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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Sep 27. 2021

14. 베르겐: 커피가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노르웨이 커피, 여기 내 지갑이 있소

 평화로운 자연과 더불어 사는 북구인들, 바이킹의 후예들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조용하기만 한 사람들인 줄 알았다. 베르겐에 가기 전 까지는.      


 송달에서 출발한 페리가 구드방엔(Gudvangen)에 도착했다. 구드방엔? 굳방겐? 구들방엔? 북구의 지명들은 거칠게 가래침까지 긁어 모아 단어를 내뱉으려는 같은 순간에 발화가 끝나버리는 느낌이다. 영 익숙지 않은 알파벳들이 조합된 지명의 이정표를 향해 가노라면 예전에 읽었던 소설인 밀레니엄 시리즈가 떠오른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거미줄에 걸린 소녀’,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시리즈를 두꺼운 분량임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무려 6권이나! 문제는 스웨덴 작가의 작품이 아니랄까 봐 북구 스타일의 지명과 작중 인물들의 이름이 계속 등장하면서 내 머릿속 인물들은 헷갈리고 동선이 꼬였다. 여자 주인공 리스베트와 남자 주인공 미카엘 브...머시기(찾아보니 브롬크비스트) 이름까지는 반복적으로 나오니까 입력이 됐는데, 뵌네르스스트룀 사건이나 헨리크 방에르 일가의 이름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긴장감이 극에 달하던 서스펜서 스릴러는 온데간데 없고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책 줄거리를 따라가기 바빴던 기억-살인 용의자인 줄 알았는데 이미 살해당했다거나-이 있다.      


 구드방엔에서 2시간쯤 차를 달려 베르겐에 도착해서 간 숙소는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모던한 노르웨이식 아파트였다. 방도 넓고 가구도 깔끔했다.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는 북구의 의지가 투영되었는지 창문은 길고 곧게 뻗어 빈틈없이 집의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1년 365일 중 300일이 비가 온다는 이곳에서 여독을 푸느라 곧 잠이 들었는데, 그날은 금요일 밤. 이른 저녁부터 흥에 겨운 젊은 바이킹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더니 밤새 끊이질 않았다. 대학가 근처 숙소라더니 여기에서도 젊음을 아낌없이 분출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바이킹 맥주 축제라도 있는 것일까? 나를 껴 주지는 않겠지만 몹시도 궁금했고, 해석할 수 없는 함성의 메들리 속에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잠귀가 밝은 신랑은 밤새 뒤척이며 괴로워하다 뭉크처럼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시차 부적응자들은 새벽에 일어나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베르겐은 노르웨이에서 오슬로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다운(도대체 이런 기준은 누가 정하죠?) 도시라고 했다. 아직 관광객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틈을 타 새벽 속 도시의 민낯을 몰래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노르웨이에 도착하고 대자연만 보다가 오랜만에 도심을 만나니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건물들을 보며 북유럽 감성을 기억 속에 아로새기고 싶었다. 어스름한 시간에 나가 베르겐 호숫가를 걷고, 한자 동맹 시대의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건축물도 보고, 수산시장엔 무슨 횟감이 들어왔는지 기웃거렸다. 주입식 암기 공부의 한계인지, 한자동맹을 얼핏 들어보긴 했지만 정확히 몰라 중국에서 온 그 한자(漢字)인 줄 알았다. 중국이 북유럽과 맺은 교류라고 혼자 상상해버렸지 뭐야. HANSA라는 맥주 이름을 보고 깨달았다. 중국이 여기까지 오기엔 정말 너무나 멀다. 커피나 마시자.      


 앱을 켜고 근처에서 별점이 높은 카페 미조넨(Misjonen)에 갔다. 신랑은 갓 내려준 산미 가득한 드립 커피를, 나는 진하고 고소한 라떼를 마시며 창밖에 사람들을 구경했다. 커피가 너무 신선하고 밸런스가 좋아서, 한잔 더 주문하고 원두까지 결제하고 5만 원을 순식간에 썼다. 노르웨이 커피가 맛있다더니 역시 그랬다. 베르겐 대학교도 둘러보고 간만에 햇살이 좋아 남의 교정 벤치에 누워 캠퍼스 커플처럼 낮잠도 자고, 스칸디나비안 요리라는 미트볼도 먹어보고 가구점도 들어가 보고 베르겐에서의 하루가 끝이 났다. 참, 스칸디나비안 요리라고 해서 사실 무척 기대했는데 미트볼에 삶은 감자요리.... 맛은 있었지만 눈으로 보이는 그대로의 꽤나 정직한 맛이었다. 삶은 감자는 감자 맛, 미트볼은 다진 고기에 그레이비 소스를 얹은 맛. 맥주 한잔에 요리 두 개 10만 원을 내고 비싼 교훈을 얻었다. 역시 한국인에게 음식은 한식이 최고라는 국뽕이 새삼 솟구쳤다. 눈으로 보여도 쉽사리 맛을 예측할 수 없는 오묘한 고수들의 비법이 숨겨진 한식의 세계! 재료의 궁합과 조화에 따라 맵고 짜고 달고 시큼할 수 있으면서도 영양과 건강을 생각한 한식의 놀라움. 2천 원짜리 떡볶이에 1천 원 어치 튀김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데. 하지만 노르웨이 커피와 맥주는 아주 맛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뭐, 가게 인테리어도 소박한 듯 정갈하니 쫌 많이 예쁘고 트렌디한 것 같네요. 한 다섯 번 정도만 더 놀러 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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