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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Aug 24. 2021

8. 릴레함메르 클라리온 호텔

나를 이렇게 대한 호텔은네가처음이야

 통잠을 자고 새벽녘에 일어나서야 내가 머문 호텔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클라리온 호텔은 노르웨이에 규모가 좀 있다는 도시마다 자리 잡고 있어서, 클라리온 호텔이 없으면 인구밀도가 아주 낮은 곳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노르웨이 전국 방방곡곡 있는 호텔이었다. 특히 이곳은 조식과 저녁식사가 제공되어 훌륭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조식과 저녁에 명성까지 운운할 정도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외식비가 비싼 노르웨이에선 미덕이니 명성이라고 불러주자.)      

 그런데 호텔에는 일회용 어메니티가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문자 그대로 단 한 개도 없었다. 다회용 용기에 담겨있는 샴푸와 바디워시가 전부. 그 흔한 생수병도 없었다. 물은 수돗물(화장실 세면대)을 마시면 된다고 했다. 방에는 커피포트도 없고 당연히(?) 커피나 티백도 없었다. 화장실에 유리잔 두 개가 전부였다. 냉장고도 없었다. 여기는 식사로 명성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꽤 유명한 체인 호텔이고 1박에 20만 원 중반 정도 하는 곳이다. 독일이 ‘서비스 사막’이라는 별명이 있다는데, 그에 비하면 노르웨이는 선인장도 자라기 힘든 서비스 불모지 정도 되려나. 처음에는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사실문제 될 건 없었다. 서울에서도 익히 명성을 들었기에 샴푸와 린스는 챙겨 온 것을 쓰면 됐고, 나머지 욕실 어메티니야 있어도 잘 쓰지 않는 것들이니까. 냉장고가 없는 것은 좀 아쉽지만, 수돗물이 시원하게 콸콸 나왔다. 호텔 1층 라운지에서 따뜻한 커피와 물, 차를 24시간 무료로 먹을 수 있게 준비해두었으니 조금 귀찮지만 납득이 됐다.     

 내 불평은 조식에서 나왔다. 메뉴는 알차고, 실속 있고 유기농 재료가 많아 선택지도 다양했다. <큐리어스 노르웨이>라는 책에 따르면, 노르웨이는 푸짐한 아침식사 문화로 유명하다더니 고등어조림이나 간 요리, 생선알 마요네즈 등등 노르웨이의 대중적인 음식도 먹어볼 수 있고,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다만, 이들은 흰 식빵이 아니라 잡곡 빵만 먹어서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귀리가 풍성한 나라라더니, 식당의 빵은 여러 가지 종류이나 모두 잡곡빵=건강빵=아빠가 좋아하는 맛=나는 싫어하는 맛=어른의 맛이었다. 탄수화물의 글루텐이 씹히면서도 버터의 길티 플레져 한 크림 맛이 어우러진 쫀득한 맛이 아니라 고소하지만 쉽게 으스러지고 딱딱한 건치인들이 좋아할 맛이었다. 심지어 노르웨이인들이 식사대용으로 먹는다는 비스킷도 잡곡이 아주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다. 저는 흰 빵, 밀가루의 맛, 퓨어 탄수화물의 맛, 빵이란 자고로 버터 반 밀가루 반이 들어가는 것인 줄 알았던 그 맛을 좋아하는데요. 조식은 모름지기 탄수화물 맛, 기름 맛, 거기에 버터를 치덕치덕 발라먹는 맛 아닌가요? 노르웨이식 빵은 견과류와 건강 재료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이걸 빵이라고 분류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대신 베리류는 정말 신선하고 달콤했다. 맛없는(無맛) 빵이지만 새콤 달콤 라즈베리 잼을 듬뿍 바르면 좀 먹을 만했다. 베리 요거트는 내가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었는데, 내가 알던 형체 없이 으깨지고 개수도 몇 개 안 되던 베리가 아니라 통으로 과육도 아주 풍성하게 들어있었다. 우유도 저지방 우유에 지방 함유량을 선택해 마실 수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에그 스테이션에는 넓은 인덕션이 있었다. 옆에는 계란이 있고, 사람은 없었다. 먹는 사람이 알아서 찜을 쪄먹든 날로 먹든 구워 먹든 맘대로 하라는 거였다. 이런 쿨내 나는 사람들 같으니. 서빙하는 직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커피도 기가 막히게 신선하고 고소했다.     

 전반적으로 과잉된 친절함은 없지만, 없는 것도 없는 호텔이 살펴볼수록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며 좋아졌다. 전날 밤 호텔에서 저녁을 먹지 못하고 잠든 게 아쉬울 정도로.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친환경 정책들이었다. 객실 내에 일회용품이 단 하나도 없는 것부터, 다른 곳에서도 플라스틱이 눈에 띄질 않았다. 라운지에서 언제든 가져갈 수 있는 테이크아웃 컵은 뚜껑도 종이였다. 한국에서 일회용품 줄이기 바람이 불면서, 카페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 빨대로 교체하는 정도인데 이곳은 확실히 플라스틱 소비와 사용에 대한 수준과 문화가 남달랐다. 종이 커피 잔 뒷면에 무심히 쓰여 있는 ‘Coffee by Nordic Choice’ 도 에지 있지만, ‘Future Smart’나 공정무역 로고까지. 보여주기 식 일회용품 소비 제한이 아니라는 인식을 받았다. 여기는 진짜다. 그래서 인가 커피도 더 맛있네, 냠냠.     

 몇 가지 눈에 호텔 정책도 있었다. 가령 애완동물도 같이 투숙 가능하며 (엑스트라 비용 발생), 장애인 안내견은 무료로 투숙이 가능하다는 것! 한국에 이런 호텔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차가운 겨울왕국의 노르웨이인들이라지만, 호텔에는 곳곳에 참지 못한 유머도 보였다. 가령 엘리베이터 안내 문구는 WHEN NOTHING GOES RIGHT, GO LEFT!라는 식이다. 노르웨이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키를 신고 있다는 속담을 보여주는 듯, 나무 스키가 호텔 곳곳에도 전시되어 있다.      

 전 세계 호텔을 다니며 비슷비슷한 디자인과 구조, 서비스에 익숙해진 내게 노르웨이 첫 숙소는 심플하고 신선했다. 손님이 필요한 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파악해서 해결해준다는 모토의 컨시어지 서비스는 없었지만, 물어보면 누구나 친절했고 요청하는 것들에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근데 물은 어디서 마셔?” “방에 수돗물 시원하고 맛있어” 눈 미소 찡긋)      

 어쩌면 나는 가성비라는 계산법에 익숙해져서 같은 값이면 많은 것을 얻어 내야 한다는 태도로 살지 않았는지 반성했다.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에서도 플라스틱 하나 없이 손님을 받으며 만족스러운 투숙을 할 수 있는 곳이 노르웨이에는 산 증인처럼 존재했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커피포트나 커피 티백도 없고, 어매니티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무료로 생수병 하나도 주지 않는 4성급 호텔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동남아에 3만 원 대 숙소를 가도 무료 생수병 하나는 있었는데. 나를 이렇게 대한 호텔은 클라리온 네가 처음이야! 그리고 나는 순정만화와 멜로드라마의 뻔한 공식대로 단단히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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