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미숙 Sep 22. 2022

마음도 미니멀

워킹맘, 퇴사의 세계

혹시 시간 되면 커피 같이 마실까요? ”

지금요?

" 네, 지금 나와요~"

" 아.. 알겠어요. 곧 나갈게요.”

카톡을 보내자마자 후회한다. 강아지 산책을 하고 잠시 쉬려던 참이었다. 원래 계획은 혼자 조용히 신문 읽고 책 읽는 거였다. 


“ 언니! 혹시 시간 되면 잠시 가게 좀 봐줄 수 있어요?”

“ 아, 네 좋아요. 오전에는 특별한 일 없으니까요. 두 시간 정도는 괜찮겠네요.”

잠시 고민하다 보낸 카톡에 또다시 후회한다. 원래대로라면 오전에는 침대에서 뒹구는 거였다. 아니다. 그래도 급해서 연락한 건데 이럴 때 돕는 거지 싶어 집을 나선다.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나는 INTJ이다.

Introvert 내향적

iNtuition 직관적

Thinking 사고형

Judging 판단형


한 번의 테스트로는 인정할 수 없어 몇 번을 해보았는데 희한하게도 똑같은 결과였다. SNS에 떠도는 MBTI짤을 보니 나 같은 사람이 약속을 정할 때에는 플랜 B까지 만들어야 안심하고 갑자기 생기는 약속을 너무 싫어해 최소 1주일에서 한 달 전에 정해야 한다고 한다. 뭔가 해야 할 때도 일의 순서를 정하고 언제 어디서 몇 시에 만날지 미리 예약하고 하루를 촘촘히 계획하는 사람이라고. 실제로 나는 분 단위로 약속하고 분 단위로 움직이는 사람. 약속 장소를 향하면서도 수십 번 시계를 쳐다본다. MBTI 짤은 참으로 나와 비슷했다.


언젠가 차인표 배우가 <집사부 일체>에 출연해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어 생활한다고 하니 제자들이 '우와'하고 놀라기에 저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가 싶었다. 다 저리 살지 않나라고 생각하며. 은행 다닐 때에는 개인적인 모임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도 많아 수많은 일정을 미리미리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이들도 돌봐야 하니 저녁 모임은 일주일에 2번 이하만 잡자라고 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쩔  모임이 두 세 달 후로 밀리기도 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그랬다. 10월 되면 지점장님께서도 말씀하셨다. " 직원들 다른 일정 생기기 전에 송년회 날짜부터 정해두지 "

      



그런 나에게 '지금' 만나자, '이따' 만나자, '오늘 저녁'은 어때요?라는 멘트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결정적으로 INTJ이면서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은행원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거절을 많이 해서도 안되고 거절을 하더라도 CS 매뉴얼에 맞게 동의나 수긍을 먼저  후 에둘러 말하도록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거절을 잘하지 못해 몸과 마음이 힘든 일을 여러 번 겪었음에도 여전히 단호히 아니요, 싫어요 라는 말을 못 하고  힘들어하는 내가 있었다.

         

직원들을 리드해 나갈 때는 주도적으로 이야기하는 사회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솔직히 내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들어주는 게 편했다. 내가 편해서 들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와 대화하는  편하게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맞추기보다 남에게 맞추면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의도치 않게 이끌려 다녀야 할 때도 다. 언젠가 참 다른 성격을 가진 두 명의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네가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 명이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 네가 없었으면 우리 두 명은 상극이라 아마 친해지기 어려웠을걸?”

나는  역할이 약방의 감초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쓴 독이었으면서.             

 

오은영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거절을 못하는 건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남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내가 뭔가 유능하지 않은 사람인가, 좋은 사람이 아닌가 상대가 생각하는 게 싫어서라고 말이다. 언제나 나이스 한 사람이고 싶은 욕구가 있는 거라고. 나를 거절할까 봐, 내가 거절당할까 봐 그런 건데 자존감과 연관이 있다고. 교수님은 인간이 느끼는 당연한 이 부정적 감정을 패스하고 넘어가는 것은 안된다고 하셨다. 아프고 걱정도 하고 속상해하기도 하는 부정적 감정 모두 정상적이며 이런 감정을 억압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고 하셨다. 불편한 감정은 누르고 있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자기 자신과 잘 지내야 남과도 잘 지낼 수 있다고.     


문득 집에 가득 찬 물건을 가볍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 마음가볍게 만들 필요가 있구나 싶다. 싫으면 싫다 거절하고 할 수 없으면 할 수 없다 말하고 내 마음에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거절하지 못해 스스로 힘들어하는 감정을 떨구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회생활을 할 때는 그러지 못하지만 지금은 싫으면 싫다고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냉장고 속 묵혀 음식을 버리듯 내 마음속 무거운 감정도 하나씩 버리기로 했다.



육아휴직 때 매일 챙겨봤던 <EBS 부모>에서 육아 전문가들이 내성적인 아이는 내성적인 아이로 키우면 된다고 했다. 그런 아이를 앞으로 내세우거나 발표하라고 내밀스트레스만 받고 부작용만 늘 뿐이라고.

아이 성격이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자의든 타의든 무조건 반장 선거에 나가는 게 당연했던 시절에  나는 전문가의 이야기에 귀가 쫑긋했다. 나 역시 성향과 상관없이 남들 앞에 나가 이야기도 잘하고 토론도 잘해야 리더십이 생기는 거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런 기회가 많아질수록 리더십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요즘은 기업체에서도 자기만 돋보이려는 사람보다 경청을 잘하고 소통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호하기도 하니 세상은 점점 바뀌어간.


그래도 역시 매사에 밝고 긍정적이며 스스로를 홍보하는 능력은 은행원으로 가져야 할 당연한 덕목 중 하나였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묵묵히 일했다고 알아주는 이 없으며 어려운 일에 도전해 성과를 냈으면 성과를 냈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러기에 조직 구성원으로서는 외향적 사람이 되려고 노력다. 요즘처럼 MBTI가 유행하기 전인 십여 년 기업 연수에서도  MBTI 강의가 있었고 직원들 대상으로 검사도 했는데 당시의 나는 분명 외향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뼛속까지 Introverted 하다.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은 내성적인 사람. 이기적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사람. 여러 종류의 회식, 여러 종류의 소모임,  지인들과의 저녁 식사 등등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모든 일정을 소화했는지 모르겠다. 약속 장소에 가서도 후회하며 '여긴 어디 난 누구'읊조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웃으며 대답하고 있지만 머릿속으론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언제 오냐는 아이들들의 폭풍 전화를 미리 걱정하기도 하고 택시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지하철 막차는 몇 시일까. 마지막 버스는 몇 시일까  버스를 놓치면 집에 어떻게 갈까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기 일쑤였다.


“OO엄마, 혹시 오늘 시간 되면 점심 같이 하실래요?”

(코로나가 너무 기승이라 당분간 사람 만나는 약속을 안 하고 싶은데.. 이게 이유가 될까? 아 어쩌지.)

"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봐요."

" 그럼요, 언제든지요~"    


“언니 혹시 시간 되면 OO 좀 갈래요?”

(아, 오늘은 글을 좀 쓰려고 했는데 다녀오면 마무리가 힘들 것 같아..)

“미안해요. 힘들 것 같아요. ”

“아~네 알았어요. 다음 기회에 또 가보기로 해요.”


상대는 생각보다 내 거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그동안은 상대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거절을 했고 이해할 때까지 정성껏 설명도 하고 사과로 마무리지었다. 사실은 이런 과정이 필요 없었는데 말이다, 되면 된다, 안되면 안 된다고 하면 것을. 괜한 걱정이었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 만나기 싫으면 만나기 싫다. 상황이 안되면 안 된다고 간결하게 거절하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대신 결정과 회신은 빨리 하면 된다. 여전히 거절이 힘든 나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다.


(사진출처.펭수)


이전 07화 미니멀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볍게 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