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했던 건
적당히 시시한 삶을 살고 있다. 지원한 알바는 떨어졌다. 면접에서 너무 절었다. 며칠 우울했다.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는 무기력한 것이다. 20살이 넘어 내내 무기력했으니 내가 슬픈건지 무감각한건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는데, 무감각한게 맞는 것 같다. 우울이란 그런가보다. 전의 병원에서 진료를 보던 의사가 개원을 했길래 찾아가봤다. 지금 의사도 사려깊고 좋지만, 1년 반간의 나름 유대 형성, 그리고 환자에 대한 적당한 관심을 주던 게 좋았다. 내가 무용단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거길 찾아봤다며 유명한 곳이네요? 라는 말도 했었으니.
약속(을 한 적은 없지만) 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올해 말 즈음에는 공연에 올라갈 줄 알았지만 정말 시시하게 나는 떨궈져 나와서 시시한 삶을 질척이며 살고 있다고 얘기했다. 병원은 참 멀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고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초진인데 돈은 적게 냈다. 내가 주절대다 얘기한 빈곤을 헤아려준 것 같다. 딱 아낀 만큼의 돈으로 담배를 사서 피웠다. 맛없었다. 별로 갖고 싶지도 않았던 걸 가져봐야 기쁘지 않은 건 당연하다.
집에 와 며칠 지내고 보니 처방전에 못 보던 질병코드가 하나 더 붙어있었다. 뭐지. 전에는 뭔 원인 상세 불명의 우울장애인가 뭐였는데. 검색해보니 불안이랬다. 그래 뭐 그렇지. 하고 넘겼다.
시시한 삶이 계속된다. 오후에 일어나서 집안일을 조금 한다. 오늘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뭘 좀 옮기다 발가락을 찧었다. 시시한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육두문자가 입에서 터져나왔다. 한 1분 베란다에 엎드려 있었다. 한 30초는 아팠고, 한 30초는 엄마가 보러 올 거 같아서 그냥 있었다. 시시하다. 시시해. 이런 삶.
엊그제 지인의 글을 하나 읽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어떤 감독으로, 그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글에는 생계에 대한 이야기와 직함으로 달아둔 일과의 간극, 그리고 오히려 생계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마음의 편안함에 대한 말 등이 적혀있었다.
그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곳에서 일했었다. 그 감독을 그쪽 바닥 사람들은 거의가 알 것이다. 글에서의 그는 생경했다. 나는 그가 유학도 가고, 멋진 곳에서 일했는데 왜 생계로 식당 일을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해야 하는지 몰랐다. 짐작은 했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도 했다. 그가 일하는 식당에 가본 일이 있다. 서울 언저리의 식당에는 대기인원이 줄을 설 정도로 바빴고, 그는 내가 아는 직함과는 거리가 2만 광년쯤 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음식과 음료를 날랐다.
하지만 글에서 그는 그게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감히 가늠하건대 그가 생계로 하는 식당일이 내가 아는 '감독'의 직함으로 오는 일의 수당보다 많을 것이었다. 또, 그는 식당일이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식당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했다. 감독으로서의 그의 업은 살아남기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했다. 그에게 맡겨진 일들은 커다란 타이틀과 함께 아주 자그마한 돈을 인질 삼아 헌신을 요구하는 일이라고 했다.
무용수가 되어가는, 혹은 되었을 나를 상상해본다. 그거 하나를 위해 서울에 갔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공연의 막이 내리면 얼마나 허탈한지 아주 약간은 안다. 예술의 전당 무대에 섰을 때, 그리고 공연이 모두 끝난 날은 코로나가 심했던 때라 뒷풀이 없이 조용히 묵던 사촌의 자취방에 갔다. 조용하고, 사촌은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담배를 피우며 게임을 하고,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나도 얻어먹고. 어딘가 눅진하지만 그런대로 돌아는 가는 남정네들의 자취방.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는 거였나. 몇 주, 몇 달이 지나서야 천천히 내가 어떤 무대에 섰는지 와닿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무용수의 이면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하고 내가 바란 무용수의 삶은 그리 찬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시하다면 시시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소속이 아니다. 매 작품마다 계약한다. 실질적으로는 1년 내내 무용단에서 연습하고 공연을 올려도 작품은 3~4개월 단위로 계약을 한다. 여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도사리고 있는데, 한국에서 제일 춤 잘 추는 인간들이 대출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가려 했던 무용단은 정말, 정말 운이 많이 따르고(그들의 실력과 연습량 역시 어마어마하며) 한 곳이다. 그런데도 투잡을 병행하는 분들이 꽤 된다. 그리고, '무용' 이라는 것 자체가 접근성 좋은 예술이 아닌지라 '그 바닥'에서 유명해도 보통 사람들은 거의 모른다. 이게 현실이었다.
국내 제일이라는 사람들,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학교에서 또 한 줌 남는 인원, 또 거기에서 한 둘 남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용단을 구성한다. 그런 사람들도 먹고살기는 팍팍하다고 한다. '내가 왜 춤을 추고 싶은가' 에 대한 질문을 들은 일이 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고백하건대 춤에 사명도 재미도 느끼진 않았다. 그럴싸한 일을 내 손으로 해보고 싶었고 그냥 쏟아지는 빛과 찬사가 좋았을 뿐이다. 그 다음은 얼렁뚱땅 뭐라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시시한 삶을 살고 있는 나로 돌아온다. 중소기업에 들어가 생산 라인에서 하루에 7kg가 되는 부품을 수백 개씩 옮기는 나를 상상해봤다. 친한 친구가 하는 일이다. 한 번 너희 회사에 갈 수 있냐 묻자 그는 나같은 약골은 몸 상하니 다른 일을 찾아보라 얘기했다. 뭔 오긴지 자존심인지 그건 또 싫었다. 서울 가기 전 그렇게 허풍을 쳐 놨는데 뭐라도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내 현실은 여기 의자 위에 있고 그걸 기록하는 키보드밖에 없다.
이 시시한 삶이 싫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살짝 바뀌었다. 이렇게 시시한 삶이라도, 아주 살짝은, 정말 조금은 뭔가 다시 하고 싶다. 다시 카레집에 가서 정신없이 서빙을 하고 기름 쩐내를 풍기며 집에 한 시간 걸려 돌아간대도 그런 삶을 조금 덜 미워할 것 같다. 지인이 5급 공무원이고, 합격 이후 연락이 끊기고, 또 누구는 집이 잘 살아 차가 두 대 있고, 뭐 이런 사실들은 언제나 거슬리겠지만.. 하고 싶은 게 뭔진 몰라도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충동이 든 건 꽤 오랜만이다.
적당히 시시한 대로 사는 삶도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