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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Oct 26.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택 -3-

버스를 한 번 타고 나가면 있는 거리에 심리 전문 상담 센터가 있음에 감사하며, 때로 날이 좋으면 이 언덕을 걸어도 가볼 만하겠다고 생각한다. 주 1회 상담이 원칙이지만 경제 상황과 언제 일이 터져 소환될지 모르는 나의 상황을 이해해 주신 선생님 덕에 우리는 열흘에서 2주에 한 번 정도 만나고 있었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내 차례가 된다. 아담하고 조용한 센터에서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을 보며 소리 없는 응원을 마음으로 보낸 지 벌써 몇 주 째, 이 공간에도 편안해져 감을 느낀다.


"00님, 저희 시작하기 전에 제가 지난주에 했던 말에 대해서 사과드리고 싶어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갑자기 리액션 버튼이 고장 난 로봇처럼 버퍼링이 걸린다.


"제가 00님이 워낙 잘 웃으시고, 가볍게 이야기를 하셔서 실제로 00님에게 이게 얼마나 무거운 문제일지 알면서도 덩달아 가볍게 듣고 가벼운 발언을 했어요.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상담사님의 사과에 벙 찐 이유는 뭐였을까. 우선 선생님의 사과의 순간에 내가 여전히 내가 당한 부당함에는 무감하였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상담사님과의 관계가 안정권에 이르자 나는 상담사님의 몇 발언들을 불편해하던 과거와는 다르게 상담사님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하며 이해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상담을 진행하며 스스로 검열을 덜 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느꼈는데 라포 형성이 된 상대방에게는 여전히 너그러웠고 나에게는 여전히 박했다.


사실 두 번째 이유가 조금 더 중요한데, 나는 어른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상황을 처음 겪었다. 물론 우린 성인 대 성인이었으며 상담사 대 내담자이기 때문에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또한,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른의 사과를 받아본 경험이 없다. 어른이 나에게 잘못된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모두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 해는 유독 일이 많았다.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들썩였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유명 연예인들의 죽음이 잦았다. 연구실은 대외적으로 격변기를 겪고 있었으며 절대적인 인원 부족의 늪에서 한 사람이 최소 세 사람의 몫의 일을 하고 있었다. 집안의 숱한 싸움 끝에 나는 직접 싸우는 당사자가 되기도, 중재자가 되기도, 방관자가 되기도 했다. 트러블 메이킹을 취미로 즐기던 할머니는 물론이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지옥으로 데려가던 나의 부모님을 포함해 모든 세상이 늘 설명과 이해를 앞세울 뿐. 사과는 없었다. 그 아래에서 나는 늘 괜찮아야 했다.


제 때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중히 사과할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사과의 여운은 한동안 지속되어 우리의 논의를 한 층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 재정 상황과 일정상의 이유로 상담을 종료하기까지 띄엄띄엄 이어진 6개월 간의 여정. 나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새로운 내가 되기에는 불충분한 시간이었지만 내가 앞으로 고민하며 나아갈 삶의 방향을 그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후로도 힘에 부칠 때 언제든 누구라도 찾아가면 된다는 믿음은 힘든 여정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20대 중반에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부러워요. 00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저는 정말 즐거웠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고 인연이 다시 닿는다면 그때는 00님이 생각하는 인간관계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어요. "


상담사의 시선이 아닌 함께 6개월 간 수다 떤 사람의 입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어준 덕분에 나는 상담 이후 홀로 숱한 번아웃을 견뎌내며 나만의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찾아야만 했다. 내 모든 선택이 능동적 선택이 아닌 부모의 개입이 있었다고 믿었다. 온 마음을 다 해 반항한 첫 결과가 대학원 전공 선택으로 이어졌을 때, 나는 나를 증명해야 했다. 비록 헤매고 더딜지라도 이것을 해내야만 했다. 그것도 매우 잘. 나의 무수한 다른 선택지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선택했으므로. 나는 늘 괜찮아야 했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므로.


집에 2일을 다녀오면 서울에서 홀로 3일을 쉬어야 했다. 할머니 댁을 직접 방문하지 않더라도 흔적은 늘 집에 있었다. 언제 싸움이 발생해 살얼음판 같아질지 모르는 집에 2-3주에 한 번씩 가는 행위 자체가 지옥이었고, 나는 늘 피곤을 가장한 채 도피성 잠을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봐서 좋다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다시 서울에 올라오는 길의 마음은 늘 부담으로 가득했다. 자취하며 공부하는 딸을 위해 잔뜩 챙겨준 반찬통을 한 아름 들고 오는 내내 출처를 알 수 없는 압박감에 토할 것만 같았다. 그저 멀미가 심해진 줄 알았는데, 집이 아닌 곳을 갈 때는 멀쩡했다. 결국 서울에 올라오면 한 것도 없이 녹초가 되어 기절을 하고야 만다.


상담 기간 동안 선생님은 내게 꾸준히 집에 가는 행위가 왜 내 선택이 아니라고 믿는지에 대해서 질문했다. 요즘 말로 하면 '누칼협?' 쯤 되려나? 누가 그거 하라고 칼 대고 협박함? 나는 이 말을 정말로 정말로 싫어하는데, 칼을 대고 협박해야만 협박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이 만드는 압박은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끊임없이 부모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원하는 정답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학습한 사람에게 자신의 선택이란 사실상 부모의 강요에 순종하는 것과 동의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요를 계속해서 따를 것인지, 어떻게든 용기 내 싸워서 나올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내가 하는 것이다. 사실 그때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개념이다. 당시의 나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학습된 무기력 상태 그 자체였다. 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한해 두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상황을 합리화했다. 실제로 부딪히면 상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꿈조차 꾸지 못했다.


또한, 내가 이런 나의 상태와 내가 할 수밖에 없던 선택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내 선택에 대한 질문을 전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늘 해결해야 할 과제였던 선생님의 질문은 그로부터 약 3년 후 뜻밖의 곳에서 해결이 된다.




첫 상담 이후 몇 년을 나를 쫓아다니던 선생님의 질문과 걱정들이 하나 둘 해소가 되었고, 회복 탄력성이 증가했다.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가지만 그 상황 속의 내가 나아졌다. 널브러져 울다가도 울음을 싹 그치고 일어나 앉아서 해야 할 일을 시작하고 놀라운 집중력으로 일을 끝낸다거나, 혹은 그냥 울면서 일을 지속하는 것. 평소 같았으면 3주를 드러누워 있어야 겨우 회복이 될 일을 3일로 퉁 칠 수 있게 된 것. 박사 졸업 이후에 하고 싶다고 미뤄둔 모든 취미 생활을 한 번에 진행하는 것.


이 모든 게 전부 하와이 전통 춤인 훌라, 그리고 그 선생님인 하야티를 만나고 나서 생긴 일이다. 나에게는 사람을 바꿀 힘은 없지만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진정한 선택의 의미임을 이제는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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