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후의 세상만사는 내가 생각하는 '때'보다 빠르게 오는 경향이 있다.
10대에는 스무 살 혹은 법이 정한 '성인'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스무 살은 빨리 오지 않았다. 고대하며 기다리는 시간은 느리게 오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20대의 시간도 빠르게 흐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빨리 졸업하고 취업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돈은 나에게 자유를 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거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런데 졸업까지는 꼬박 4년의 시간이 묶이게 되니 답답했다. 쉽지 않은 취업과 만족스럽지 않은 직장 생활, 돈을 번다고는 하는데 전 달에 쓴 카드 값을 메꾸고 나면 또 카드에 의지하는 빡빡한 20대를 보내고 나서 서른 살쯤에 결혼하고 어찌어찌 살다 보니 벌써 50이 훌쩍 넘어버렸다.
어른들이 시간이 '물같이 흐른다'라고 하셨는데, 그 흐르는 속도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빨라진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우리 부부가 결혼하지 22년이 되었다 하면 다들 의아하게 본다.
"혹시 몇 살에 결혼하신 거예요?"
그런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나이를 알고 나면 사람들의 반응은 "네???" 하며 믿지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엄마의 50대 모습과는 다르다. 그때 엄마는 '중년 아줌마'였다.
헤어스타일도 뽀글이 아줌마였고, 허리살도 물컹물컹하면서 늘어진 모습에 조이는 옷을 입으면 울퉁울퉁 몸매가 드러나서 헐렁한 옷을 입는 '중년 아줌마'
요즘은 50대를 '중년'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모습도 중년의 모습은 아니다.
60이면 인생 2막을 준비한다.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 50대는 '태아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20대를 고대했던 것처럼 60대를 기다린다.
60이 되고 나면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는 '현명한 눈'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비록 '신체의 눈'은 더 침침해지고 돋보기안경은 더 두꺼워져서 남 보기에 답답할지라도 60이 되면 그 나이만큼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은 더 밝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남편은 나와는 다른 것 같다.
올해로 60인 남편은
"너도 60 돼봐, 이제 인생 다 살았다 싶을 거야."
퇴직을 앞둔 남편은 60의 나이를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로 여겨서 그런 듯하다. 평생 취미도 없이 일만 하며 살았던 사람이라 '이제 나의 가치는 다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가 보다. 작년 12월에 퇴직하기로 했다가 8월로 미뤘던 날짜가 다가오자 남편은 초조하고 힘들어한다.
우울한 기분을 전환시켜 주려고 나는 더 신나게 얘기한다.
"너무 좋을 것 같지 않아? 우리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거 다 하자. 동유럽에서 살아 보기, 남미 여행, 스페인어 배우기, 미국 일주,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또 뭐 있었지?,, 순서 정하지 말고 그때 그때하고 싶은 거 먼저 하는 걸로 하자."
"......................."
남편은 말이 없다
"우리 정도면 걱정 없이 은퇴해도 괜찮은 사람들 축에 속해. 학비지원 해야 하는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살펴야 하는 부모님이 계신 것도 아니고, 예산 세워서 알뜰하게 살면 남은 여생 편안하게 살 수 있어."
"... 그런데.. 너희 할머니, 105세까지 사셨잖아... 너희 큰아버지 100세 다 되셨는데 서울에서 운전도 하시고, 일도 하시고... 나는 너를 보면 120세까지는 너끈하게 살 것 같아. 너 먹고 살 거는 마련해 줘야지."
퇴직의 불안함을 장수하시는 우리 집안 어른들 핑계를 대며 말한다.
죽음의 칵테일 = 이사+이직+이혼, 이 세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퇴직과 동시에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주재원들이 대부분이니 이런 상황에 '이혼'까지 하게 되면 '급사'할 수 있는 칵테일을 마시는 것과 같다며 이미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남편의 동료들은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눈이 충혈되어 있다.
"눈이 많이 충혈됐네, 며칠 또 못 잤구나?"
"응, 자다가 계속 깨네."
"밤에 자다 깨도 이메일 체크하지 마. 그럼 다시 못 자."
"그건 아는데 어쩌겠어 체크할 이메일이 산더미인데."
"대충 해. 이제 곧 퇴직인데."
"그건 아니지. 끝까지 잘해야지."
"......"
한참 조용하다 남편이 말한다.
"About Schmidt라는 영화 생각나지?"
"응"
"거기에서 그 장면이 생각 나. Schmidt가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남겨 뒀던 파일하고 팁으로 적어둔 메모지를 퇴직 후 회사에 들렀을 때 회사 쓰레기통에서 발견하는 장면"
잠자리에 누운 남편을 토닥토닥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