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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Dec 23. 2021

13. 피오르드의, 피오르드에 의한, 피오르드를 위한


 노르웨이의 상징, 노르웨이 관광의 꽃, 송네 피오르드 선상 유람의 날이 밝았다. 가져온 가장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방금 벼린 칼처럼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채찍처럼 내리쳤다. 붉은 노르웨이 국기를 보니 한국에서는 입지도 않는 빨간 내복이 절실히 그리워졌다. 8월의 여름날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텀블러에 담아온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가며 마셔도 온기가 금세 증발했다.      


 고등학교 세계지리 수업시간 언젠가 피오르드를 배운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교과서에 실린 피오르드는 산 사이에 강이 흐르는 사진이었고 춘천 닭갈비 구이집 앞 남한강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짧은 인생 경험치로 이해하기에 피오르드는 너무 멀고 생소하고 수능에도 출제될 것 같지 않았다. 피오르드라는 생경한 발음이 녹지 않는 얼음 같아서 기억이 난다. 


 당연히 그때는 인생에 한 번쯤 내가 저곳에 가봐야겠다는 의지나, 막연한 기대감조차도 생기지 않았다. 노르웨이에서 빙하가 침식해서 피오르드를 만들든 피를 만들든 그게 당장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람. 열일곱 인생에서 본 적 없는 것을 바탕으로 상상을 요구하는 교과서의 터무니없음이 짜증 났던 기억만 난다. 그래서 피오르드를 알아서 어디다 써먹는 거죠? 네? 어쩌라고?라는 반항심만 가득했고, 이런 질문들은 학창 시절에는 대체로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제야 다시 찾아보니 빙하와 만년설이 조금씩 내려앉아 산을 주저앉히면서 브이자로 깎여나간 자리에 바다가 깊숙이 들어온 지형을 피오르드라고 했다. 15년 뒤, 20년 뒤에 직접 피오르드를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때의 나는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어떤 질문들은 20년 뒤에야 응답을 받기도 한다.      


 송네 피오르드는 길이가 204km에 이르는 노르웨이 최장 협만이다. 얼핏 평온한 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닷물이기 때문에 피오르드가 닿는 지면은 모두 해안선이다. 수심이 마냥 평화로워 보이지만 최대 수심이 1,307m라니 자칫 잘못 빠지면 그 길로 얼음골 저승행이었다. 송네 피오르드를 2시간 동안 구경하는 비용은 겨울왕국 화폐를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6만 원(2인). 한국에서는 뮤지컬 한 편을 구석진 뒷자리에서 볼 수 있는 가격이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순간도 아까워하며 봤다.      


 신랑이랑 두 시간 동안 피오르드를 실컷 눈에 담으며 이야기했다. 우리 인생에 두 번째 노르웨이 피오르드 선상 관람을 하는 날이 올까? 오늘 이 순간이 마지막일까? 혹시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일까? 신랑은 지긋이 웃으면서 알 수 없다고 했다. 어쩌면 다시 올 수도, 아닐 수도.      


 다만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게 될 때는 지금의 질문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질문들은 10년, 20년 혹은 더 오래된 시간 뒤에 대답을 알게 되기도 하지만 기억된 질문들은 나침반이 되기도 하고 낚싯대의 미끼가 되기도 하면서 언젠가는 대답으로 이끌어 준다는 걸 믿는다. 그러니까 정답보다 중요한 건 인생에 질문을 던지는 투수의 자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시구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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