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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숙 Sep 06. 2022

그냥 김미소 인생이요!

워킹맘, 퇴사의 세계

아침형 인간과 올빼미형 인간으로 나뉜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난 정말이지 100% 올빼미형 인간이다. 아침에는 그 어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도 눈뜨기가 힘들지만 밤이 되면 신기하게도 초롱초롱해졌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남들은 밤새워 공부하기 힘들다는데 새벽녘 화장실 가느라 나온 엄마가 제발 자라고 할 때까지 깨어 있었다. 물론 공부만 한건 아니고 음악도 듣고 멍도 때리면서 말이다. 학교에선 졸린 두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한 채 도톰한 영어 사전을 베개 삼아 쿨쿨 자는 나의 이중생활을 모르는 우리 엄마는 막내딸이 그저 모범생인 줄로만 알았을 거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당시 막 시작한 케이블 방송 덕에 좋아하는 분야의 전문 채널을 마음껏 보며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종종 아침 수업도 빼먹.


요즘 유행인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는 분들을 보면서도 도대체 저 새벽에 어떻게 기상해서 독서를 하는나는 절대  수 없을 일이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 퇴사 후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가 출근 걱정 없이 푹 잘 수 있는 아침을 맞이하는 였다. 아이들 등교는 시켜야지만 또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행복했다.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없어 허전하다는 퇴사 선배님들의 이야기는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렇게 게으른  내가 도대체 어떻게 매일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지하철 환승역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는지 믿기지 않았다. 늦은 밤까지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다.    

 

올빼미형 인간이 그 재밌는 드라마를 마다할 리도 없다. 하나 매일매일이 전쟁터와 같은 워킹맘의 일상에 드라마 시청이라는 한 점의 여유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주행을 했던 드라마가 둘째 휴직 중 봤던 <기황후>였나? 여성미보다는 의협심에 불타고 강한 기질의 기황후 역 하지원,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일편단심 기황후만을 바라보던 순애보 타환 역할의 지창욱의 연기를 보며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창 손이 많이 가는 두 아들을 재우고 오늘도 육아 침표를 찍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본 마지막 드라마. 이후로는 누구나 본방 사수하는 인기 드라마에 대해 동료들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 리 만무했다. 바쁜 워킹맘에게 드라마는 사치였고 급기야 드라마 같은 허구의 인생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나 하는 합리화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 때 드라마에 푹 빠져 있을 때에는 팬카페 가입도 했더랬다. 2012년 방영했던 드라마 <최고의 사랑 >에서 유치하게 극뽁!(극복)을 외치는 독고진에게 폭 빠져 '연기부'라는 차승원 배우의 팬카페에도 가입했다.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기사와 회원들의 소소한 게시물을 확인하고 수시로 댓글을 달았다. 내 일상마저 카페 회원들과 공유하고 차승원 배우와 동접(동시 접속)이라도 하는 날에는 서로 축하인사를 주고받았다. 한 날은 어떻게 알았는지 은행 동료가 차승원 배우의 촬영 스케줄을 알려주어 퇴근 후 현장으로 곧장 향했다. 현장을 헤매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서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던 차승원 배우를 발견하곤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과장님, 뭐 하고 있어요? 얼른 가서 사인도 받고 악수도 하세요!”

함께 간 열 살이나 어린 은행 후배가 독촉했다.

“어머, 못하겠어. 심장이 너무 뛰어서, 어떡하지?”

“참 나, 이리 오세요. 차에 타기 전에 얼른 뛰어야 돼요.”

후배 손에 이끌려 달려가다 그제야 절박함에 외쳤다.

차승원 배우님! 저 연기부 회원이에요!”

밴에 올라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차승원 배우는 너무나 자상하고 친절하게 인사도 해주시고 악수도 해주셨다.  웬만한 여자보다도 보드라운 배우 손 감촉을 잊을 수가 없어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난 감동스러운 순간팬카페에 꼼꼼하게 올렸다.

"꺅, 너무 축하해요!!"

"아니, 진짜 악수도 하신 거예요? 너무 부러워요."


무슨 국가고시에 합격한 사람처럼 여기저기서 축하를 받았다. 하지만 일하랴 육아하랴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이 나날이 이어지며 늦은 시간까지 드라마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한편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을 잘생기고 멋진 남자 주인공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아 아예 곁눈질도 하지 말자 싶었다. 드라마를 보는 건 시간낭비다.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 환상 속 세상을 부정하며 치열한 내 현실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 속 이야기가 마치  이야기인양 정신 팔린 주위 사람들도 점점 이해되지 않았다. 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읽고 마음에 새겨야 할 책도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드라마 따위에 시간을 허비할 수 있어? 출근하자마자 나누는 드라마 본방 사수 이야기도 우스워졌. 그 시간에 책을 읽던지 잠을 자는 게 더 생산적이겠다..






 '시크릿가든' '김비서가 왜 그래' '내 딸 서영이'  '이태원 클라쓰' '사랑의 불시착' '마인' '미스터 선샤인'.. 그리고 내 인생 최고로 좋아했던 연예인이 출연하는 차승원 배우의 '최고의 사랑'까지 퇴사 후 미친 듯이 드라마를 몰아보기 시작했다. 1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독고진은 여전히  멋있었다. 이보영, 김서형이 출연한 드라마 <마인> 재벌가에 들어와 살아가며 ‘나의 것’, 즉 ‘마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세 여자는 마침내 각자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나간다. 퇴사를 고민하며 수년간 내 머릿속을 맴돌던 그것. 자신, 나의 것 말이다. 아무런 교훈이 없을 것 같은 로코의 대명사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서 조차 감명받았다. 가족의 빚을 갚느라 죽어라 일만 하던 김 미소 비서(박민영 배우)가 어느 날 상사에게 퇴사를 선언한다. 충격을 받은 상사 이영준 부회장(박서준 배우)은 김비서에게 퇴사하고 무얼 할 작정인지 무슨 계획은 있는 건지 물어본다.


“아직 모르겠어요.”

“아니 그런 기본적인 계획도 없이 왜 그만두는 거지?”

“저도 이제 제 인생 찾아가아죠. ”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누군가의 비서도, 누군가의 가장도 아닌 그냥 김미소 인생이요.”     


얼마나 감동적인 대사였는지 가슴이 뭉클했다. 역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조각 미남 재벌 2세 주인공역의 박서준도 멋있어 죽겠지만 자립심 강한 김 미소 비서에 폭 빠져버렸다. 현실을 잊고 그저 재미있게 웃으려 본 로맨틱 코미디 드라에서조차 위로받다니.. 드라마에 난리법석 떠는 거, 그거 웃기다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내가 더 난리다. 드라마를 통해서도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키울 수도 있구나. 가벼워 보이는 드라마에도 인생이 담겨 있네 싶다. 꼭 유명한 문학 작품에서만 고귀함찾아야 하는 건 아니구나.  모든 건 나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착각. 어려운 책에서만 깊이가  할 것이라는 내 지적 허영심.


드라마에 빠졌다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 캐릭터에 홀딱 반했다고 나쁜 일도 아닌데 왜 그동안 드라마에 빠져 현실 생활과 구분하지 못한 들을 그저 이해 안 된다고만 여겼던지. 현실을 리얼하게 대변하지는 못해도 그 속에도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는데 말이다, 드라마 역시 문학 작품 이상의 탄탄한 구조위에 우리네 인생이 담겨 있는데 말이다. 깊이 있는 문학 작품 안에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가 있듯 흥행을 목표로 만들어낸 드라마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라는 걸 간과했. 그러니 이제 퇴사도 했겠다, 늦잠 자고 지각해도 혼낼 상사도 없으니 조금 게으름 피우드라마도 좀 봐야겠다. 독고진처럼 또다시 마음을 홀리는 멋진 캐릭터가 다면 팬카페에 가입해도 괜찮겠지!


(사진출처. 김비서가 왜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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