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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Jan 05. 2022

16. 노르웨이 여행기의 마지막 장을 닫으며

노르웨이에 대한 향수가 오랫동안 이어지는 이유


B.C. 비포 코로나마지막 여행


 노르웨이 자동차 여행을 다녀온 건 지난 2019년 8월이었다. 바야흐로 B.C., 비포 코로나 시대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먼 여정만큼 물리적 거리를 온몸으로 맞은 듯한 피로감이 있었다. 피로한 정도만 치면 말을 타고 돛단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겨울왕국에 대모험을 떠나고 돌아온 것 같았다. 노르웨이까지 다녀왔으니, 당분간 해외여행을 안 다녀도 괜찮겠다고 말했는데 여행기를 마무리하는 2021년까지도 정말로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노르웨이는 버킷 리스트에 들어있거나 오랫동안 계획했던 여행지도 아니었고, 한국에서 가장 먼 나라 중 하나였고, 물가도 너무 비싸서 사실 여행 중에는 두 번은 올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지냈는데 예상외로 노르웨이에 대한 기억은 잔향이 오래갔다. 라디오에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이 나오면 조용한 시냇가를 따라 차를 운전하고 지나가던 날들의 기억이 소환됐다. 물안개가 낀 것 같은 짙은 습한 날씨를 마주하면 우리는 ‘노르웨이 날씨 같다’고 말했다. 미세먼지 한 톨 없는 날 등산을 하거나, 강원도나 제주도에서 빼곡한 삼림을 보면 ‘작은 노르웨이 같다’고 생각했다. 노르웨이의 자연환경은 나도 모르게 대자연의 기준점이 되어 있었다. 기준점은 비교대상이 생길때마다 뇌리에서 불현듯 튀어나와 2019년의 여름 날로 나를 데려갔다.       


 노르웨이에서는 매일 나무와 산과 빙하에서 녹은 시냇물을 봤다. 오슬로와 베르겐 같은 도시에서야 사람들을 구경하긴 했지만, 대부분 한적한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태어나서 가장 많은 나무를 본 일주일이었다. 들숨 날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청정 공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폐에 담아 세포에 저장해서 미세먼지의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물이라고 노르웨이인들이 자부하던 물도 기억난다. 언제 어디서든 수돗물조차도 정말 시원하고 달콤했다.      


불편함 속의 편안함

 자연은 원시림의 날것에 가까웠지만 생각해보면 노르웨이에서는 많은 게 불편했다. 렌터카도 수량이 많지 않아 다른 나라에 비해 비싼 값을 치러야 했고, 숙소도 마찬가지였다. 소문대로 물가가 비싸서 외식도 거의 하지 않았다. 으레 해외여행을 가면 룸서비스도 시키고 흥청망청 쓰는 맛이 있었는데, 인건비가 비싼 북유럽에서는 가당치도 않았다. 호텔에 조식을 먹을 때 계란 프라이도 내가, 주유소 주유도, 캐빈이나 에어비앤비에서 침대 시트 씌우기도 모든 걸 직접 해야 했다. 호텔에는 무료로 제공되는 생수병은커녕 냉장고도 없고 전기 주전자도 없었다. 보통은 한번 오기도 어려운 여행지라는 생각에 괜스레 관대해져서 음식도 이것저것 시켜서 남겨보고, 카페에서도 한입 맛보고 입에 안 맞으면 다른 음료를 시키곤 했는데 노르웨이에서는 콜라 한 병을 슈퍼에서 살 때도 이걸 내가 지금 꼭 마시고 싶은 걸까, 이게 최선인가 신중을 가하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수많은 불편함 속에서 더 많은 편안함을 느끼게 됐다. 돈으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도시의 편리함은 편안하진 않다. 편하다고 말하면서 응당 치러야 할 비용을 누군가가 치르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병 생수는 저렴해서 목이 마를 때 언제나 사 먹고 버리면 그만이지만, 플라스틱을 소각하거나 썩지 않는 쓰레기를 백 년 넘게 땅에 묻어둬야 하는 ‘외부비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다행히 노르웨이에서 생수 한 번 사 먹을 일 없었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도 어깨가 으쓱하도록 뿌듯하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노르웨이에서 본 대자연의 기억들은 점차 희석될 것이다. 빙하 폭포수가 흐르던 산의 모습, 감탄하던 피오르드의 평온함, 깊고 짙은 이끼와 고대의 생명이 우거진 국립공원과 산의 장대함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흐릿해지고 다른 곳들과 기억이 뒤섞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필요한 만큼만 구매하고, 고장 나면 고쳐서 쓰고, 내가 필요한 것은 직접 움직여서 해결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는 지금도 경종을 울리는 힘이 있다.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자연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려는 철학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해 그동안 여행을 했던 많은 나라에서는 과정은 누군가에게 맡기고 결과만 얻는 게 효율적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당연하다는 것의 기준점이란 이토록 가볍게 옮겨질 수 있음에 놀란다. 비행기를 타면 위도와 경도를 가뿐히 가로질러 날짜변경선을 고무줄 넘듯이 지나쳐 버리는 것처럼.      


방구석랜선이 대체할 수 없는 여행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세가 그칠 줄 모르는 가운데 ‘방구석 여행’이니 ‘랜선 여행’ 같은 것들도 등장했다.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VR 첨단 기술이 접목됐다고 해도 전혀 흥미가 돋지 않았다. 애초에 여행이라는 경험을 시청각 장치로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 불쾌했던 것 같다. 아무리 BBC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가장 노련한 카메라맨들이 최고급 HD 카메라와 드론으로 가장 완벽한 날씨의 이국적인 장관을 찍어 안방으로 전달해 준들, 타인의 각도로 본 어떤 아름다움도 시선을 따라가는 관람일 뿐 나의 여행은 아니다. 


 여행은 사진에 축소된 축적을 내 몸으로 재어 보는 일 일지도 모르겠다. 피오르드를 마주하고 내 키 보다 얼마나 큰 비율로 협곡이 솟아있는가 축적을 가늠해보기, 만년설이 녹아내린 폭포수의 물이 손을 아리게 하던 차가움, 커피 한 잔이 8-9천 원이라 손을 떨며 메뉴를 고르던 망설임, 북구의 음식이라 기대했던 미트볼이 내가 아는 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실망감, 이 모든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우리는 여행을 간다. 가장 화창한 날, 완벽한 각도에서 촬영된 피오르드보다 내가 찬바람에 흐린 날씨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직접 볼 수 있는 피오르드만이 기억 속에 흔적을 남기고 나와 함께 살아간다. 영상으로, 사진으로, 인터넷으로 보는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쉽게 증발해버린다. 내 것이 아니므로 내 안에 남지 않고 어떤 향기도, 특별함이나 불편함이나 어려움도 없이 그냥 사라진다. 


 노르웨이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특별했던 경험을 머릿속에서 꺼내 해부하고 짓이겨 퍼즐을 맞춰 조각으로 정리해 나의 유리병에 포르말린 액을 넣어 보존기간을 늘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어쩌면 다시 방문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도 한몫했다. 코로나 발발 전, 마지막 여행지라는 그리움과 향수까지 한 겹 더해져 고혹적인 향을 뿜어내고 있다. 지금은 채집한 표본들을 들여다보는 낙으로 사는 수집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수집품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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