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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숙 Sep 28. 2022

아줌마 말고 저자

워킹맘, 퇴사의 세계

“엄마, 엄마는 이제 그냥 아줌마예요?”

“으응? 그냥 아줌마이긴 하지만 글을 쓰기도 하지.

 혹시 누가 엄마 직업이 있냐고 물어보면 그냥 글 쓴다 정도로 얘기해. 보통은 저자라고 해.

“아~네, 알겠어요. ”


얘기를 해 놓고도 씁쓸한 기분이 든다. 책을 두 권 내긴 해도 '작가'로 불리는 건 부끄럽다. 글을 아주 잘 써서 등단을 한 것도 아니고 정보 전달형 책을 쓴 것뿐인데 무려 '작가'라고 불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직업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역시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저자로 합의를 보자 싶었다. 아이들을 제대로 봐줄 시간이 없던 워킹맘 시절에는 옆에 있어 주전업 엄마를 그리 찾더니 정작 전업이 되니 직업 없는 엄마가 내심 실망스러운 모양이다. 원하는 것을 다 사주지는 않더라도 가끔 갖고 싶은 물건을 엄마 돈으로 척척 사주기도 하고 아줌마라는 호칭 대신 사회적 지위에 맞게 불리는 엄마가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엄마의 돌봄을 받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분명 약간의 실망감이 묻어 나오는 질문이었다.


" 퇴사하고 나면 처음 몇 달은 적응하기 좀 힘들어. 눈 뜨고 일어나도 가야 할 곳이 없잖아."

몇 년 전 먼저 은퇴하신 지점장님은 커피를 사주시며 말씀하셨지만 그건 육아를 도맡지 않아도 되는 혹은 자녀가 이미 다 커서 손이 가지 않는 '남자' 은퇴자의 이야기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 '여자' '엄마' 은퇴자는 매일 돌밥(돌아서면 밥을 지어야 하는 주부를 뜻하는 신조어)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일 할 때보다 좀 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여유 있는 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퇴사 직후 맞이한 아이들 겨울 방학으로 달간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 또 책 써?"

퇴사한 나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보면서 딱히 대화를 이어갈 소재도 마땅치도 않기에 사람들은 책을 또 쓰냐는 질문을 참 많이도 했다. 정작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것과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들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집안 일로 너무 바빠요'라고 대답하기도 뭣해 ' 아, 네. 요즘은 그냥 쉬고 있어요. 조금 쉬었다 또 써야죠.' 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처음 몇 달간은 놀면서도 자신 있었다. '그래, 지금은 쉬고 싶어 쉬는 거야.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쓸 수 있지. 무엇이든 쓸 수 있어.'라고 말이다.


Delete 'Writing'이라는 명령어를 입력당한 것처럼 솔직히 머릿속에는 쓰기라는 단어가 삭제된 상태였다. 쉬고 싶었고 사람들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외부에 집중되어 있던 20년을 보상받고 싶어 나 자신, 내 가족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려고 퇴사했으니까. 내 몸과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무리해서 일을 벌이지 않는 것, 억지로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산책하고 싶을 때 산책하며 마음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겨둔 채로 1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시간 동안은 쓰는 시간도 없었다. 충분히 쉬고 뭔가 쓸 수 있는 에너지도 생기겠거니 싶기도 했고 말이다.      





아줌마로서의 일상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에 맞추어질수록 자신감은 점점 떨어졌다. 결국 무언가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리는 건가. 나도 경단녀가 돼버리는 건가. 이제 정말 전업맘인가? 집 앞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늘 보는 담배 피우는 (은퇴한) 저 아저씨들과 를게 뭐가 있을까.  분들 역시 치열하게 일한 시간을 당연히 보상받아야 지만 갑자기 주어진 시간이 감당이 되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고 모습도 있었. 화장  얼굴, 질끈 묶은 머리 사이로 보이는 군데군데 희끗한 흰머리, 맨발에 크록스, 건조기에 마구 돌려 구겨진 면 티셔츠와 헤지고 짧아진 청바지. 재활용을 하러 나와 어슬렁거리는 내 모습도 영락없는 시간 많은 은퇴자.      


' 작가님 글이 보고 싶습니다. 무려 OO일 동안 못 보았네요. ' ' 작가님의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쌓인 글은 책으로 탄생하기도 합니다..'

브런치는 가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퇴사라는 큰 관문을 거친 사람으로 '퇴사'는 꼭 한 번 정리하고 싶은 주제였다. 완전한 형식의 책이든 아니면 스스로를 위한 하나의 기록물이 퇴사 이야기는 마음 정리이고, 특히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생각의 단편들만 어수선하게 떠오를  나를 독려해 준 브런치에는 일 년이 넘도록 글 한 편 올리지 못하고야 말았다.


친한 지인이 육아 휴직 기간 동안 꾸준히 실천했던 육아 팁을 정리하여 <육아 휴직 정석>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저자로서 새로운 출발 선상에 있는 그녀를 보며, 그녀의 책을 읽으며 마치 내가 다시 책을 쓴 것 마냥 기뻤고 나 역시 곧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해 보리라 꿈꾸어도 보았다. 저자 활동을 하는 그녀의 인스타를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던 어느 날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쓴 송희구 작가님께 회사에서 저자 사인을 받는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고 보니  작가님은 그녀와 같은 회사에 근무 중이었다. 워낙 웹소설로도 인기몰이를 작품인지라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는 말할 필요도 없는 유명한 책이기도 했고 평소 존경하는 그녀가 사인을 받는 송희구 작가님은 어떤 이야기를 썼을까도 궁금해졌다.




"도서관에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책 있어?"

"응, 마침 1권 있네. 빼놓을 테니까 가지러 와. "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사서로 봉사 중인 동네 친구 덕에 재고 확보를 받고 냉큼 빌려와 단숨에 1권을 읽어 내려갔다. 서울에 살면서 자가 아파트를 소유한 김 부장이 나에게 무슨 영감을 줄까, 뭐 그리 큰 공감이 있을까 싶었는데 예상을 뒤엎었다. 문장 하나하나 느껴지는 이 유쾌함에 너무나 좋아하는 김희정 작가님의 <육아 휴직 정석> 다음으로 큰 자극이 되었다. 과연 나는 이렇게 재밌게 쓸 수 있을까 싶다.


”2권 있어? “

”아, 2권은 대여 중"

곧장 동네 영풍문고로 달려갔다. 살까? 여기서 읽어버릴까 고민의 순간도 잠시 2권을 집어 들자마자 내려둘 새 없이 순식간에 완독해 버렸다. 그만큼 몰입력이 있는 탄탄한 구성에 위트 넘치는 문장이 넘쳐났다. 이렇게 재밌게 읽으며 한 권도 사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어 마지막 3권은 구매 결정을 하고 소중히 집으로 모셔와 정독을 했다. 특히 3권은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에 의미 있는 지출이기도 했.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이렇게 재밌고 유쾌한 베스트셀러까지는 못되더라도  퇴사 이야기를 써보겠노라 이미 다짐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 한 번쯤은 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보면 어때?

퇴사 후  차 한잔을 나누던 오랜 친구가 말했다. 팔려야 하는 소재나 주제 집중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 보라고. 그래, 팔리든 안 팔리든 한 번쯤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써보는 거다. 모처럼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대개의 기업체에서는 MS워드를 사용하지만 출판의 세계만큼은 대부분 한글 프로그램을 쓴다.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는 건 쓰기를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동안의 이야기도 모아 봤다.  타닥타닥 노트북 자판 치는 소리는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하얀 종이는 이내 검정 글자로 가득 찼고 순식간에 A4 20페이지가 완성되었다. A4로 100 페이지면 대략 한 권의 책이 완성되니 5분의 1이 완성된 것이었다. 단순한 기록으로 남을지언정 한 번쯤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뿐. 그래야만 진정한 퇴사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확신. 설령 책이라는 완성된 형태로 제작되지 않더라도 매일 조금씩 쓰기 시작한 것으로 의미가 있었다. 

요즘도 책  써?"

" , 책까지는 아니지만 매일 조금씩 쓰고 있어요. "


조금 더 당당해졌다.


(사진 출처. 이봄 출판사/글 쓰는 여자의 공간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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