는 베르겐까지 갔다가 다시 릴레함메르로 돌아와 차를 반납하고, 오슬로까지는 기차로 가는 것.      


 본격적인 첫 여행지인 롬은 릴레함메르에서 2시간 정도 거리였다. 우리의 숙소는 롬 시내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Kvaale Gard라는 오래된 목조 고택이었다. 지금도 정확히 뭐라고 읽는지 모른다. 그때에도 크으.... 가드, 크-거기거기 라고 우리끼리 킥킥대며 읽었다.      


 노르웨이 여행을 할 때 루트를 짜는 것과 더불어 숙소 예약도 꽤 난관이 따랐다. 보통 여행을 할 때 트립 어드바이저에서 가는 도시와 날짜를 입력하고, 여행객 평점에 따라 8점대 이상으로 후보군을 간추리고, 우리 가려는 목적지와의 거리를 보고, 구글과 네이버로 검색해 친절한 투숙객들이 찍은 클로즈업 사진과 실제 후기들을 보며 결정한다. 그런데, 노르웨이는 오슬로나 베르겐 등 대도시를 제외하면 한국 사람들의 평가 모수 자체가 적었고 구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느 도시를 가나 똑같은 호텔방이 아니라 노르웨이식 감성이 묻어나는, 로컬 느낌의 숙소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에어비앤비도 알아봤으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으니 방에 화장실이 0개라고 뜨는 곳이 종종 있었던 것. 네?!     


 Kvaale Gard는 본채동과 별채가 있었다. TV도 없고 벽과 바닥과 천장이 모두 나무로 지어진 100년 된 고택. 외관은 배산임수의 멋진 통나무 목조주택이었다. 전문용어로 노르웨이식 여름 별장인 휘떼라고 했다. 예약 전 사진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오래된 집이고, 화장실이 객실마다 있지 않아 별채에 머무르면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밤에 갑자기 본채로 급히 바지춤을 부여잡고 뛰어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 불안해하며 내가 예약한 방은 아주 작지만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딸려있고, 침실과 거실, 주방도 작게 있는 방이었다. 가격은 다른 방들 보다 조금 더 비쌌지만 화장실이 방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이게 든든해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을 때, 신랑에게 “여기는 오래된 목조 주택이라, 좀 불편하고 오빠 마음에 안들 수 있다”라고 기대감을 낮춰놓고 시작하려 했는데 웬걸, 숙소 입구가 양편에 빼곡히 심어진 자작나무 길인 것을 보는 순간 우리 부부는 취향 저격을 당하고 말았다. 하얀 몸통의 가느다란 자작나무 몸통에 달린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길을 빠져나오면 진짜 100년은 된 듯한 2층짜리 목조주택이 두 채 있었다. 3시쯤 도착하니 살찐 토르 같은(이것은 칭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건장한 청년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아직 체크인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1시간만 있다가 다시 들러달라고 했다. 삐걱이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 무거운 트렁크 두 개를 올려두고 우리는 롬 시내를 구경하러 왔다.  롬에서 공식 첫 일정은, 추적추적 비도 오니 바로 마트에서 장보기! 유명한 고등어 필렛 통조림도 사고, 노르웨이 필스너 맥주, 감자칩, 새우 스프레드, 베리가 무려 80%나 들어갔다는 잼, 빵, 토마토 수프, 초콜릿 우유 등등 야무지게 샀다. 아직 환율이 적응이 안 되어서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부지런히 장바구니를 담았다.      


 노르웨이는 비가 많이 온다더니, 본격 여행 첫날은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어차피 도착하니 오후 4시 무렵이고 비가 안 왔어도 할 일은 동네 산책이었는데, 라디오를 들으며 멍 때리기로 했다. 비가 제법 내려서 우리는 소파에 누워 창문 밖 자작나무에 후두둑 후두둑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었다. KBS 클래식 FM을 조용히 틀어놓고. 
 

 집 안 가구들도 대부분 나무로 직접 만들어진 것들이었고, 주방 싱크대는 물론이고 창틀도 나무였다. 무려 방충망 틀도 나무로, 장식장도 나무를 넝쿨 모양으로 조각해 장식이 되어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투박하면서도 나무 본질에서 나오는 편안한 멋이 있었다.      


 창밖엔 산이 마주 보였고 산 아래로는 제법 큰 호수가 흘렀다. 옥빛 호수 위, 산 중턱에는 물안개가 가득 끼어 있어 운치가 더할 나위 없었다. TV도 없고 숙소는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서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됐다. 나는 노르웨이 문화에 대한 책을 읽었고, 신랑은 비스듬히 누워 멍하니 창밖을 봤다. 저녁에는 햇반에 라면 하나 짜장라면 하나 사이좋게 끓여 고국의 MSG로 허기와 영혼을 달래고 일기를 쓰고 과일을 먹고 밤을 맞았다. 심지어 8월의 한가운데인데 냉기가 돌아 히터를 틀어놓고 잠들었다. (노르웨이에 여름이 있긴 한 것인가....)     


 예쁘고 고즈넉한 숙소에도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너무나 친환경적인 나머지 파리가 윙윙 들끓었다. 옛날에 할머니 집에 있던 빨간색 그물망의 고전적인 파리채가 거실 한가운데에 살포시 놓여있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했다. 신랑과 나는 파리 학살자가 되어 족히 10마리가 넘는 파리를 잡았다. 노르웨이 산속까지 와서 이 어여쁜 숙소에서 할머니 집에 있던 파리채를 휘두르는 서로가 너무 웃겨서 배가 아프게 웃었다. 여기도 파리가 사는 동네 구만. 


 다음날에도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오전에는 롬 시내에 있는 마트에 가서 접이식 우산도 사고, 내가 가져온 여름옷으로는 노르웨이의 서늘한 여름을 버틸 재간이 없어 바지도 하나 사 입었다.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 속에서 무려 70% 할인을 하는 노란 겨자색 바지를 2만 원 돈에 득템 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 우산을 하나 나눠 쓰고 롬이라는 동네를 구경했다. 12세기 노르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롬 스타브 교회도 둘러봤다. 제단도 벽장식도 모두 나무로 되어있는, 유럽에서 처음 보는 건축양식이었다. 상아 빛 화려한 대리석으로 수놓은 이탈리아의 시에나 대성당과 대조되는 소박 함이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교회였지만 입장료는 꼬박꼬박 받았다. 우리 돈으로 1인당 16,000원 정도 내자, 젊은 청년이 영어로 된 설명서를 건넸다. 교회의 역사와 건축사적 의의에 대해 A4 앞뒤로 빼곡하게 쓰여 있는 종이를 코팅한 것을 나눠준다! 보통 홍보 브로셔를 받으면 보고 버릴 텐데, 이렇게 나눠주니 보고 또 나가면서 반납하고 무한대로 쓸 수 있게 만들어 둔 지혜였다. 관광지 브로셔나 광고 인쇄물로 낭비되는 종이와 나무를 생각하며, 이들의 혜안에 감탄하는 내 모습을 보자 신랑이 말했다. “유럽 병이 다시 도졌다”라고.      


 롬은 동네 전체가 산을 끼고 있어 짙은 녹음이 지천이었다. 릴레함메르가 알록달록 화려한 옷을 입고 동계올림픽을 열어 손님을 치른 도시라면 롬은 집 외벽 색부터 고동색이 많고 우직한 느낌이었다. 점심은 마트에서 사 온 토마토 수프에 빵, 새우 스프레드 등을 얹어 현지식(?)으로 가볍게 먹고 우리는 다시 자작 나뭇잎과 바스락 손을 스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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