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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숙 Oct 11. 2022

그래도 책이지..

워킹맘, 퇴사의 세계

“학점 좋으시네요~”     

흰색 와이셔츠와 단정한 양복차림 대신 청바지에 캐주얼 남방을 무심하게 차려입은 댄디한 이 남자가 말했다. 여기는 종합광고회사 "휘닉스 커뮤니케이션즈" 리셉션 데스크. 리셉션이라고 해서 여타의 회사처럼 단정하게 차려입은 직원이 앉아 있는  아니었다. 이력서를 어디 내야 할지 몰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직원 붙잡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무실 어디선가 이 남자가 나와 비어 있던 리셉션 데스크에 툭 걸터앉아 서류를 접수했다. 나는야 부산에서 상경한 촌스런 지방 국립대 출신 여대생. 여기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이 너무나 멋져 보이고 부럽다. 나도 여기서 일하고 싶다.


"글라스 타워 아시죠? 거기 있어요. 찾기 쉬워요. 2호선 삼성역 내리면 금방이에요. "

다. 찾기 쉬운 곳이다. 서울서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보러 놀러 오기도 하고 스마트폰도 없던 시기에 유럽 배낭여행이며 해외 연수를 1년이나 했던 사람이 삼성역에 있는 글라스타워 하나 못 찾을 리 없다. 문제는 마음. 삼성역에 내려서 올려다본 글라스 타워는 참 높고 화려했다. 당시에는 그랬다. 잔뜩 초라해지고 스스로 촌스럽게 여겨졌지만 그래도 그 댄디한 직원이 해준 그 말 덕분에 기운을 냈다.

"학점 좋으시네요."

사실 칭찬받을 만큼 높은 학점도 아니었지만.


십여 년 후 삼성동 테헤란로 지점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휘닉스 커뮤니케이션즈에 근무 중인 사십 대 이사님이 해외송금을 하러 방문하셨다.

"유학 송금 보내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환율 우대 좀 많이 해 주세요."

"네, 그럼요, 특별히 신경 써 드릴게요. 왠지 우대 많이 해드리고 싶어요.

음, 사실 저,, 이사님 다니시는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서 지원했었어요. "

"아, 그래요? 이야, 반갑네요. "

"그런데, 저 서류도 통과 못했어요. 하하 "

"그러셨구나. 더 좋은데 취직하시려고 그랬나 봐요. 저 보세요. 광고회사는 생명이 짧아서 저도 곧 회사 관두고 이민 가려고 해요. "

"아,, 그러시구나."


학점은 좋다고 해놓고 쓰레기통에 직진했을 이력서를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쓰리지만 은행에 들어와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 이사님의 환율 우대 칼자루라도 쥐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최고의 카피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광고의 세계에서라면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현실은 은행 창구. 광고도 기획하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카피도 만들고 싶었지만 스펙은 보잘것없었다. 그래도 어느 날 문득 책을 쓸 수는 있을 것 같다 싶었다. 간결하고 읽기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거는 같았다. 광고회사에 취직해 발휘하지 못한 내 능력(?)책 쓰기에 발휘해보자 싶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주변에도 넘치지만 정보 전달자는 할 수 있을 것 같. 글로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이롭게 만들어 보조금은 거창한 꿈. 그래, 나만의 비밀 병기. 책..    




도대체 언제부터 책을 좋아했을까? 어린 시절 2층짜리 빨간 벽돌 주택에 살았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빨간 벽돌, 초록색 대문, 집으로 이어지는 좁고 긴 길, 낯선 사람에게 앙칼지게 짖어대던 사랑하는 강아지 핑크, 집안으로 들어서면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 계단이 이는 그곳에 부모님은 책장을 배치해 두셨다. 어느 누구 집에나 있을 법한 세계명작 전집에서부터 만화책까지 책장을 가득 메운 책. 하나씩 꺼내 보며 계단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읽곤 했다. 8살이나 많은 2층 언니 방에도 나를 홀리는 신기한 책과 사진첩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훔쳐보는 재미가 있던 언니 일기장.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가득하고 곳곳에 언니가 직접 그려 넣은 고양이 키티와 키티의 말풍선.. 부산 연지동 빨간 벽돌 주택 나에게 .. 글.. 사진의 매력을 알려 준 추억의 집.


친정 아빠이지 싶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책장을 배치할 생각을 한 사람은. 친정 아빠는 책을 좋아하기도 하셨고 글도 곧잘 쓰셨다. 심지어 촌스런 내 이름 석 자도 언젠가 읽은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라나. 친정 아빠는 음악도 좋아했다. 가난한 사람과 결혼해 신혼집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코딱지만 한 방에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그 좁은 방한 구석에 놓여있는 풍금 한 대에 기도 안차더라고 친정엄마가 말씀하곤 하셨다. 친정 아빠는 지금도 아이들 용돈을 주실 때마다 봉투에라도 격려 말씀과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빼먹지 않으신다. 무심한 막내딸이 바삐 흘려보내는 카카오톡에도 한 단어 한 단어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장문의 답장을 보낸다. 친정 아빠는 천상 문학소년.      


친정 아빠는 은행원으로 바쁜 직장 생활을 하느라 우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종종 집에서 가까운 서면으로 저녁 식사를 사주러 우리를 데리고 나가셨다. 그럴 때면 빠지지 않는 코스가 영광도서 나들이였다. 아빠는 책 사는 건 아까운 게 아니니 원하는 책을 마음껏 골라오라 했고, 신나게 골라온 책에는 언제든 지갑을 열어 사주시곤 했다. 우리는 늘 아이들 책이 가득한 뒷문으로 달려 들어가 이 책 저책을 고르곤 했다. 서점을 들어서면 흘러나오는 특유의 책 냄새. 반듯하게 정리된 책 모서리, 흘러내리듯 매달려 있는 형광등 불빛. 책을 고르는 우리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부모님..

    





지금 당장 읽지 않더라도 사서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어. 언젠가 그 책에 꼭 손이 갈 거야. 읽고 나면 하나라도 도움이 되는 게 있고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생기는 거니까. ”     

보고 있는 별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려주신 것만 해도 고등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은 우상과도 같았다. 아이들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설명하는 자전, 공전 수업시간에는 아이들 모두 배꼽을 잡고 웃느라 세상에 이렇게 재미난 수업도 없겠다 싶었다. 읽는 책의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살짝 죄책감에 빠져 있을 때 내 우상 지구과학 선생님은 자신의 소신을 그렇게 유쾌하게 고백했고 사는 내내 위안이 되었다. 


그때부터 읽고 싶은 책, 당장 읽을 시간이 없어 읽어보고 싶은 책은 사두었다. 책장에 꽂아두고 제목만 쳐다보아도 흐뭇했고 그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동하면 오랜 시간 내버려 둔 그 책에 결국 손이 가고 순식간에 읽어내기도 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책도 때가 있었다. 굳이 사두지 않아도 언젠가 또다시 연이 닿아 결국 읽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내 책장에 꽂아두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가슴 한 켠의 욕망이었나 보다. 억지로 읽으려고 했다면 한 두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을 터인데 기다리다 보면 결국 손을 내밀어 읽게 된다. 단 한 문장일지라도 마음에 들었다면 그걸로 된 거다.      


우상의 조언대로 그 뒤로도 많은 책을 샀다. 사기만 해도 의미 있어지는 책. 도서관에 가기도 했지만 읽고 싶은 책이 대출 중인 상황은 불편했다. 성격이 급해 읽고 싶은 책은 당장 읽어야 하는데 대출 기간 내내 기다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손 때 묻은 도서관 책을 읽는 묘미도 있지만 이제 막 따끈따끈하게 나온 새책을 보는 게 좋아서 도서관보다는 서점을 자주 다녔다. 물론 읽고 싶은 책을 다 살 수 없기에 서점에 서서 읽거나 혹은 쪼그리고 앉아 읽기도 하면서. 내가  서점 주인이라도 된다마음껏 읽을 수 있을까.

      

요즘 누가 종이 책을 보냐고도 하지만 그래도 나에겐 여전히 종이책만이 책이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페이지 한 귀퉁이를 접어 dog ear(책 한 귀퉁이를 접으면 마치 강아지의 접힌 귀를 연상하기에..)를 만들기도 하고 형광펜으로 좍좍 줄을 그을 수도 있는. 이런 기능은 이북에도 있지만 그래도 말이다. 책꽂이에 꽂아두고 마음이 갈 때 다시 꺼내어보며 접어둔 페이지에 뭐가 있었나 들쳐보며 아, 그때 이런 문장을 좋아했구나 곱씹어볼 수 있는 종이 책만이 책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젠 슬슬 눈까지 안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옆구리에 끼고 다니고 싶은 one of my best friends. 그래, 그래도 책이지.. 그래도 책.. 그래도 북.. 그래 the book.. 이런, 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고 다 살 수도 없고 책방이라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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