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00님이 느낀 감정이 어땠나요?
대학교를 통학하던 시절, 20-30분 간격의 광역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진동이 울리고 핸드폰 화면에 할머니 번호가 뜬다. 또 시작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에게만 털어놓는 수많은 말들, 부모님께는 말하지 말라고 하는 비밀들,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는 걸까. 버스를 한 두대 보내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지금은 할머니가 아빠가 말린 일을 하다 크게 다친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다. 절대 말하지 말라는 당부에 어찌할지 몰라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면 중요한 말을 전하지 않아서 아빠에게 욕을 먹는 것은 나. 전하면 할머니에게 욕을 먹는 것은 여전히 나. 또, 때로는 말하지 말란다고 진짜 말을 안 해서 욕먹는 것도 나.
고등학생쯤 되어 더욱 든든한 리스너가 되면 될수록, 대학생이 되어 자신의 자아가 조금 생긴 화자가 되면 될수록 분명 나에게 의견을 묻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정작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은 점점 없어졌다. 지금은 누굴 위한 선물이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선물을 하기 위해 찾아간 동대문의 상가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준 시장 상인에게 거래가 끝난 후 욕을 퍼붓는 문자를 나를 시켜서 보내기를 시켰을 때였나. 문자를 정말로 보냈다는 것을 인증하게 했을 때였나. 아니면 본인의 아들이 드디어 강경책을 쓰자 가스라이팅 주력 대상을 나로 바꾼 사건을 몇 번째 반복 했을 때쯤이었나. 내 머리에 처음으로 오백 원짜리 크기의 원형탈모가 생겼다. 원형탈모와 할머니의 상관성을 스스로 파악해 낸 것은 이보다 조금 더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그렇다면 학습이 먼저일까 기질이 먼저일까. 타고난 기질을 학습으로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 기질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일까. 인간의 행동이 유전자에 설계되어 나온다면 교육은 어떻게 해야 이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에 어우러지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살 수 있게 할 것인가?
심리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워낙에 두서없는 내 스타일 덕분에 대부분의 상담 시간은 뜬구름 잡는 내 이야기 속에서 선생님이 주제를 발굴하는 일들로 이루어졌다. 어떤 날은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당장에 하루 이틀 전에 발생한 사건 때문에 멘탈이 터진 채로 방문해 울기만 하다 나오기도 했다. 때때로 선생님은 내게 질문을 던졌는데,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포인트를 짚을 때가 많았다.
"아버지께서 원래 말씀을 그렇게 좀,, 어렵게 하시나요?"
아빠는 논리가 참 강한 사람이다. 타고난 언어 능력과 이성적인 사고방식, 논리력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그는 평생의 시간을 본인의 재능을 이용하고 강화하는데 쓰고 살았다. 그는 대학 시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본인의 엄마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어서 심리학 서적을 달달 읽었다고 한다. 모성애 신화가 지금보다 더욱더 판을 치던 시절, 안타깝게도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에 대한 구체적 구분조차 없던 시절. 병리적 나르시시스트가 부모가 되었을 때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한 도서가 대학교 도서관에 실려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영원히 "비정상 엄마"의 틀에 가두어 바라본다.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정상 아빠"와 "정상 엄마"의 역할을 정해두고 자신의 삶의 최우선 목표는 그 역할을 충실히 다 하면 되는 것으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신앙심에 가까운 수준으로 그렇게 키운 자식은 자신의 의도대로 자랄 것이라고 믿는다. 그만의 논리 아래에는 본인의 마음도 없었지만 나의 마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머리로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스스로의 감정도 뜯어서 봐야 겨우 이해가 되기에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감정을 스스로 컨트롤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과제가 된다. 그는 세상의 많은 일이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이해를 시도해 본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최선을 다해 내린 고심 끝에 아이들에게 맞는 가장 베스트의 방향을 설정하고 인생 설계를 해주었는데 자꾸만 벗어나려는 자신의 아이들이 가장 어렵다. 그는 때때로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 나이의 너희들 보다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라는 것이 가능해진 지금의 너희들이 더욱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와 대화를 나누는 그의 딸은 종종 벽과 대화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의 논리를 이길만한 논리가 없으면 그녀의 의견은 인정할만한 의견이 되지 않는다. 몇 번의 대거리 끝에 그냥 입을 다물고 동조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것을 선택하고 만다.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나요?"
심리상담의 회차가 진행될수록 상담사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던 찰나, 우려하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지금은 이 말이 나를 부정하는 말이 아님을 알고 심리 상담사가 반드시 내담자의 모든 의견에 동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당시의 내 정서 상태에서는 믿고 의지하던 선생님이 나를 지지하지 않는 것 같아 서운했다. 그뿐인가. 급기야는 선생님이 자꾸만 내 편이 아니라 부모님의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선생님이랑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선생님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러나 폭풍우 같던 그 시절, 한 주에 두세 가지 사건이 터져버리면 상담날만 손을 꼽아 기다리고 만다. 나는 여전히 그녀가 필요하다. 달려가서 쏟아 낸 나의 숱한 말들 뒤로 가만히 선생님이 물어본다. "그때 00님의 감정이 어땠나요?"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린다. 지금까지 너무 힘들었다고 얘길 한 게 아닌가? 내 감정을 다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버벅 거리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선생님이 한 번 더 도움을 준다. "그 순간에 00님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너무 궁금해요. 지금까지 상황과 사건을 설명했지 00님의 감정에 대해서 저에게 말해 준 순간이 없네요." 나는 그제야 나조차도 내 감정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간 심리상담에서 조차 상대방을 이해하고 내 감정은 검열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