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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숙 Sep 15. 2022

미니멀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볍게 살고 싶다.

워킹맘, 퇴사의 세계

소방관은 출동할 때마다 정리를 했다. 직업의 특성상 위험한 임무를 수행할 때가 많고 언제 무슨 일이 닥쳐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출동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방 정리를 했다. 행여 미혼인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님이 너저분한 아들 방에서 한 번 더 가슴을 부여잡을걱정돼서 말이다. 아들이 방 정리도 못할 만큼 바쁘고 힘들게 지내다 갔구나 무너질말이다. 그러기에 출동 전 방 정리는 그에게 있어 빠지지 않는 일상이자 처연한 의식이었다.


언젠가 접한 한 소방관의 이야기를 늘 마음 한구석에 담아둔 채 집 정리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았는데 퇴사 후 드디어 미뤄온 집 정리를 하기로 했다. 이 방 저 방 서랍장을 열어보니 욕심부리며 부여잡고 있던 물건들이 한가득이다. 옷가지며, 그릇이며, 책이며, 아이들 장난감이며.. 이제는 그다지 입을 일도 없는 옷부터 정리하자 싶어 입던 옷을 나누어도 욕 듣지 않을 친한 동료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응! 좋지~모여서 입어보고 나누자. 다들 우리 집으로 와." 그렇게 보따리장수처럼 한 짐을 메고선 집을 나섰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 옷은 반틈 내버려 두고. 화장품 욕심도 많아 뜯지도 않은 새 화장품과 여기저기서 챙겨 받은 샘플이 가득했다. 더 많이 챙겨달라며 욕심내어 조르기까지 한 샘플은 결국 사용기한이 임박하거나 지나버려 쓰레기통으로 향했.

       

“어머, 귀걸이가 이쁘네.”

“오늘 입은 원피스 잘 어울리네요.”

듣기 좋은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요즘 살쪘나 봐요!"라는 눈치 없는 인사말이라도 듣게 되면 영 신경이 쓰였다. 모든 것이 노출된 은행에서 일을 하다 보니 외모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어 은행원이라는 단정한 이미지를 연출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은 점점 욕심으로 바뀌어 아주 비싼 옷은 아니더라도 많은 옷을 소장하기에 이르렀고 치렁치렁하지는 않더라도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바꿔 수 있을 만큼의 장신구도 갖게 되었다.




“나, 일요일만 되면 손톱부터 확인해.”

“왜?”

“PB(Private Banking) 지점 오기 전에는 네일 잘 안 했는데 여기 오니 네일 안 하는 직원이 없더라구. 옷도 엄청 화려하구. 고객님께 상품 설명할 때 손으로 설명서도 짚어드려야는데 손톱이 밋밋하면 허전하고 초라해 보여. 나만 안 하고 있으니 그것도 민망하더라. 어떤 팀장은 나한테 네일 관리도 안 하냐고 그러고.."

“어머, 정말? 네일도 자기 관리의 하나네.”

“일요일 오후에 어디 한 군데라도 벗겨진 손톱 보면 놀라서 네일숍 달려간다니까.”     


리테일 영업점에서도 단정한 외모는 필수지만 친한 언니가 근무하는 PB지점은 최소 10억 이상의 자산을 관리하는 만큼 아나운서나 기상캐스터 수준은 아니더라도 관리가 필수이고 외모도 큰 경쟁력이었다. 컴퓨터 자판을 칠 때 긴 손톱이 걸리는 걸 너무 싫어하는 나로서는 수시로 손톱을 깎기도 하고 네일 컬러 따위 관심사도 아니지만 나에게도 몇 가지 개인적인 의식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7cm 굽의 정장구두. 편한 신발을 신고 있다가도 9시 은행 셔터문이 올라가면 얼른 7 센티 굽으로 갈아 신었다. 7센티 높은 공기를 마셔야지만 비로소 은행 업무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영하 십 도의 어느 추운 겨울, 바지를 한번 입고선 그 따뜻함에 반해 종종 바지도 입었지만 웬만하면 스커트도 고수했다. 바지를 입으면 몸의 긴장이 풀어져 도 안 되는 것 같고 스커트를 입어야만 단정한 모습이 완성되는 것 같았다. 다른 장신구는 안 하더라도 귀걸이는 나를 지켜주는 부적과도 같아 절대 거를 수 없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숙취나 늦잠 같은 돌발상황으로 인해 귀걸이 부적을 까먹지만 않으면. 그런 날은 십중팔구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다.


“야, 너 오늘 영업 포기했냐? 큭큭”

언젠가 같은 지점 친한 동생이 뿔테 안경을 끼고 온 날, 김 과장이 했다. 나도 시력이 좋지 않지만 뿔테 안경 동생은 안경을 벗으면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시력이 좋지 않았고 안경 렌즈 두께도 어마어마했다. 안경 렌즈 너머 평소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 눈동자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김 과장 말처럼 안경을 끼는 순간 영업은 포기하고 꼭 해야 하는 일만 대충 끝내고 퇴근해야할지 모른다. 아무래도 안경을 끼면 눈동자의 반경도 작아져 어지럽기도 하눈이 시려 졸린 느낌도 드니까. 결정적으로 자신감이 떨어져 영업 급 하강! 한편 산적같이 생긴 김 과장은 도대체 어떤 의식을 치렀기에 동료직원에게 막말도 서슴지 않는 건방짐을 장착했을까.




일문과를 다닌 덕에 대학 시절 일본 친구와의 교류가 많았고 이후로도 비교적 많은 나라를 니며 여러 나라 사람들과 소통했다. 덕분에 일찌감치 다양한 문화를 접하 편견 없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외모에 있어서도 그랬던 것 같다. 남이 어떤 옷을 입든, 무슨 머리를 하든 신경 쓰지 않았고 스스로에게도 그런 편이었다. 조금 과감한 색깔의 이며 특이한 청바지, 흔치 않은 디자인의 모자에도 욕심을 부렸다. 언제부턴가 눈부신 햇살 아래서 더욱 돋보이는 염색도 포기할 수 없었다. 입행 순간에도.하지만 첫 지점에 나 말고 염색을 한 직원이 아무도 없을 줄이야! 근엄한 표정의 지점장님은 뒷짐을 진 채 다가오시더니 말씀하셨다.

“머리 색 당장 바꾸고 와."


헤어 컬러도 검게 바뀌고  죄다 무채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젊은 날의 비비드함은 은행 년수가 늘어남에 따라 옅어져 갔고 옷장은 입고 싶은 옷보다 신뢰감을 는 옷으로 채워졌다. 그래서인지 스타일이나 컬러보다는 여러 벌을 소장하는데 집착하게 됐나 보다. 하지만 미련이 남아 차마 주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던 옷마저 결국 친한 언니에게 줘 버렸고 옷장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옷이 아니라 정말 내가 좋아하는 옷만 남았다.


언제부턴가 늘어만가는 흰머리를 가리느라 주기적으로 하던 염색을 안 했다고 핀잔 줄 사람도 없어 미용실 가는 횟수도 현저하게 줄었다. 여차하면 우아한 그레이 컬러로 변신해도 될 일이고 말이다. 거추장스러운 나만의 의식들도 지키지 않아도 되니 몸은 긴장감보다 여유로움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화장할 일도 거의 없어 립스틱이니 아이섀도 같은 색조 화장품을 더군다나 일이 없어졌다. 퇴사와 동시에 누군가에게 평가받을 일이 없어졌고 남을 의식하며 치러오던 각종 의식이 불필요해졌다.


한 소방관의 이야기처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운명의 순간을 대비하는 절절한 마음가짐은 아니더라도 행여 내가 떠난 자리를 정리하는 누군가가 수많은 물건들로 힘들지 않았으면 다. 오래오래 살고 싶기 때문에 최소 수 십 년간은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어쨌거나 꼭 필요한 것만 빼고는 웬만하면 없애고 살아가는 미니멀 라이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볍게 살고 싶다. 수시로 재활용 수거장에서 쓸만하다며 남이 버린 물건을 가지고 들어오는 남편만 달래면 가능할  싶다. 누구는 수시로 하루 5개 버리기를 실천 중인데 또 누구는 주워오는 일이 다반사인 일상이 반복되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집에서 살고 있으니 만족한다.

   


(사진 출처. 무인양품 무지 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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