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바이브로 마시는 맥주
별 기대는 없었다. 플롬은 송네 피오르드를 도는 페리와 뮈르달에 가는 산악열차를 모두 경험해볼 수 있는 인기 관광지다. 그렇다고 해도 숙소도 많지 않고, 식당도 손에 꼽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동네 구경을 할 겸 밖을 나간 길에 맥주나 한 잔 할까 하는 마음으로 별 특징은 없어 보이는 통나무로 지어진 맥주집에 들어갔다. 여기 말고 다른 선택지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안에는 완전히 새로운 신들의 세계였다. 거칠면서도 반들반들하게 나무를 갈고닦아 만든 의자와 테이블, 벽 한 면에 보이는 바이킹 아에기르의 초상화까지 난생처음 보는 바이킹 바이브에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한편에서 플롬의 물로 로컬 수제 맥주를 만드는 브루어리였다.
맥주를 주문하면 따라주는 탭의 손잡이도 순록 뿔 모양인데, 아마도 나이테가 멋들어진 나무를 골라 섬세하게 조각한 것 같았다. 잔을 매달아 놓은 천장도 나무, 맥주 계산대와 바도 나무였다. 원목 나무의자는 손님들이 얼마나 이곳을 사랑했는지 반들반들 윤이 났다. 호박 꿀을 발라 놓은 것 같이 멋졌다. 테이블은 나무로 만든 드럼통!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존재하다니. 맥주 맛은 말해 뭐하겠는가. IPA 맥주는 지금껏 먹어본 맥주 중에 손에 꼽힐 정도였다.
물론 장소가 더해주는 분위기의 맛과 다시 먹을 수 없다는 희소성의 맛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경험상 외국 맥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곳이 맛있었다. 첫째, 물이 맑은 동네 둘째, 심심한 동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조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심심한 동네일수록 맥주를 마실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더 맛있는 맥주를 찾게 되고, 이럴 바엔 내가 만들어서 먹자라는 사람들이 생기고,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맥주에 이 효모도 섞어볼까 저 과일 향도 넣어볼까 하는 시도를 많이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양조 기술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무료한 데다 물 까지 맑고 깨끗하다? 맥주계의 실리콘밸리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 아무튼 이런 헛소리를 할 정도로 맛이 빼어나서 한 잔에 15,000천 원 가량인데도 우리는 가격도 신경 쓰지 않고 마셔댔다. (처음 주문한 IPA는 평범했다. 두 번째 다시 주문했을 때 방금 막 캐스켓에서 딴 맥주가 나왔는데 신세계는 여기였다. 맥주만큼 신선도가 중요한 음료가 없다. 술꾼 피셜)
브루어리의 이름인 아에기르(Ægir)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익숙한 우리의 비유로 따져보면 포세이돈과 같이 바다를 다스리는 신의 이름이다. 아에기르의 딸들은 아버지와 함께 에일을 빚어 신들의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펍이 커다란 바이킹 보트 같았고, 나는 바이킹들과 파도가 치는 선상에서 아에기르 신과 맥주잔을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마셔마셔 아에기르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할꼬야~) 실제로 바이킹을 본 적은 없지만, 영화 속에서 학습한 이미지에 따르면 바이킹들은 호쾌하게 식도를 열어 직수 정수기처럼 이런 맥주를 퍼마셨을 것 같다. 브루어리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동화 속으로 차원 이동한 기분으로 신나게 마셨다. 즉 꽤... 취했다.
아쉬운 마음에 브루어리에서 지인에게 줄 병맥주도 사고 한국에 가서도 아껴 먹을 요량으로 우리가 마실 맥주도 여러 캔을 구입했다. 노르웨이, 그것도 플롬이라는 작은 마을의 브루어리 맥주를 또 마실 수 있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캔맥주 들이와 병맥주 들을 이고 지고 다녔는데 안타깝게도 오슬로 면세점에도 입점해 계시다는 것을 귀국할 때야 알게 되긴 했지만. 어쩐지, 너무 맛이 좋다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