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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Oct 27. 2023

사랑, 때때로 구원

봄 (3)



13


모처럼 평일에 오프를 받은 미주의 오전 시간은 한가하지만은 않았다. 미주는 몇 개의 박스에 있던 옷들을 전부 꺼내어 하나씩 훑어보고 있었다. 대부분 미주가 작가로 활동하던 시절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 입는 예복들이었다. 한창 바쁜 와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미주는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며 휴대폰을 한쪽으로 던졌다.

-모처럼 쉬는데 시간 뺏어서 미안해.

“됐어. 어차피 연차가 쌓여서 쉬긴 쉬어야 하는데 잘 됐지 뭐.”

-괜찮은 옷 좀 찾았어?

“아직. 찾는 대로 우주 편으로 보낼게.”

-그래, 부담 갖지 말고. 없으면 없는 대로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일도의 말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어졌다. 며칠 전, 퇴근한 미주는 일도의 전화를 받았다. 은비네 회사에서 돌아오는 일요일에 오프라인 이벤트를 하는데, 그날 주인공인 원작자에게 그럴듯한 예복이 한 벌도 없다는 것이었다. 마침 키와 체격이 비슷하고 과거에 그런 자리에 나간 경험이 많은 미주가 떠올랐고, 일도를 통해 부탁하게 된 것이다.

미주는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연차를 신청했다. 아무리 오래 일했어도 사흘 전에 오프를 달라고 하면 당황하지 않을 담당자는 없다. 반장 역시 상당히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결국 연차계를 수리해 주었다.

박스 안의 옷들을 꺼내면서도 미주는 괜찮은 게 나오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이 예복들은 적어도 십 년 전 이후로는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옷들이다. 혹시라도 은비에게 물려줄 일이 있을까봐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있고 은비가 생각보다 키가 자라지 않아 결국 기회가 없었다. 또 전해들은 바로는 당사자는 머리색부터 시작해서 미주와는 판이하게 다른 이미지라고 했다. 과연 어울리는 게 있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과거의 옷들을 한 벌 한 벌 펼쳤다가 갤 때마다 단절해버린 그 시절의 자신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데뷔작이 된 원고를 출판사에 가져갔을 때, 사무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문장을 넣고 빼는 씨름을 벌일 때, 1쇄가 매진되어 증쇄가 결정되어 기념 파티를 할 때, 첫 잡지 인터뷰를 할 때, 사인회를 할 때, 우주와 은비의 운동회에 갈 때, 동창회에서 자신을 비방하는 동문들과 싸울 때… 그 기억의 대부분은 승완과 함께 한 것이었다.

서로에게 상처만 준 재회가 있은 지 일주일 후 승완은 멀쩡한 얼굴로 출근했다. 그는 근무 내내 밝은 얼굴을 유지하며 미주에게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했다. 미주는 그가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체 좀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해 협상에는 영 소질이 없다며 상사와 동료들의 핀잔을 듣던 그였다. 과거의 자신과 함께 한 마지막 순간에도, 불과 얼마 전에도 그랬다.

어찌 되었든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면 된다. 예전에 뭘 했느냐를 따지지 않고 현재 사지가 멀쩡하면 대체로 받아주는 게 이쪽 일이다. 미주에게 죄책감을 유발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의 고통까지 감수할 정도로 뒤틀린 사람이 아니다.

‘그래,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아니지.’

결국 답은 하나다. 미주를 지켜보기 위해 미주가 원하는 모습을 최대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섬기는 상대를 한없이 믿고 기다리고, 때에 따라 상대의 일그러짐에 걸맞게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옷을 열심히 뒤지던 미주의 눈에 물망초 무늬의 자수가 그려진 청록색의 드레스가 들어왔다. 그것을 들어 펼친 순간 미주의 심상은 아득히 오래 전 어느 봄날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름을 눈앞에 둔 살짝 더운 어느 늦봄의 날, 파주의 한 상가건물 앞에 종이가방 두 개를 든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6층 언저리의 창문을 바라보고는 스읍 하고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중얼거렸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강미주.”

결연한 의지와 함께 여자는 건물로 들어섰다. 대리석 바닥을 밟는 또각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층 전체에 울렸다.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복도를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이는 건 양끝의 쪽계단뿐이었다. 낡은 건물이란 인상은 받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드레스와 구두 차림으로 온 게 후회되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여자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체중과 양손의 짐의 무게가 쿠션 없는 구두를 통해 발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 층밖에 안 올라왔는데 벌써부터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치 공장에서 나름대로 단련된 터라 걷는 속도가 떨어지거나 호흡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6층에 다다르자마자 여자는 종이가방을 털썩 내려놓고 허억 허억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1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0자 원고지 이천 장 분량의 수기 원고를 들고 오면서 엘리베이터가 없을 거라고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약속시간에 빠듯하게 맞춰 도착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줄지어 늘어선 사무실 문들의 가장 끝에 『진리연출판사』라 손으로 쓴 간판이 보였다. 여자는 문 앞에서 가볍게 땀을 닦고는 얼굴을 정돈하고 가볍게 ‘똑똑’ 두드렸다.

몇 초 후 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가 여자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강미주라고 합니다. 오늘 원고 건으로…”

“아아…! 어서 오세요! 제가 전화 드렸습니다. 한승완이라고 합니다. 이쪽에 앉으시죠.”

남자는 여자를 응접용 탁자로 인도했다. 와이셔츠 가슴팍에 드문드문 찍힌 빨간 점이 신경 쓰였지만 그런 건 지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후우 하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엘리베이터 없어서 올라오시느라 힘들었죠?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죄송하네요. 전화드릴 때도 워낙 정신없어서 필요한 얘기만 짧게 하느라…”

여자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남자가 책상을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서류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컴퓨터 앞에는 먹다 만 짬뽕 그릇이 있었다. 둘러보니 사무실에는 남자 외에 다른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지나가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오늘 혼자 출근하셨나요?”

“그렇죠. 일요일에는 쉬어야죠.”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며 몇 장의 종이와 파일을 들고 탁자로 걸어왔다. 여자는 ‘그쪽은 안 쉬세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굳이 필요 없다는 생각에 꺼내지 않았다. 남자는 반대편에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조금 놀라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내용이나 문체에서 꽤 연세가 있으신 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젊으신 분이었다니…. 입사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원고를 가져오시는 분들을 보면 대개 글에서 받은 인상대로의 연령대인 경우가 많거든요.”

“…”

“물론 시놉시스만 보고 속단한 거지만요. 소재 자체가 진입장벽이 높아서 어지간한 신예 여류 문인들은 잘 안 다루거든요. 글도 출중한데 심지어 이런 미인이기까지 하시니, 정말 신은 불공평하단 생각이 드는 군요, 하하!”

“…”

여자는 아무 대꾸 없이 그저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템포를 늦추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혹시, 제가 불편하게 해드린 게 있습니까?”

“…편집자님.”

여자가 입을 열자 남자는 속으로 살짝 안도하며 대답했다. “네, 작가님.”

“제 글을 그렇게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저는 국문학과 1학년을 중퇴한 게 정식 교육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성년 이전까지의 독서와 경험에서 비롯되었죠.”

“그렇군요.”

“하지만 성별이나 나이나 가방끈의 여부가 글을 쓰는 데 절대적인 한계를 지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땅의 글의 대부분은 참 빈약하고 재미없는 것들이 되었겠지요.”

여자는 똑바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어떤 허세도, 감정의 요동도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자부심과 확신이었다. 남자는 여자를 마주보고는 그저 침묵한 채였다. 보통 책을 내 달라고 원고를 갖고 오는 신인 치고 이렇게 면전에서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찌됐든 원고는 늘 차고 넘치고, 아무리 새파란 말단 편집자라고 해도 자기 앞의 원고에 대한 거부 권한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 아무리 사람에 앞서 글 자체에 주목하라고 해도 결국 자기도 사람이기에 감정이 상하면 글조차 보기 싫은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글에는 한계가 없는 법이지요.”

물론 남자는 전혀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글은 물론 작가까지 마음에 들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님. 수많은 사람의 원고를 받다 보면, 글에는 한계가 없을지언정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웃풋은 결국 인풋과 처리 주체에 달려 있는 법이니까요.”

“그럴까요, 전 그저 사람마다 갖고 있는 재능과 운명이 각기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절대적인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고, 보다 재미있는 거지요. 적어도 제가 받아들이고 또 원하는 글과 세계는 그렇습니다.”

남자는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눈앞의 천재는 자신의 재능을 진심으로 누구나가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허세도, 겸손을 가장한 과시도 그녀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글을 쓰는 것은 자아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거나 재주를 겨루는 현학의 발현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의 역할은 편집자다. 상품으로든 작품으로든 책으로 낼만한 원석을 찾아내고, 그를 자신 혹은 회사의 기준에 맞게 다듬고, 독자가 접근할 수 있게 포장한다. 그를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작가와 충돌해야 하는 순간들도 생긴다.

냉정하게 말하면 여자의 글은 상품성이 떨어졌다. 누군가가 이해해 주길 바라는 심정이 놀라우리만치 느껴지지 않았다. 철저히 자기 자신에 침잠한 채, 오직 자신만을 독자로 상정한 글이라는 게 남자의 감상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남자는 지금까지 읽어 온 숱한 원고와는 다른 특별함을 느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보내 주신 글을 보면 전반적으로 ‘사랑을 통한 구원’을 역설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말씀하신 작품관과 세계관도 그와 연관이 있는 걸까요?”

“작품관과 세계관이라 하심은?”

“절대적인 우열이 무의미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재미있는…”

“긍정적으로 해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딱히 그런 메시지를 의식하진 않았어요.”

여자는 싱긋 웃었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얼굴 근육이 느슨해지는 걸 간신히 억제했다.

“그런 메시지를 저변에 두고 쓰는 시점에서, 이미 현실에는 편집자님이 느꼈다는 가치 개념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여긴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저는 결손되고 불완전한 현실에서 어떤 이상향을 탐색하는 글쓰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에게 글쓰기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알고 계시잖아요. 절대적인 우열이 무의미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재미있는 것. 그저 그뿐이에요.”

남자는 어깨의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 여자는 정말로 순수한 작가였다. 그러나 순수한 작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는 작가 곧 팔리는 작가는 아니다. 편집자로서 자신이 할 일은 이제 이 원고가 팔리게 도와주는 것이다.

“좋습니다, 작가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확신을 갖고 작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저는 작가님의 글과 생각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독자들도 그럴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교정, 교열과 윤문 작업을 위해 앞으로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

“윤문 말씀이시죠… 제 글을 고친다…”

“그것이 저희의 존재의의이기도 하고요. 어쨌든 저희는 이것으로 수익을 내서 저희의 월급과 작가님들의 인세를 확보해야 하니까요.”

“좋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여자는 주저 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의외로 순순한 반응에 남자는 악수를 받으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항 없이 납득해 주신 분은 처음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죠. 하나는 말씀드렸듯 저는 작품을 통해 거창한 이데아를 꿈꾸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제 글을 통해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면 굳이 그런 의도로 쓰지 않았다고 초를 칠 이유도 없는 거지요.”

“말하자면 ‘저명한 작가들의 포도주’보다 ‘트웨인의 물’을, ‘배운 사람들의 백과사전’보다 ‘선데이의 신문’을 지향하신다고 봐도 될까요?”

“제가 포도주를 빚었는데 그걸 마신 사람이 물이라 한다고 본질이 달라지진 않죠.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전 그저 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여태까지 ‘내 의도는 한 톨만큼도 어그러져서는 안 된다’는 꼬장꼬장한 투고자들에 익숙해져 있던 남자로서는 반가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여자는 이어서 말했다.

“또 하나는 편집자님이기 때문이에요.”

“네?”

뜻밖의 말을 들은 남자는 당황했다. 여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했다.

“일에 치이다시피 바쁜 와중에도 제 원고를 꼼꼼히 읽어 주신 거죠? 처음부터 원고를 작업하기로 하신 거라면 적당히 원고만 받고 저를 돌려보냈어도 되었는데. 굳이 저와 사담을 하며 편집자님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실 필요도 없었겠죠.”

“…”

“저는 제 생각에 전력으로 딴죽 걸어 주는 사람이 좋아요. 그 편이 훨씬 재미있거든요.”

여자가 의기양양하게 웃자 남자 역시 이내 콧소리로 흐흐흐 하고 웃었다.

“나중에 담당자 바꿔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피차일반이에요.”

이것이 강미주와 한승완의 첫 만남이었다.




‘…편집장님, 당신은 나에겐 분에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미주는 눈을 질끈 감으며 드레스를 끌어안았다. 어떤 처지에 있어도, 어떤 일을 해도 사람은 결국 언어와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마련이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허구를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도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의 열망을 줄곧 외면한다면 언젠가 정신의 미아가 되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승완은 미주가 자신의 열망을 끌어내고 구체화하게 해 주는 촉매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저 묵묵히 미주의 곁을 지켜주었다. 승완이야말로 미주가 두고 온 과거의 가장 소중한 지보였던 것이다.




저녁 7시, 국제전자센터 12층 컨벤션홀에선 하난과 은비 그리고 세빈이 일요일에 있을 이벤트를 앞두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4시 30분에 일찌감치 퇴근 카드를 찍고 나온 셋은 하난의 차를 타고 와서 두 시간 째 현장을 중간 점검하고 있었다.

그날의 이벤트는 단순히 미수의 팬미팅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메인은 버스터 걸즈 발매일을 3주 앞두고 하는 마지막 사전 발표회로 팬미팅은 맨 마지막 순서로 배정되었다. 사회는 서브컬쳐 전문 MC 겸 유명 스트리머인 ‘예나’가 맡기로 했고, 하난은 뒤에서 현장을 지휘하다가 팬미팅 때 총감독으로서 원작자인 미수와 함께 등장해 제작 과정 전반 소개 및 Q&A를 하기로 했다.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메인 디자이너를 맡게 된 세빈과 음악 감독으로서 실질적인 첫 작품이 되는 은비의 입장에서는 창작자로서의 성취감과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세빈은 프로젝터에 연결된 PC에서 버스터 걸즈 시연용 버전을 실행, 직접 캐릭터를 움직이며 혹시라도 버그가 있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은비는 따로 가져온 노트북에서 게임을 실행하고는 앰프에 꽂고 회장 안을 돌아다니며 사운드를 체크했다.

회장을 둘러보며 받침판에 끼운 서류들에 점검 사항들을 쓰던 하난은 슬쩍 은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안색은 창백했고 다크서클이 얼굴의 1/3을 덮고 있었다. 사운드팀 업무의 7할 이상을 잔업까지 하며 해내고 있는 데다 수시로 하난과 장시간의 의견 교환을 하며 미수와 관련하여 파주까지 빈번하게 왕복하기까지 해 왔으니 피로가 쌓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하난은 은비의 어깨를 톡톡 쳤다. 은비는 끼고 있던 헤드셋을 벗고 하난을 보았다. 하난은 세빈이 보지 않는 걸 확인하곤 입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작가님 의상은 문제없이 마련됐나요?”

“네. 일요일 오전에는 화이트클리닝이 끝난다고 하니까, 1시 전까지 제가 갖고 오면 돼요.”

“잘 됐어요. 그럼 내일부터 토요일까지 병가 쓰세요. 감기몸살이라고 진단서만 끊어 오면 제가 알아서 수리해 줄게요.”

은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괜찮아요, 끄떡없어요. 다음 주면 마스터 업이니까 그 뒤에 천천히 쉴게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에요. 다음 주가 마스터 업인데 감독님이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요.”

“혹시라도 문제가 있나 마지막으로 점검해야죠… 엔진이랑 충돌은 안 하는지, BGM이랑 SE 넘버링이 잘못돼서 진행에 차질이 있진 않은지, 그리고…”

“그런 건 팀원들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해요! 그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거 하나 못 처리합니까!”

하난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벌컥 소리를 질렀다. 저쪽에서 확인 작업에 열중하던 세빈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은비는 얼어붙은 채 멍하니 하난을 바라보았다. 늘 신중하고 침착한 하난이 이렇게 역정을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난 역시 감정이 격해진 스스로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입을 벌리고 “어… 어어…” 하는 소리만 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네요.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오겠습니다.”

말을 남기고는 하난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은비는 하난이 있던 자리를 멍하니 보며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저쪽에 있던 세빈이 조용히 은비의 곁으로 다가왔다.

“유 감독님, 괜찮아요?”

“…아, 하 선임님. 저는 괜찮아요.”

“어휴, 다들 그렇게 크런치로 갈렸는데 안 지치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신 PD님이라고 별 수 있겠어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

세빈이 은비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은비는 살짝 고개를 돌려 세빈의 얼굴을 보았다. 일주일에 한 번 볼 때마다 조금씩 두꺼워지던 화장은 지금에 이르러선 아예 파운데이션이 독자적인 층을 이룬 게 아닌가 싶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필시 그 밑에는 기미와 다크서클로 가득할 것이다.

“그럼 PD님이 사춘기의 방황을 재현하는 사이 잠시 휴식이나 하죠. 마실 거 사올 테니 자리 지키고 있어 줘요.”

세빈은 일어나서는 허리를 비틀어 두둑 두둑 하고 관절을 맞추는 소리를 내더니 하난이 나간 곳과는 반대쪽에 있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근데 두 가지는 얘기하고 싶네요.”

갸우뚱하며 자신을 보는 은비에게 세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혼자 다 떠맡다가 번아웃 오면 감독님한테도 회사한테도 좋을 거 없어요. 관리자가 실무자한테 일 못 맡기는 건 자질이 없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감독님이 제일 잘 알잖아요?”

“…”

은비는 묵묵부답이었다. 세빈은 한숨을 후우 쉬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옆에 좀 보고 살아요. 상처 입는 사람이 있다고요.”


세빈은 등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갔다. 은비는 홀로 회장에 남겨졌다. 하난과 세빈이 연이어 던진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맥이 빠졌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은비가 애써 외면해 온 문제들을, 그녀의 약함을 꼬집고 있었다.

팀원들이 자길 어려워하고 심지어 시기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대부분 어디 작곡과나 실용음악과를 졸업하고 나름 경쟁을 거쳐 들어왔을 텐데 비슷한 나이의 인문계 고졸 출신 상사가 있으면 곱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거품이라고 하대하기엔 부정할 수 없는 업적까지 있었다. 금욕적이라 할 수준으로 자기 절제가 강하고 워커홀릭에다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니 더더욱 공감대 형성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은비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은비는 고등학생 때 이미 동인 음악계에서 알아주는 작곡가였고, 그래서 몇몇 음대와 음반사에서 러브콜을 받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제나두워크스의 제의를 게임에는 별 관심도 없던 은비가 받아들인 건 오로지 우주 때문이었다. 때마침 스피릿 스트림 제작진의 내부 불화로 어느 파트든 사람이 부족한 상태였고, 완성도 있는 곡을 빠르게 만드는 데 도가 튼 은비는 입사 후 일 년간 유일한 사수인 장 감독과 밤 11시 이전에 퇴근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작업에 몰두했다.

장 감독이 몸과 마음이 지친 끝에 감독 자리를 은비에게 넘기고 퇴사하자 은비는 발매 전 석 달 동안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사운드팀의 업무를 해 나갔다. 그 해 은비의 팀에도 신입이 몇 명 들어왔지만 스피릿 스트림 발매 전에는 프로젝트에 매달리느라, 발매 후에는 우주와의 이별로 인한 고통과 싸우느라 은비는 그들에게 신경을 써줄 수 없었다. 이듬해, 1년차를 맞이한 은비네 팀원들은 다른 사운드팀으로 옮기거나 아예 회사를 관둬버리며 관리자로서 그녀의 무심함을 온몸으로 역설하게 된다.

이때부터 은비는 정장을 입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새로 배속된 팀원들에겐 중요도가 낮은 몇몇 잡일만 시키고 나머지는 전부 자신의 작업실에서 늦게까지 남아 처리했다. 팀원들의 사외 활동에 법인카드나 사비를 주저 없이 줄지언정 자신은 조금도 관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 점점 팀원들이 자신을 호구 취급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일만이, 창작만이 우주를 잊고 오랜 다짐을 지킬 수 있는 길이었다.

───그 사람과 대등하게 있기 위해서라도, 음악은 그치지 않아.

평생을 건 맹세. 마치 족쇄와도 같이 그녀의 존재를 옭아매는 언령. 어떤 시련과 아픔이 있어도 삶은 계속되었고, 따라서 그녀의 다짐도 계속되어야 했다. 오히려 음악만이 은비의 가장 깊은 곳을 어루만져 줄 수 있었다. 음악을 통해 은비는 가슴 속 가장 궁극적인 사랑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과거에 자신과 함께 게임을 만들던 세빈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 은비는 장 감독이 자신을 지켜준 것처럼 첫 후임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 뒤의 후임들은 아예 관심을 주지 않았다.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자신의 일에만 충실했고,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생겼다.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가뜩이나 피곤한 몸이 더욱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 힘들어지기 전에 오늘 온 목적은 달성해야 할 것이다. 은비는 심기일전하고 다시 헤드셋을 꼈다. 어쨌거나 자신이 만든 음악을 넓은 곳에서 스피커를 사용해 복수의 사람들에게 들려줄 기회는 많지 않다…


하난은 비상계단 한가운데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안 지 이 년 반 정도밖에 안 됐지만 유 감독, 아니, 유은비라는 여자는 관리자로서는 정말로 구제불능의 바보였다.

일반적으로 부서를 어떻게든 유지시키는 장長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세세한 실무적인 부분은 미흡하지만 인덕으로 실무자들을 고무시키고 단결시키는 소위 ‘덕장’ 스타일이다. 어차피 눈에 보이는 일은 실무자들이 하니까 부서장 즉 관리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성원 간 알력이나 외부로부터 부서에 가해지는 여러 형태의 압력에 맞서며 부서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단점은 구성원들 개개인이 철저히 이기적이고 뒤에서 배신할 가능성이 큰 경우 조직이 와해될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는 데 있다.

두 번째는 실무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으며 태도나 성과에 따른 상벌이 확실한 소위 ‘감독관’ 스타일이다. 이들은 실무자에게 긴장, 때때로 공포의 대상이며 동시에 부서 외부에서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부서의 이름으로 이권이나 혜택을 따오는 데 능숙하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구성원 한정으로 확실한 보상을 해 준다. 단점은 관리자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소홀히 하면 동기 부여가 부족한 구성원들의 경우 나태해지기 쉽다는 데 있다.

구성원들을 쪼지도 않고 품지도 않는 은비와 그녀의 뒷담을 하면서도 몸이 편하니까 굳이 일을 찾아서 하지 않는 팀원들은 두 유형의 단점만 극대화되어 일방적으로 부서장인 은비만 제 무덤을 파는 최악의 케이스다. 물론 은비는 시간만 여유롭게 준다면 사운드 쪽 작업은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는 재원이다. 그러나 기한과 예산이 정해져 있는 프로젝트성 업무에서 ‘시간만 여유로우면’이란 전제는 애초에 말이 안 된다. 사실 이미 일 년 전에 은비가 대부분의 업무를 다 하는 문제를 포착하고 개인적인 식사 자리에서 진지하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조금 업무 분장에 신경을 썼는지 정시에 퇴근하는 모습을 곧잘 볼 수 있었지만 한 달을 못 가 원상 복귀해 버렸다.

하난은 그에 대고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첫째, 처음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은비의 악곡을 좋아해서 섭외했기에 은비의 업무 부담이 줄길 바라는 한편 내심 작곡 비중만은 줄어들지 않길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있었다. 둘째, 연차나 직위로는 총괄 프로듀서인 자신이 높을지언정 게임 개발 프로젝트 업무란 어디까지나 프로듀서와 요청에 응한 부서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진행하는 것인 만큼 직책상 엄연한 부서장인 은비에게 부서의 일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월권 행위였다.

하난은 자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그렇게 흥분하면서까지 다잡을 일은 아니다. 부서의 업무분장이 기형적으로 되어 있고 그 때문에 은비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간들 그건 은비의 선택이고 책임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 짓고 고개를 돌리기엔 그는 은비와 너무 가까워져 버렸다. 그녀의 외로운 일면을 봐 버렸고, 자신의 외로운 일면 또한 보여줘 버렸다. 회사 동료라 선을 긋기엔 은비는 하난의 마음 속 너무나도 깊숙이까지 들어와 버렸다.

──나 회사 일에 사적인 감정 끌어들이는 사람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신하난, 이 바보 같은 놈아…’

그랬다. 은비가 관리자로서 구제불능의 바보라면 하난도 남 말 할 일이 아니었다. 소중한 동료? 자기기만도 정도껏 할 일이다. 둘이서 있을 때 차분히 말을 하는 은비의 립밤이 반들거리는 입술을 볼 때마다 키스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지 오래인 주제에 말이다.

하난은 손바닥으로 양 볼을 찰싹 치며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지 않은가. 감정을 앞세워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법이다. 한 번도 실수를 안 했다고는 말 못하지만 적어도 복구 불가능할 정도까진 간 적이 없기에 여태껏 실적을 남겨 왔다. 여기서부턴 다시 평소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상문 손잡이를 열며 하난은 재차 이를 다짐했다.

세빈은 어디로 갔는지 은비 혼자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헤드셋을 낀 채 주저앉아 있었다. 하난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은비의 얼굴을 살폈다. 은비는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졸고 있었다. 이렇게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안색은 여전히 안 좋았지만 표정은 앉아서 조는 자세임에도 세상 근심 없는 평온함을 넘어 행복함까지 느껴졌다.

하난은 헤드셋을 벗겨주었다. “감독님…? 유 감독님…?” 한 뼘 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하고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내친 김에 아예 귓가에 대고 속삭여보았다.

“…은비 씨?”

은비는 요지부동이었다. 하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순간 그 소리가 회장 전체에 울릴 정도로 크다고 하난은 괜히 느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지금밖에 없다. 무엇을? 어허, 꿈도 꾸지 말지어다. 불과 일 분 전 한 다짐도 못 지킨단 말인가? 무엇보다 은비의 마음은 하나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이 년 반 동안 은비에 대해 알게 된 남들이 모르는 사실 하나가 있다면, 그녀는 정말로 음악을 사랑하고 심지어 그에 미쳐 있단 것이었다. 자신은 그런 그녀를 좋아했고 또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까지처럼 앞으로도 혼자 이 마음을 간직한 채 그녀의 옆에 있어준다면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겠다는 다짐은 충분히 병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할게… 늘 옆에 있을게… 그러니까…”

하난은 조용히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수많은 꽃들 중 단 한 송이의 꽃과, 수많은 여우들 중 단 한 마리의 여우와 서로 알게 되고 친구가 되어 길들여진다면, 그 꽃과 여우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난은 제나두워크스의 수많은 사원들 중 은비와 알게 되고, 친구가 되고 말았다. 제멋대로인 이야기지만, 은비에게 아무 원인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합리화라는 사실은 견고한 이성이 잘 알고 있으니 유혹을 따르는 인간적인 약함에 대한 징계로선 충분할 것이다. 약한 인간이기에 기념을 원하고 추억을 원하는 게 그렇게도 용인 받지 못할 정념이란 말인가. 은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며 하난은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을, 평생 나만의 북극성으로 여기며 살아갈게…’ 


먼 발치에서 이를 목격한 세빈은 숨을 죽이며 조용히 문 뒤로 숨었다. 캔 커피가 든 봉지를 쥔 손이 부들거렸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조금도 예상 못할 일은 아니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던 일이고 또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기에 이 정도 반응으로 그치는 것이다. 오히려 “왜 이제야?” 라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프로젝트 외부에서 봐도 내부 관련자 입장에서 봐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프로젝트를 시동할 때 처음 만난 하난을 세빈은 ‘참 키가 작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할수록 그것은 ‘키만 안 작았으면…’으로 바뀌어 갔고, 일 년이 지나자 ‘키 작으면 어때’로 완전히 본인의 호감을 자각했다. 하난이 급하게 행사용 대형 일러스트를 부탁할 땐 이미 ‘키 작은 게 오히려 귀엽다’고 여긴 지 오래였다.

하난이 은비와 따로 만나는 것도, 일 년째 이후 하난이 은비를 보는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연모의 정이 깃들어 있는 것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서두를 것 없다고, 사내연애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게임만 발매하고 나면 그때 고백해도 늦지 않다고, 그 편이 총괄 프로듀서인 그의 마음에도 더 들 거라고 여겼다.

‘…겁쟁이. 핑계도 유분수지.’

사실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방심하고 있었다. 그토록 우주와 잉꼬 부부 티를 내던 은비가 순순히 마음을 열리가 없다고, 그런 붙임성도 없고 사내 지지 기반도 없고 스캔들까지 일으킨 여자를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하난이 위험을 감수하고 진지하게 교제할 리가 없다고, 그렇게 은비와 하난을 얕보고 있었다.

이성은 뼈아프게도 세빈의 교만함을 성토하고 있었다. 빼앗긴 게 아니다. 애초에 자기 거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때도, 지금도 말이다. 그러나 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같은 여자에게 두 번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순정을 바쳤다는 패배감과 비참함이 너무나도 여지없이 자신의 자존감을 찢어발겼다.

세빈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휴대폰 액정은 오후 7시 2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화장실로 들어간 세빈은 수도꼭지를 틀었다. 31분이 되면 세빈은 봉지를 빙빙 돌리며 “편의점 찾는 데 너무 시간을 많이 썼네요~” 라는 너스레와 함께 들어갈 것이다. 그걸로 ‘안정과 신뢰의 캐릭터 디자이너 하세빈 주임’의 페르소나는 건재할 것이다. ‘실연당한 티를 팍팍 내며 공사 구분 못하는 부담 백 배 꼴불견 여자’만큼은 될 수 없다. 이번에야말로 과거의 미숙한 자신이 지키지 못한 차원의 자존심을 지켜 보일 것이다. 살짝 부은 눈에 파운데이션을 찍어 바르며 세빈은 다짐했다.


14


빗소리가 줄기차게 귀에 울리고 이불의 습기가 온몸을 엄습하자 이재는 얼굴을 찡그렸다. 몸을 돌려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퇴근하자마자 씻고 누웠건만 아직도 몸에는 피로감이 남아 있었다. 작년까지는 토요일 저녁 근무가 아무리 힘들어도 한숨 자고 일어나면 일요일 아침에는 비교적 멀쩡했는데, 확실히 아르바이트생 수가 줄어든 만큼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원래라면 일요일에는 11시쯤엔 출근해서 브레이크 타임까지 홀 업무도 하고 가게 여기저기도 점검해야 했지만 여사장의 배려로 격주마다 디너 타임 전에 출근해서 가게 문 닫고 퇴근하도록 근무 시간이 바뀌었다. 대신 그 시간에는 소녀가 고정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재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주방으로 나와서는 전기 포트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는 철푸덕 하고 식탁 위에 엎어졌다. 유리의 차가움이 맨살의 가슴에 기분 좋게 전해졌다. “으어어…” 이재는 할머니나 낼 법한 신음 소리를 내며 일요일 오전의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혼자 살다 보니 이재는 집안에서는 브래지어를 차지 않았다. L컵인 이재의 입장에선 어차피 차든 안 차든 어깨 아픈 건 매한가지고, 시기가 조금 차이가 날 뿐 처지는 걸 피할 수 없는 이상 혼자 있을 땐 편하게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종종 방해받곤 했으니, 두영의 앞에서는 아무리 업무와 상관없는 때라도 노브라로 있을 배짱이 없었다.

(쿵쿵쿵!) -이재 씨, 일어났어요?

문 밖에서 두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재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급히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식탁 다리에 무릎을 찧자 “아악!” 하고 비명이 나왔지만 가까스로 억누르고 종종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브래지어는 어차피 두세 종류밖에 없으니 손에 잡히는 대로 찼지만, 스무 살 이후부터 거의 집과 직장을 왕복할 뿐인 생활반경이 변하지 않다 보니 겉옷은 대부분 편하게 갈아입을 수 있는 셔츠나 청바지였다.

-대충 입고 나와요~! 어차피 그 옷이 그 옷이잖아~

“시끄러워!”

옷장 사정을 훤히 아는 듯한 두영의 말에 이재는 소리를 빽 지르고는 혀를 쯧 차며 흰색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머리를 대충 뒤로 모아 묶고 현관문을 열자 레인코트를 입은 두영이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3뷴 14초. 평소보다 오래 걸린 것 치고는 그럭저럭이네요.”

이재가 대꾸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자 두영은 스스럼없이 따라 들어왔다. 두영은 이따금 자신과 이재의 비번이 겹치면 이런 식으로 예고 없이 놀러 오곤 했다. 그때마다 이재는 매번 구시렁대면서도 굳이 싫은 티를 내거나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지는 않았다.

두영이 멋대로 식탁에 앉자 이재는 찬장에서 컵 두 개를 꺼냈다. 커피 캡슐을 따 컵에 털어 넣고는 마침 다 끓은 물을 반쯤 부어 두영의 앞으로 밀었다. “땡큐.”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들이킨 두영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입가를 찌푸렸다. 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컵을 들고 홀짝거렸다.

“오늘 가게에 별일 없겠죠?”

쓴맛의 여운을 떨쳐 낸 두영이 이재를 보며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재는 컵을 든 채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있으면 연락하겠지. 하린이한테도 단단히 일러 줬고.”

“오, 요즘 여유롭나 봐요? 며칠 전에 근무 시간 변경해 달라고 한 것도 바로 오케이해주고.”

“바보야, 관리자가 빠듯한 티 내면 밑에 애들이 어떻게 믿고 일에 열중하겠냐?”

이재는 눈을 살짝 흘겼다. 두영의 말대로 원래 오늘 오전부터 출근해야 하는 소녀는 디너 타임의 다른 아르바이트생 한 명과 급하게 근무 시간을 바꿨다. 이재는 “너 이 녀석 많이 컸다? 이번만이야!” 하며 짐짓 으르는 태도로 승낙했다. 두영은 옆에서 “키는 원래 이재 씨보다 컸으윽!” 하며 놀리다가 정강이를 차였다.

“우주 씨 만나러 가는 거면 이 언니가 밀어줘야지. 하린이도 이럴 때 치프 역할 해 봐야 빨리 클 거고.”

“이재 씨는 걔네들 백업해 주려고 아침부터 집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고?”

“나야 뭐 티블리 안나의 지박령 아니겠냐. 내 청춘을 여기 전부 바쳤는데.”

이재는 한쪽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두영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우물거렸으나 이내 단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이재는 이어서 말했다.

“대학도 안 가고 여기서 일만 하다 보니 몇 년만 있으면 서른이라고. 내 이십대는 일 말고 동년배다운 다른 경험은 하나도 없어. 너도 나처럼 되기 전에 이것저것 열심히 해 봐. 공부를 하든, 연애를 하든…”

“흠…”

두영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저 들이켰다. 의자에 등을 받치고 있던 이재가 갑자기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멀리서 찾을 게 뭐 있어? 하린이나 현지 예쁘잖아?”

“하린 씨랑 현지 씨요? 그게 무슨…”

“그러니까 연애 말이야! 프라이팬이랑 식칼하고 결혼할 거 아니면 한 번쯤 해봐야 할 거 아냐?”

이재는 신이 나서 두영에게 몸을 바싹 기울이고는 재잘거렸다. 두영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재 씨, 왜 사람들이 사내연애 하지 말라는지 몰라요?”

“그건 머저리같이 공사 구분 못하고 희희낙락하는 연놈들 얘기고. 내가 널 삼 년을 봤지만 도저히 그럴 놈은 아니야. 만약 너 말고 여자친구가 한심하게 굴면 내가 정신 바짝 차리게 해 줄 거고.”

“저쪽은 연상이라고요. 어디까지나 아르바이트고. 연하의 조리사가 눈에나 차겠어요?”

“야,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대학 나와서 사무직 하는 게 능사가 아냐. 좋아하는 일 찾아서 꾸준히 경험 쌓고 실력 쌓는 게 상수지. 그건 노력 이전에 운과 재능이 없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

두영은 묵묵히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말이야, 너 같은 얼굴이 자손 번식을 안 하면, 이건 인류 차원의 손실이야. 마음이 어쩌니 조건이 어쩌니 해도, 연애 단계에서 이성을 원초적으로 끌리게 하는 건 결국 외모거든. 거기서 서류 심사가 통과된 다음에야 성품이나 재산을 보는 게 보통 사람들의 시퀀스야.”

“…이재 씨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하!… 더 이상 꿈이나 꿀 나이는 아니거든. 남자에 비해 여자는 외모에 따른 대우 차이가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니 말이야, 주제 파악이 빨리 된다고.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도 호의적이게 하는 너 같은 외모의 녀석은 공감하기 힘들겠지만 말이야.”

두영은 이재를 한번 쓰윽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 옆에 둔 종이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조언 새겨둘게요. 저도 디너 타임 근무니 좀 더 쉬어야겠어요.”

“뭐야, 벌써 가게? 브런치라도 먹고 가.”

“사양할게요. 오늘은 그거 주러 온 거니까, 그럼 좀 있다 봐요.”

두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재는 손을 뻗으며 두영을 불러 세우려다 순간 말문이 탁 막혔다. 오늘따라 두영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문득 식탁 위의 종이가방에 눈이 갔다. 이재는 그것을 거꾸로 들고 내용물을 쏟았다.


“하아…”

이재의 맨션이 작게 보일 즈음 두영은 걸음을 멈추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자리에서 이재의 충고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소리를 계속 들어주기가 힘이 들었다.

이재는 자신을 ‘티블리 안나의 지박령’이라 했다. 하기사 두영이 열아홉에 입사했을 때 이미 매니저 직함을 달고 있었으니 얼마나 가게에 이바지를 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처음 봤을 때 초등학생으로 착각하고 부모님은 어디 있는지 물었다가 화가 난 이재에게 복날 개 맞듯 두들겨 맞기도 했다.

군기 철저한 주방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회의 무서움을 몸소 느끼면서도 배식구 너머에서 이재의 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작은 천사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손님을 대하는 미소에서 단 한 번도 억지스러움을 느낀 적이 없었고, 홀 직원들에게 짐짓 엄하게 대하는 듯 보이면서도 늘 자신의 수고를 감수하며 그들을 챙기고 다독였다.

이재가 말했듯 워낙 외모가 출중하다 보니 주방이든 홀이든 여직원들은 두영에게 호감을 가진 경우가 많았고, 수시로 두영에게 말이나 가벼운 스킨십으로 티를 냈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명도 두영에게 직접 고백한 적은 없었다.

두영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호감에 대해 응하는 제스처를 취하면 그들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는 훈남 후보군과 비교한 후, 두영이 낫다고 판단하면 내키지 않는 척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 다음엔 오프라인이고 SNS고 가리지 않고 ‘나 이런 남자와 사귄다’고 티를 내지 못해 안달할 것이다. 두영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면 그날부로 두영에게 냉정하게 선을 그을 것이다. 그러면 두영은 ‘친절하게 대했을 뿐인데 주제넘게 들이댄 한심한 남자’가 되고 여자는 ‘두영이 호감을 표시할 정도로 잘 나간다’는 자존심을 세울 수 있다. 이는 자신이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딱히 이성에게 호감을 얻고 싶은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없다. 그저 마음껏 요리하고 그를 먹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는 게 좋다. 그래서 검정고시와 요리 공부를 병행하기로 했다. 당시 유명 셰프들이 공중파 방송에 곧잘 얼굴을 비춘 데 자신이 영향을 받은 거라 생각했는지 부모님은 “너 그 길 가면 머릿속에 프라이팬이랑 칼질 말곤 든 거 없는 골통 되는 거야! 얼굴 살려서 운 좋게 방송 타 봤자 사람들은 그저 딴따라 아류 취급할 거라고!”라 과격한 표현까지 쓰며 반대했고, 중학교 담임은 “그래, 그 얼굴 살리려면 사무직 월급쟁이보단 주방장이 낫지.” 하며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두영은 소매를 걷어 자신의 오른 팔등을 바라보았다. 꽤 아물어 있었지만 여전히 화상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열여덟 살 때 요리 학원에서 웍질 연습을 하던 옆 사람이 힘 조절을 잘못해 쏟아진 기름에 덴 것이다. 치료하는 동안 요리를 할 수 없어 침울해하는 두영에게 병문안을 온 학원 강사는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 흉 안 진 게 다행이다.”라며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나 해 주었다.

얼굴이 아닌 요리로 인정받고 싶어서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다. 얼굴로 편하게 산단 소리 듣기 싫어서 검정고시도 만점 가까운 점수로 합격했다. 실습 겸 티블리 안나의 수습 요리사가 되었을 때도 새벽에 몰래 들어와 요리를 만들다가 몇 번인가 여사장에게 들키기도 했다.

‘외모는 서류 심사’라고? ‘너 같은 외모는 공감할 수 없다’고? 그렇다, 두영도 바보는 아니었다. 약관의 나이에 모종의 성공을 이루고는 “뭐, 운이 좋았지.”라 겸손을 떠는 사람들이 종종 긴장이 풀렸을 때 내뱉는 “(잘나신)내가 죽어라 노력해서 이만큼 된 거야”가 얼마나 방어기제에 찌든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이는가. 자신의 위치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건 조금만 메타인지를 발휘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자니 자신의 노력이, 아니, ‘누군가의 도움 없이 외로이 싸워 온 이다지도 고고하고 결백한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이 자기 얼굴로 멋대로 만들어 낸 캐릭터가 커리어에 조금도 득이 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적어도 이재의 입을 통해 선고받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그 가치를 잘 알고 있다고 여겨 온 상대에게 말이다.

‘조급하게 굴어 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는데… 그렇지만 이젠…!’

“잡았다!”

어느새 우산을 쓰고 뒤쫓아 온 이재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두영의 팔목을 붙들었다. 두영은 돌아보지 않고 이재를 외면한 채 서 있었다. 이재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런 걸 갖고 와서는 왜 말 없이 그냥 가는 건데?”

“뭐 어때요. 잘 받았으면 된 거 아니에요? 나중에 가게에서 볼 건데 뭐 하러 힘들게 뛰어왔어요?”

두영은 이재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다그치는 이재의 얼굴엔 초조함이 가득했다.

“내가 지금 네가 준 옷 갖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갑자기 나가 버리면 무섭단 말이야!”

“…뭘 새삼스레 소녀 감성 연출하는 거예요? 세상 풍파에 찌든 아줌마 티 팍팍 내던 사람이.”

두영은 최대한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뒷 문장에 묘하게 강세가 들어간 걸 스스로 눈치 채지 못했다. 이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내 말이 듣기 싫었던 거지.”

“그런 거 아니에요.”

“아무리 선배들이 견제 놓고 뻘소리를 해도 싫은 티 하나 안 내던 네 멘탈을 내가 몰라? 나랑 의견이 안 맞을 때도 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잖아! 둘러대려면 설득력 있게 둘러대!”

“됐어요. 저 정말 피곤해요. 좀 있다 출근해서 봐요.”

“되긴 뭐가 돼! 내가 혹시라도 뭐 실수했어? 그런 게 있으면 말을 해!”

“실수한 거 없어요. 제가 못나서 그런 것뿐이에요. 됐죠?”

“허두영!!!”

이재의 노성이 비 내리는 거리에 쩌렁쩌렁 울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보았다. 난처해하는 표정의 두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재는 우산을 팽개치고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이재의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부들거리는 손에서 두영은 그녀가 화를 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발, 이재 씨… 이 이상 추한 모습 보이기 싫어요…”

“추하고 말고는 내가 판단하는 거야!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데?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이재의 다그침에 두영은 묵묵부답이었다. 약 1분간 대치 상태가 이어진 끝에, 이재는 두영의 멱살을 탁 놓고는 뒤돌아섰다. 땅에 떨어져 있던 우산을 줍고는 이재는 두영을 째려보았다. “머저리 같은 새끼…” 이재의 중얼거림은 두영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그를 내버려둔 채 이재가 맨션이 있는 방향으로 몇 발자국 걸었을 때였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두영은 차분하게, 그러나 힘을 주어 말했다. 목소리는 빗속을 뚫고 이재의 귀까지 닿았다. 이재는 멈춰 섰다. “…뭐?”

“말하면… 받아들일 수 있냐고요. 도망치지 않고.”

두영은 한 발짝 다가갔다.

“내가 티블리 안나에 와서 단 한 사람만 좋아해 왔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재는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황홀해 하는 모습이 일상의 구원이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두영은 또 한 발짝 다가갔다.

“그 사람이 내가 선물한 방울을 달고 뛰어다닐 때마다 집에 납치해 가서 하루 종일 얼굴을 부비고 싶은 충동이 든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두영은 재차 한 발짝 다가갔다.

“그 사람이 내가 선물한 옷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난다면, 당장 전부 벗겨버리고 그 사정없이 큰 가슴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샅샅이 유린하려는 나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은데, 받아들일 수 있어요?”

두영은 어느새 이재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이재는 입을 벌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우산을 땅에 떨어뜨린 두영은 천천히 이재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이재는 어깨에 가해지는 악력에서 자신이 도망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너, 너는…”

“진작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난 너무 어렸고, 당신은 날 남자로 보지도 않았거든.”

“아니야, 그런 게…!”

“그러니까 이건 네 책임도 어느 정도 있는 거다, 지이재?”

무언가를 말하려던 이재의 입이 두영의 입에 가로막혔다. 이재가 떨어뜨린 우산은 데굴데굴 굴러 두영의 우산 옆에 나란히 포개졌다.




『메이 플라워』 앞의 앉은뱅이 의자에 우주는 우산을 쓰고 쭈그리고 있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옷차림에 괜히 몸이 근질근질했다. 작업을 나갈 때 입는 낡은 트레이닝복이나 가게를 볼 때 입는 남방에 청바지가 아니라, 베이지색 신사 바지에 흰 티셔츠, 갈색 잠바에 청색 볼캡이라는 작정하고 꾸민 코디는 스스로도 낯설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 미주에게 “오늘은 롯데월드에 갔다 올 거예요.”라고 지나가듯 말한 우주는 밥을 먹다 말고 그대로 안방으로 끌려갔다. 보너스를 받을 때마다 틈틈이 사 놓은 거라며 미주는 커다란 옷상자를 세 개인가 꺼내더니 옷을 하나씩 대 보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미주는 우주의 머리 세팅까지 그나마 만족스러운 스타일을 완성시켰고, 우주는 밥도 못 먹고 서둘러 집을 나서야 했다.

메이 플라워로 향하려는 찰나, 우주는 일도의 전화 한 통을 받고 서둘러 동네 어귀에 있는 세탁소에 들렀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10시 40분이 되도록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조마조마했다가, 개 산책을 시키고 돌아오는 주인과 운 좋게 맞닥뜨려 급히 셔터를 올리고 미주가 맡긴 옷을 찾을 수 있었다.

우주가 가까스로 11시에 메이 플라워에 도착한 지 삼 분 만에, 저쪽에서 소녀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원피스 위에 얇은 남방을 걸친 소녀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오고 있었다. 우주는 벌떡 일어나 소녀를 향해 달려갔다.

“미안, 우주 씨! 늦었어!”

“왜 그런 꼴로 오는 거야? 우산은? 도중에 잃어버렸어?”

다그치듯 묻는 우주의 기세에 소녀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늦잠을 자서… 챙길 여유가 안 나서…”

“너 바보 아냐!?”

우주가 화를 벌컥 내자 소녀는 위축된 듯 움츠러들었다. 우주는 잠자코 잠바를 벗어 소녀의 어깨에 걸쳤다.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하고 우산을 쓰고 오든 택시를 타고 오든 하라고. 휴대폰 뒀다 어디다 쓸래?”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우주는 잠바의 지퍼를 소녀의 목까지 채웠다. 소녀의 몸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이런 상태의 여자아이를 데리고 서울 한복판을 누비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일단 우리 집에 가서 몸 좀 녹이고 있어. 난 갔다 올 데가 있으니까, 약이라도 사서 돌아올게.”

“싫어.”

소녀는 우주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우주가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너 이러다가 감기로 끝날 게 더 악화된다? 가게 일은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있잖니, 다음번에 가면 돼. 또 권유해 줄 테니까…”

“우주 씨.”

소녀는 우주의 양어깨를 척 하고 붙들었다. 내려다본 소녀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사실 오늘 할 말이 있어. 오늘 말해 두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그러니까…”

우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그에 다소 면목 없다는 듯 시선을 살짝 내렸다. 그러나 어깨를 붙든 손에는 오히려 더욱 완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

우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소녀의 옆으로 붙었다. 그리고는 소녀의 어깨를 감싸 자기 쪽으로 밀착시켰다. 어리둥절해 하는 소녀를 내려다보며 우주는 말했다.

“이 이상 비를 맞을 순 없잖아. 그거 내 잠바고. 일단 큰길에서 택시 탈 때까진 참아.”

소녀의 얼굴엔 화색이 돋았다. 소녀는 우주의 팔을 빼서는 팔짱을 끼었다. 나란히 걸으며 우주는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다르네.”

“…무슨 뜻이야?”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그거.”

“…오늘은 관대히 봐 줄게. 우주 씨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소녀는 우주의 손등을 꽈드득 꼬집었다. 우주는 그에 맞서 소녀의 볼을 꼬집으면서, 아침에 전화로 다급하게 부탁하는 일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전 7시, 평소 거의 울리지 않는 시간에 은비의 휴대폰이 울렸다. 하난이 역정을 내고 세빈이 충고한 그날 이후 은비는 병가를 내고 거의 집에서 잠만 잤다. 그래서인지 몸의 피로가 완전히 가셨다고는 못해도 이미 약 십 분 전부터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은비는 곧바로 일어나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하난이었다.

“네, PD님. 무슨 일이시죠?”

-유 감독님, 좋은 아침이에요…, 아니, 사실은 별로 좋지는 않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면목이 없네요, 기껏 힘 빼고 쉬라고 해 놓고는…”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하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침착함이 떨어져 있었다. 하난은 “음…” “하아…” 하고 계속 추임새를 넣으며 다음 말을 주저하고 있었다.

“PD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말씀해 주세요.”

은비가 진지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다잡았다. 하난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은비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이윽고 하난은 입을 열었다.

-오늘 사회 및 진행을 맡을 예정이던 예나 씨가 방금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은비의 눈동자가 커졌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부상은 아니지만,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해서 도저히 행사를 맡을 수는 없다고 하는군요.

묵묵히 듣고 있던 은비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지금 당장 회장으로 가겠습니다. PD님도 가시는 중인가요?”

-저는 이미 와 있습니다. 어제 회사에서 자고 일찌감치 최종 확인차 가는 길에 전해 들었어요 하 선임님한테도 곧바로 연락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모여서 의논하죠.”

통화를 끊고는 은비는 옷장을 열고 업무용 정장을 챙겼다. 원래라면 오늘은 엄밀히 말해 출근을 하는 게 아니기에 캐주얼하게 입고 가서 오후에 올 미수에게 옷을 건네 주고, 행사가 끝나면 하난, 미수 그리고 세빈과 뒷풀이나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지금은 그렇게 유유자적할 때가 아니었다. 사회자가 갑자기 공석이 된 시점에서 어느 관계자든 남 일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번 역은 양재, 양재 역입니다. 내리시는 문은…

지하철 내 안내방송이 울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앞에 서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우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다음 역에서 내릴 거야. 걱정 말고 앉아 있어.” 소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에 혈색은 제법 돌아왔지만 영 기운이 없어 보였다.

우주는 살며시 옷이 든 종이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일도의 부탁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솔직히 말하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도가 집을 비운 이상 자신이 아니면 마땅히 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 역에서 내려서 넌 쉼터에라도 있어. 이거 갖다 주기만 하고 바로 올 테니까.”

“…같이 갈래. 걸리적거리진 않을 테니까…”

아까부터 거듭 권유했지만 소녀는 완고했다. 우주는 마음이 불편했다. 정상 컨디션이 아닌 소녀를 데리고 서울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지만, 지금 가는 목적지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은비를 포함해 일찍이 자신이 해고당한 회사의 사람들이다. 나온 지 삼 년밖에 안 됐으니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당시 대표가 직접 불러 권고사직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숙이며 “만약 다른 회사에서 그래픽 일을 할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두 팔 걷고 도와주겠습니다.”라 했고, 짐을 싸서 나갈 때도 일개 선임을 총감독을 위시하여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두가 배웅해주었으니, 이보다 마무리를 좋게 하고 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회사에서 나갔던, 지금 같은 업계에 있지도 않은 사람으로서 그들을 다시 보는 건 반가움보단 어색함이 훨씬 컸다.

그러고 보니 스피릿 스트림 때도 발표 행사를 국전에서 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참 일이 자신이고 자신이 일인 양 살았었다. 행사 전날 밤까지 버그 잡고 밸런스 조정한다고 프로그래밍 팀과 모니터 앞에서 씨름했었던가. 보람은 있었지만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사양할 것이다. 남부터미널역 도착 메시지가 차량 내 모니터에 뜨는 걸 보며 우주는 잠시 추억에 잠겨 보았다.


“여긴 뭐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우주는 국전 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비가 와서 날씨가 흐린 와중에도 《제나두워크스 버스터 걸즈 서비스 임박! 태미수 원작자를 만나다!》라고 적힌 세로 현수막은 눈에 잘 띄었다. 스피릿 스트림 때도 비슷하게 현수막을 걸었었다.

감개무량한 기분으로 우주는 소녀 쪽을 보았다. 소녀는 망부석처럼 서서 현수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우주가 말을 건네도 소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소녀의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많이 아픈 거야?”

우주가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추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소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싱거운 녀석.’ 우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몇 발자국 걸었을까, 옆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돌아보니 저 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소녀는 멍하니 현수막을 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우주가 소녀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팡!

“세상에, 이게 누구야!”

호쾌하게 등을 때리는 감각과 더불어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우주의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자 프릴 드레스를 입고 가슴팍에는 STAFF라 쓰인 명찰을 단 빈우가 우주의 양손을 붙들고 방방 뛰었다. 우주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보네요. 고 책임님.”

순간 빈우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우주가 손쓸 새도 없이 빈우는 우주의 양 옆구리를 있는 힘껏 꼬집었다. “아하아악!” 우주가 꼴사나운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지만 빈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더 세게 주었다.

“누, 누나!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

우주는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빈우는 팔짱을 낀 채 우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누나라고 안 부른 거?”

우주가 조심스럽게 답하자 빈우는 휴우 하고 한숨을 쉬며 우주를 일으켜주었다. 우주가 ‘이걸로 됐나 보다’ 하며 안심하는 찰나 빈우는 왼손으로 우주를 붙든 채 주먹을 쥔 오른손으로 있는 힘껏 우주의 배를 때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우주는 순간적으로 내장이 확 눌리는 느낌을 받으며 숨이 턱 막혔다. 이번에야말로 우주는 힘없이 털썩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빈우는 그에 대고 로비에 다 들릴 정도로 호통을 쳤다.

“그래, 이 매정한 자식아. 프로그래머로 들어와 놓고 코드는 안 짜고 생소한 테크니컬 아트 쪽으로 파고들겠다며 다른 부서 기웃거릴 때 눈감아주고 밀어준 사람이 누구야? 말해 봐!”

“…누나지.”

“너 스피릿 스트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고 해서 감독한테 사정해서 아트팀에 보내 준 사람은 누구고?”

“…누나.”

대답을 할 때마다 우주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눈앞의 빈우는 말 그대로 우주의 커리어 하이를 위한 발판을 깔아주다시피 한 사람이었다. 부서를 옮긴 뒤로는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그래도 연락은 유지했고 가끔씩은 만났다. 그러나 퇴사와 동시에 우주는 지금까지의 모든 메모와 연락처가 담긴 스마트폰을 버리고 말았다.

이후로 빈우는 우주에 대한 어떤 소식도 알 수 없었다. 빈우로서는 딱히 친하지도 않고 스캔들의 당사자인 은비에게 우주에 대해 물어볼 수 없었다.

“근데 그런 내 앞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져? 뒤도 안 남기고? 그래놓고 이제 와서 여긴 왜 온 거야?”

우주는 살짝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여전히 손이 매운 걸 보니 잘 지내나 봐. 안심인걸.”

우주는 엷게 웃으며 짐짓 능청스럽게 말했다. 빈우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우주가 손을 뻗어 달래려 하자 몸을 홱 돌리며 툭 내뱉었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야? 바깥에 현수막 봤으면 회사 사람들 있는 거 알았을 텐데, 그거 때문이야?”

“맞아. 유 감독님한테 갖다 줄 게 있거든.”

“유 감독님…?”

순간 우주는 빈우의 눈빛이 살짝 변한 느낌을 받았다. 빈우는 이내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좋아, 안내해 줄게. 나 오늘 그 일 하려고 여기 온 거거든.”

“그 일이라니?”

“VIP 접견. 그래봤자 딱 한 명이지만, 아직 오려면 조금 남았어.”

“그럼 사양할게. 혹시라도 엇갈리면 어떡해. 어차피 12층 컨벤션 홀 아냐?”

“음… 근데 너 혼자 가면…”

빈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뭔가 생각난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쳤다.

“뭐, 괜찮겠네. 비상계단 쪽에 스태프룸 있는 거 알지? 거기서 잘 말해주면 돼.”

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소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황급히 출입구 쪽을 보았지만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우주가 찾아 나서려는 그때 주머니에서 부웅 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폴더를 열었더니 소녀가 짤막하게 보낸 문자가 화면에 표시됐다.

<근처에서 쉬고 있을게. 일 다 보면 전화해.>

우주는 한숨을 돌리고는 다시 빈우를 돌아보았다. 빈우는 ‘어쩔 수 없네’ 라고 말하고 싶은 듯 살짝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주가 다가가자 빈우는 척 하고 손을 내밀었다. 우주는 순순히 휴대폰을 건네고 빈우가 번호를 등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휴대폰을 돌려주며 빈우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이번에도 제멋대로 잠수 타면 죽여 버린다, 진짜.”


15


엘리베이터가 12층에 가까워지자 우주는 회사 사람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새삼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빈우를 통해 미리 어색함을 덜어두지 않았으면 초조함이 겉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어쨌든 옷만 무사히 전해 주면 자신의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12층에 내려 비상계단 쪽으로 빙 돌아가자 예전과 마찬가지로 스태프룸 겸 조정실이 있었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네~” 하고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젊은 여자가 우주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시…”

젊은 여자는 인사를 하다가 우주의 얼굴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주 역시 상대방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소 분위기가 바뀌긴 했지만 틀림없었다. 일 년 반 가까이 같이 먹고 자며 타블렛 앞에 머리를 맞대고 씨름하던, 인생에서 가장 열정으로 불탔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함께한 상대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세빈아…”

“우주야!!!”

세빈은 달려들어 우주를 와락 껴안았다. 은비는 분명 자기 아빠가 옷을 갖다 줄 거라고 했기에, 우주의 방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넘치는 기쁨과 반가움에 세빈은 어쩔 줄 몰랐다. 누가 뭐래도 첫 게임을 함께한 사람이자 처음으로 짝사랑한 사람이 아닌가.

“정말 이게 얼마만이야, 왜 그 동안 연락 한 번 안 한 거야!”

“하하… 어쩌다 보니…”

우주는 그제야 빈우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심 우주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은 오늘 이곳에 오면서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있을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정작 누구보다 깊이 알던 사람을 둘이나 보게 되자 불편함보단 반가움이 더욱 컸다.

“그래서, 유 감독은 어디 있어?”

“헐, 이 사람 보소. 같은 팀원은 내팽개치고 썸녀부터 찾는 거 봐?”

세빈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짐짓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하하, 썸녀는 무슨…” 하며 우주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 안쪽에서 흠, 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났다. 우주는 그제야 안에 있던 남자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딱딱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인사에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버스터 걸즈의 총감독이자 오늘 행사의 책임자인 신하난 PD입니다.”

하난이 명함을 내밀자 우주는 깍듯이 받았다. 우주는 난처한 듯 말했다.

“강우주라고 합니다. 하하, 저는 드릴 명함이 없네요. 그냥 의상을 전달하러 온 퀵서비스 역할이라…”

“겸손해하실 것 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요.”

우주의 눈이 커졌다. ‘이 사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살짝 세빈을 곁눈질하자 그저 재미있다는 듯 싱글거리고 있었다.

“강우주, 최종 직위는 아트3팀 선임. 고졸 프로그래머로 입사하여 언리얼 엔진과 하복 엔진을 이용한 독자적이면서도 직관적인 코딩에 두각을 나타냄. 스피릿 스트림 개발 당시 아트팀으로 이적하여 세부 디자인과 설정에 관여, 사운드 팀과도 교류하며 각 파트의 의도를 최대한 살려 게임 엔진으로 구현하는 테크니컬 아티스트를 담당. 이십대 중반에 해외 업계인들에게 이름을 알린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육각형 전천후 개발자… 맞죠?”

우주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회사를 다닐 때 신하난이라는 이름은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장담컨대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약력을 줄줄 외우고 있으니 당황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하하… 전 그냥 월급쟁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요. 이제 없는 사람이라고 너무 거창하게 캐릭터가 남아 버렸군요.”

“저도 개발자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어줍지 않게 말하는 식으로 그저 립서비스용 찬사나 남발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를 뛰어넘는 게임을 만들고 싶은 사람의 입장으로선 더더욱 말입니다.”

하난의 눈빛은 진지했다. 우주는 차마 그를 똑바로 마주볼 수 없었다.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그런 마음을 잃어버렸다. 적어도 제나두워크스의 문을 나설 때부터 지금까지 또 다시 게임을 만들자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오늘도 어디까지나 일도 대신 의상을 전해주러 온 것뿐인데, 이제는 사실상 단절된 과거의 족적을 두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뛰어넘고 싶다고 말해 봤자 어떻게 답해 주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재밌는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우주가 입에 담을 수 있는 건 이 정도의 립서비스가 고작이었다. 하난은 싱긋 웃고는 우주를 모니터 앞으로 이끌었다.

“유 감독님이라면 예정에 없던 추가 근무로 전력투구하고 있습니다. 보시죠.”

우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무대에 선 은비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은비의 표정은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러나 미소를 잃지 않고 침착하게 MC를 진행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장대한 스케일로 이루어지는 이 회전은 특히나 저희 사운드팀은 물론 아트팀, 프로그래밍팀을 비롯한 전 파트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으며…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진행되는 은비의 MC에 맞춰 회장의 분위기도 다소 경청하는 자세로 보였다. 우주의 옆에 다가선 세빈이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전화위복이랄까, 텐션 높기로 유명한 준연예인 예나가 아니라 개발자이자 일반인인 유 감독님이라 오히려 분위기가 더 괜찮은 것 같아.”

“어차피 오늘 여기 온 청중 대부분은 제나두워크스가 아닌 작가님 팬이니까요. 방방 뛰며 분위기나 띄우는 사람보단 자기가 좋아하는 소설을 어떻게 게임으로 만들었는지 있는 그대로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더 신뢰가 갈 겁니다.”

하난이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우주는 두 사람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은비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은비와도 회사에서 같이 일했을 텐데, 생각나는 거라곤 자신을 피하는 모습뿐이었다. 어쩌다 일도의 집에서 얼굴을 마주쳤을 때도 은비는 우주와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얼굴에는 언제나 슬픔과 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은비는 지금 웃고 있었다. 행사 사회 같은 건 아마 해본 적이 없을 텐데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생기 있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 저것이 자신이 모르는 은비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은비가 마침내 진짜 모습을 찾아낸 것일까. 문득 우주는 자신도 잊고 있던,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있던 새 한 마리가 어느새 자라서는 가슴을 뚫고 푸드득 하고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우주의 눈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우주를 슬쩍 본 세빈은 하난이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손수건을 꺼내어 말없이 우주의 눈가를 훔쳤다.




일요일 점심 시간대의 미어터지는 국전 입구에서 살짝 떨어진 내부에는 벤치가 자리잡고 있었다. 소녀는 벤치에 뻗어서는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몸에 열이 올라 있는 마당에 놀라운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니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태미수. 결코 흔치 않은 이름이다. 하물며 작가의 이름이라면 소녀가 아는 한 단 한 명 뿐이었다. 그야말로 소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자, 평생을 건 맹세를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맹세대로라면 자신은 아직 그의 앞에 나타나선 안 된다.

티블리 안나에서 혹독한 시험을 받을 때도, 그 뒤로도 소녀는 몇 번이나 맹세를 깨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지만 그때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사람의 마음을 뛰어넘는 초인과 동일시하며 달랬다.

그렇게 소녀는 홀로서기를 하며 보금자리인 텐트에서 자신의 작품을 집필하는 데 열과 성을 다 했다. 그러나 현실은, 새로운 환경에서 소녀는 단 한 편의 완성작도 아직 내지 못한 채였다. 몸이 아파질수록 퇴근 후에 집필에 집중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요 일주일 동안 쓴 분량을 합해봤자 1,000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소녀는 자신의 무력함에 몸을 떨었다. 심지어 방금 전 우주와 낯선 여자의 대화를 듣고는 더욱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우주의 다정함과 그림을 통해 뿜어나오는 강렬한 표현력에 점점 이끌려 왔지만, 내심 그를 결국 개화시키지 못한 것이 결국 그의 한계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우주는 이미 프로 창작자로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고,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동료가 있다. 다름아닌 소녀의 소중한 사람의 작품을 게임으로 만든 회사에서 말이다.

"제일 하찮고, 이룬 것 하나 없는 반푼이는… 결국 나였구나."

소녀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실소했다. 부끄러웠다. 도저히 얼굴을 들고 하늘을 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두 번 다시 우주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치고 올라왔다.

그때였다. 소녀의 휴대폰이 띠링띠링 하고 울렸다. 폴더를 열자 우주가 보낸 문자가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미안, 볼일이 조금 길어질 것 같아. 식당가에서 밥이라도 먹고 있어.>

소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상대를 배려 안 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저지르는 건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란 생각이 가까스로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배라도 채우고 있자…’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좌우로 비틀자 관절에서 두둑 하고 소리가 났다. 동시에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피던 그 순간이었다.

“혹시 제나두워크스 분이신가요?”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목소리가 몇 미터 뒤에서 들렸다. 소녀의 심장이 크게 고동쳤다. 구 년 동안 들어왔으니 틀림없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사람이 바로 뒤에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다. 정말 잠깐이면 된다. 잠깐이면…

“…작가님이신가요?”

“네, 반가워요! 제가 태-”

“자,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시고요. 저는 제나두워크스의 고빈우라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하하, 목소리를 너무 낮추시네요…”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올라가시죠.”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의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소녀에게 들렸다. 여전히 소녀는 등을 돌린 채였다. 고개를 돌리고픈 충동을 늘 그랬듯 자신의 맹세를 환기시키며 억누르고 있었다. 띵동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말 조금만이라도, 조금만이라도… 나약한 인간이 삶의 원동력을 삼고자 잠깐 약속을 저버리는 게 그토록 안 되는 일일까? 염치가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 소중한 사람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게 누구란 말인가.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은 스스로의 이상에 털끝만큼도 못 미치는 철부지임을 날이 갈수록 실감하고 있었다.

생각이 거기에 차마 미치기도 전에 이미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바라본 순간, 절묘하게도 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솔직하게 보기나 할 걸 후회해봤자 씁쓸함만 배가될 뿐이었다.




우주와 세빈은 나란히 9층 매장을 걷고 있었다. 점포마다 피규어, 프라모델, 게임 등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몇 명씩 있었지만 그에 비해 조용한 분위기였다. 한 게임샵 앞에서 멈춰선 세빈은 우주의 팔을 붙들었다. 세빈이 바라본 대형 스크린에는 얼마 전 일본 N사에서 출시한 콘솔 게임의 PV가 나오고 있었다.

“이런 곳은 자주 다녀?”

세빈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우주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다지… 원래 게임을 그렇게 즐기지도 않으니까.”

“역시. 그래서 다들 너 보고 특이하다고 했잖아. 게임도 안 하는 녀석이 게임을 만들고 있다고.”

세빈은 우주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한때 회사에서 보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짬이 날 때마다 우주는 화집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필시 은비가 만든 곡이었겠지만 굳이 이름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래, 그때보다 실력은 나아졌겠지?”

“장난해? 이젠 내가 메인 디자이너야!”

세빈이 우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 너무 당연한 결과라 놀랍지도 않네.” 우주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세빈을 바라보았다.

세빈은 쑥스럽게 웃었다. 오래 전, 제나두워크스에 입사하자마자 스피릿 스트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당시, 그림이나 예쁘게 그릴 줄 알았지 랜더링이니 3D니 하는 개념은 어설프게만 알고 있던 그녀를 옆에서 딱 붙어서 가르쳐준 사람이 우주였다. 단순히 회사에서 함께 있는 시간만 비교하면 세빈이 은비의 몇 배는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빈은 우주의 친구를 넘어선 존재는 될 수 없었다. 우주와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팀원이자 남녀로서 공사로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어도 연인인 은비와의 사이에는 그런 것에 비할 수 없는 강한 유대가 있었다. 은비를 제외하면 우주와 이성으로서 가장 가까이 있던 여사친이란 위치는 전혀 자부할 것도 아니었고, 빈우가 있는 이상 자신이 유일한 것도 아니었다.

“스피릿 스트림도 출시했을 때 여기 걸려 있었어.”

“오… 하세빈 어깨 뽕 좀 들어갔겠는데?”

“바보냐? 주역이 없는데 내가 으쓱해서 뭐하냐?”

세빈은 볼을 부풀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주가 회사를 나간 건 출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스탭롤에 이름은 남았지만 연락이 두절되어 버려 이후 스피릿 스트림이 팬과 업계의 극찬을 받으며 제작진이 숱한 인터뷰를 하고 여러 시상식에 참여하는 영광의 순간들을 우주는 하나도 누릴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앞에서 사라진 우주를 어떻게든 머리로 이유를 만들어 이해하려다가 결국 단념하고는 가슴으로 원망하면서도, 자신의 영광스런 커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우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늘 세빈의 마음속에 있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나쁜 놈이라 치부하고 스스로 마음이 편해지기엔 그는 너무 상냥했다.

“있잖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세빈은 분위기를 환기하며 우주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래? 네 의사만 확고하면 내가 담판을 지어 볼게. 나 이제 그 정도 입김은 되거든.”

우주는 세빈을 돌아보았다. 삼 년 전까지 그녀를 대하던 익숙한 미소를 짓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세빈의 눈에 실망이 깃들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응?”

세빈의 말소리를 미처 못 들은 우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피러 자세를 낮춘 순간이었다. 세빈은 빠르게 손을 뻗어 우주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아히이이익!”

“이럴 줄 알았으면 얼굴 보자마자 옆구리나 꼬집어 버릴 걸!”

“그래서 지금 꼬집고 있잖아아학! 히힉!”

오늘은 이래저래 밀린 빚을 갚는 날이구나, 하고 우주는 고통 가운데서 생각했다.




일요일의 롯데월드는 예상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비 때문에 방문객들이 실내 시설로 몰리다보니 더욱 혼잡한 감이 있었다. 우주는 컨디션이 안 좋은 소녀가 미아가 될까 봐 손을 잡고 다니려 했지만 소녀는 한사코 뿌리쳤다.

“손잡는 게 서로 안전하다고. 몸도 안 좋은데 내 페이스 놓치면 어떡할래?”

“글쎄 괜찮다니까,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픈 사람은 몇 살이든 상관없이 노약자랑 다를 바 없어. 이럴 땐 얌전히 말 좀 들어.”

우주는 질린 듯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타일렀다. 소녀는 시선을 살짝 피하며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은근히 강하게 나온다? 내가 쉽게 보이게 됐나 보네.”

“쉽게 보이는 게 아니고 불안해 보여서 그런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고민 중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야!”

“그럼 얌전히 인솔자의 지시를 따르세요.”

우주는 소녀의 손을 낚아채듯이 잡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녀는 못 이기는 척 뒤를 따랐다. 기분 탓인지 컨디션 탓인지 앞서 가는 우주의 등이 평소보다 넓고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정말, 사람의 마음이란 건 어쩔 수 없구나…’

소녀는 지금까지 책에서 무수히 많은 사랑 이야기를 읽어 왔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응원하고 싶고, 때로는 잔혹함마저 느껴지는 마음의 행방에 곧잘 감정을 이입하면서도,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결말을 정해 놓은 이야기에서 사랑은 존재만으로 사람과 배경을 정서라는 색채로 수놓는다. 그것은 때로는 환희요, 때로는 애절함이요, 때로는 절망이다. 그러나 동일한 색상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듯, 누군가의 환희가 다른 누군가에겐 절망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은 절망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기쁘게 받아들이리라.

“그 인솔자께서 한 시간 가까이 날 방치했던 것 같은데~?”

소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짓궂게 말했다. 우주는 대꾸하지 않은 채 걸어갈 뿐이었다.

“대체 옛날에 뭘 하고 다녔기에 그렇게 인기가 많아? 기본적으로 난봉꾼은 신뢰가 안 가는데~”

“쓸데없는 말이나 하는 거 보니까 괜찮나 보네.”

우주는 돌아보지도 않고 핀잔을 주었다. 아까 한사코 뿌리칠 때도 그렇고 확실히 평소보다 몸에 힘이 없는 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자극적인 어트랙션은 금물이라고 생각하며 우주는 앞에 보이는 회전목마로 소녀를 이끌었다.


회전목마에서 내리자마자 주저앉은 소녀를 들쳐업고 우주는 의무실을 찾아갔다. 해열제를 먹고 눕자마자 소녀는 곤히 잠들었다. 우주는 옆을 지키며, 소녀가 일어나는 대로 곧바로 귀가하기로 결심했다. 소녀의 몸 상태로 이 정도면 강행군이 되고도 남았다.

약을 먹기 전 38.1°를 찍던 소녀의 체온은 한 시간쯤 지나자 37.5°까지 떨어졌다. 우주는 잠자코 이마의 물티슈를 갈고 있었다.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좀 괜찮아졌어?”

“…아까보단 낫네.”

소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쉬고 이제 집에 가자. 다음에 또 데려다줄게.”

“다음은 없어. 그래서 이렇게 온 거야.”

소녀는 우주의 눈을 응시하며 또렷하게 말했다. 우주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멀뚱히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소녀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인기척을 느끼고 온 의무요원에게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우주가 행거에 걸려 있던 잠바를 챙겨 뒤따라 나오자, 소녀가 천장 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시선을 따라간 우주는 가장자리를 따라 도는 풍선 모양의 놀이기구를 발견했다. 우주는 소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저거 타고 싶어?”

“…응.”

“저거 서서 타야 돼. 괜찮겠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는 쐐기를 박듯 목소리를 살짝 낮추어 물었다.

“기다리는 시간만 한 시간인데? 괜찮겠어?”

“응. 저것만 타게 해 줘. 어차피 저녁 근무하려면 다른 건 타지도 못해.”

‘그 몸으로 롯데월드를 갔다 와서 일까지 한다고?’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우주는 애써 억눌렀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봤자 분위기를 망칠 뿐이다. 우주는 소녀의 손을 잡고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날아라 풍선, 뾰로롱~”

안내원의 경쾌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전해졌다. 우주와 소녀는 줄을 선 지 삼십 분 만에 탑승할 수 있었다. 제일 인기 있는 어트랙션이라 나름 오래 서 있을 것을 각오한 것에 비하면 운이 좋았다. 기구는 천천히 천장의 레일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주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6층 높이에서 보는 실내 전경은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역시 불이 들어오는 야간에 비하면 아쉽게 느껴졌다. 문득 돌아보자 소녀는 내려다보는 데는 관심도 없는 듯 어린이용 받침대에 앉아 있었다. 우주가 소녀를 독려하고자 몸을 숙이려 한 순간이었다.

“우주 씨. 마지막으로 이곳에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소녀의 말에 우주는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런 우주를 내버려둔 채 소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구를 타는 약 14분 동안 계속된 소녀의 말은 우주의 귀를 스쳐 지나갈 뿐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주는 머릿속이 그저 충격으로 하얗게 된 채 멍하니 서서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기구가 플랫폼에 거의 다다르자, 소녀는 받침대를 딛고 올라서서는 우주의 머리를 살며시 붙들었다. 소녀는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를 말했다. 이윽고 눈을 감고는 우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일 분 정도의 키스 후 얼굴을 뗀 소녀는 재빨리 등을 돌려 박수를 치는 대기자들을 뒤로 하고 뛰쳐나갔다. 우주는 멍하니 있다가 안내원의 재촉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기구에서 내렸다.

우주는 출구 쪽으로 뛰며 다급히 소녀의 모습을 찾았다. 그런 몸 상태라면 그렇게 빨리 나가진 못했을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어 소녀의 번호로 걸었지만 이미 전원을 꺼 놓은 상태였다. 잠실역 쪽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우주는 소녀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우주는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문득 아까 줄을 서 있는 동안 소녀가 안내도를 유심히 보던 게 생각났다. 소녀는 거기서 남문의 존재를 파악하고, 풍선비행에서 남문까지의 최단 경로를 외워 두고, 자신을 당황시켜 놓고는 도망친 것이다.

우주의 머릿속엔 소녀가 키스 직전 눈물을 머금고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만약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 우주 씨가 날 붙든다면, 난 그대로 우주 씨에게 날 바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 왔어요, 언니! 이제 정신 좀 차려 봐요!”

“으음… 으으음…”

택시에서 내린 은비는 미수의 오른팔을 붙들며 귀에 대고 소리쳤다. 미수는 인사불성이 되어 그저 아기처럼 목소리에 옹알이로 반응할 뿐이었다. 미수의 왼쪽에 타고 있던 하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은비는 조심스럽게 미수를 차에서 내려놓기 시작했다. 미수가 청바지를 입고 있는 덕에 왼손으로 허리춤을 붙든 채 비교적 손쉽게 몸을 밖으로 뺄 수 있었다.

잠시 후 하난이 미수의 왼팔을 부축하며 나와서는 운전석에 대고 면목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문을 닫기 전 기사가 혀를 쯧쯧 찬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그렇지, 해도 안 진 시간에 저렇게 잔뜩 취해서는…’

하난은 물끄러미 미수를 바라보았다. 미수는 얼굴이 벌개진 채 이따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두 시간 전, 판교역 근처 치킨집에서 하난, 은비, 세빈, 빈우 그리고 미수는 뒷풀이를 가졌다. 근처에 방을 얻어 살고 있는 세빈과 빈우는 거리낌 없이 맥주를 부어넣었다. 역 세 개 정도 떨어진 데 사는 하난은 대리운전을 부를 생각을 하며 적당히 마셨고, 원체 술을 그다지 즐기지도 않고 집도 먼 은비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정작 차를 안 끌고 와 장시간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야 하는 미수는 끝장을 볼 기세로 마셔댔다. 위기를 느낀 하난과 다른 직원들이 더 이상 잔을 권하지 않자 냅다 병을 가로채서는 자작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모텔에 던져 놓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데려가는 것도 보기 안 좋았다. 회사 휴게실은 말도 안 되었다. 성별로 보나 친분으로 보나 결국 은비네 집에서 재울 수밖에 없었다. 우산을 늦게 펴느라 온몸이 다 젖은 하난은 약오르다는 듯 부축하고 있던 미수의 팔뚝 안쪽을 꼬집었다. 미수는 “으으으응…” 하며 살짝 몸부림치더니 이내 얌전해졌다.

“이 양반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을 거예요.”

“그러게요. 저도 언니 눈 풀릴 때부터 각오했어요.”

은비는 맞장구치며 대문을 따고 앞서 들어갔다. 하난은 미수를 부축한 채 은비의 집 외부를 찬찬히 보았다. 꽤 낡은 감이 있는 단층 단독 주택이었다. 마당에는 조경에 쓰일 법한 기구들과 묘목이 심긴 화분들이 가득했다. 슬슬 해가 질 시간인데 집안의 불은 꺼져 있었다.

“아빠는 아직 안 돌아왔나 봐요. 어서 들어오세요. 발밑을 조심하시고요.”

은비는 현관문을 따고 조심스럽게 미수를 앉히려는 시늉을 했다. 하난은 곧바로 눈치 채고 은비에 맞춰 몸을 낮추고는 미수의 구두를 벗기고는 자신도 신발을 벗었다. 

자신의 방까지 둘을 인도하고는 은비는 전등을 켰다. 침대를 보자마자 은비와 하난은 약속이라도 한 듯 미수를 패대기치다시피 내려놓았다. 하난은 헐떡거리며 축축한 정장 상의를 벗었다.

“어휴, 뭘 먹어서 이렇게 무거워?”

은비는 풉 하고 웃음이 터지는 걸 억눌렀다. “주스라도 내 올게요. 편하게 있으세요.” 은비는 하난의 옷을 옷걸이 용도로 대충 박은 못에 걸고는 부엌으로 나갔다. 하난은 침대 옆 바닥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야마하 전자피아노를 빼면 딱히 음악을 연상하게 하는 가전은 보이지 않았다. 책상에는 델 노트북과 AK 헤드셋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흔한 상장도 트로피도 하다못해 개인 사진도 없었다. 다만 벽장 가득 진열된 CD가 이 방의 주인이 음악에 관해 모종의 고집이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였다.

20대 여자의 방이라기엔 벽지도 하늘색의 단색에 화장대는 물론 흔한 전신 거울 하나, 인형 하나 없는 게 살풍경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차라리 단기로 빌린 오피스텔이라 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었다. 하난은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며 생각했다.

‘CD라도 없었으면…’

“CD라도 없었으면 무슨 쫓겨 다니는 사람 방인 줄 알겠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하난은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미수는 대자로 누운 채 고개만 돌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하난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뭐예요, 처음부터 안 자고 있었어요?”

“오빠가 나 꼬집을 때 깼어. 맘에도 없는 여자한텐 막 대한다 이거지?”

“뭔 또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난은 말을 얼버무리다시피 끊으며 고개를 돌렸다. 미수는 하난의 뒤통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그 사이에 감정이 식기라도 했어?”

하난은 아무 대꾸도 없이 그저 애꿎은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미수는 혀를 끌끌 차고는 몸을 돌려 눈을 감았다. 거의 동시에 은비가 주스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

“오늘은 예상도 못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네요. 행사 MC를 맡은 것도 그렇고, 방에 손님을 들인 것도… 청소를 안 해놔서 조금 민망해요.”

“작가님이 꽐라가 된 게 잘못이지, 유 감독님이 민망해할 것 없어요. 청소를 안 했단 것치고는 방이 워낙 깔끔해서 놀랐어요.”

은비는 머쓱한 듯 주스를 홀짝거릴 뿐이었다. 그대로 일 분 정도 침묵이 이어졌다. 견디지 못한 하난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벽장의 CD들을 왼쪽부터 훑기 시작했다. 영국 록밴드로 추정되는 음반, 팔구십년대에 유행한 유로비트와 하이에너지 장르 음반, 일본 동인 시장에 정기적으로 출품되는 테크노 트랜스 음반에 비교적 최근에 나온 국내 아이돌 음반까지 다양한 음반들이 뒤섞여 있었다.

“음악 취향이 참 다양하시네요. 이걸 전부 CD로 들으시는 거예요?”

하난의 질문에 은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전부 아빠 거예요. 저 보고 쓰라고 방에 벽장을 설치해 놓고는 결국 자기가 전부 쓰고 있네요. 저는 들을 음악이 있으면 파일이나 스트리밍 서비스로 들어요. CD로 듣다가는 언젠가 파손되니까요.”

이건 또 작곡가의 입에서 나오는 말 치곤 꿈과 희망에 대한 막연한 한 줄기 기대조차 부수는 현실적인 발언이었다. 정신이 살짝 어지러워진 하난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차라리 벽장을 아버지 방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찬 딸의 방에 개인 물품을 놔두고 왔다갔다하는 건…”

“노크하고 들어오니까 상관없어요. 저도 필요한 자료 있으면 아빠 방 들락거리고요.”

은비의 대범함을 넘어 자연스러운 태도의 발언에 하난은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래, 뛰어난 창작자는 반드시 자신만의 침범 받지 않는 성역이자, 보물창고이자, 영감의 원천이자, 미학을 고스란히 투영한 공간이 있다는 거야말로 고정관념이 아닌가. 이미 회사에도 작업실이 있는데 굳이 주거 공간까지 작업실처럼 꾸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뭐 사실 안 그래도 좁은 방에 저런 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서 몇 번 볼멘소리를 하긴 했는데요, 저거라도 없으면 병실이나 수인실과 다를 게 뭐냐며 밀어붙이더라고요.”

은비의 체념하는 말을 들으며 하난은 살며시 본 적 없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연민을 느꼈다. 은비가 사회인으로서 이날 이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온 데엔 그의 헌신과 희생이 평균 이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감히 짐작하며.

하난은 단숨에 주스를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내일 봅시다.” 은비가 배웅하러 뒤따라 일어나는 것을 손짓으로 만류하고는 하난은 빠른 발걸음으로 나갔다.

당장이라도 넘쳐흐를 듯 위태위태해 보이는 그녀를 지지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녀가 자신이 없으면 무너져 내릴 정도로 약한 인간인가. 이 마음이 순수한 호의인지, 아니면 그녀를 갖고 싶은 욕심을 정당화하는 명분인지 자신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이 자리에 더 있다간 자신의 욕망이 흘러넘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오후 6시를 앞두고 미주는 사무실에서 반장과 함께 월말 보고서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통은 반장이 마지막 주에 들어서서 작성에 돌입하면 목요일 즈음부터 미주가 합세해서 매일 잔업을 하며 마무리하는데 이번 달에는 아예 미주가 먼저 작성을 시작했다.

반장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자 미주는 “인력도 충원됐으니 제가 매장에 오래 있어봤자 시간만 축내는 거거든요. 그럴 바에는 반장님 일 돕는 게 효율적이에요.” 하며 평소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넘겼다. 그러나 그건 반쪽짜리 이유였다. 미주의 직위와 연차면 한 군데에 붙어서 진득하게 작업을 하기보단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손님의 클레임을 접수하고 요소요소의 점검을 하는 게 자연스러웠고 그러자면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주임님, 오늘 입고된 물량 체크 끝났습니다. 고래밥이 한 박스, 새우깡이 두 박스 덜 왔습니다. 나머지 과자류하고 유제품류는 수량 맞습니다.”

유니폼의 소매를 걷어붙인 채 이마에 땀이 송골하게 맺힌 승완이 들어와 입고확인서를 내밀었다. 미주는 승완과 눈을 맞추지 않고 서류의 항목들을 확인하고는 결재란에 서명했다. 그리고는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반장에게 갔다.

“반장님, 확인 부탁드릴게요.”

“예~ 승완 씨는 정말 빨리 일을 배우시는 것 같네요.”

서류를 받아든 반장은 승완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승완이 입사하고 며칠 정도 여기저기서 일을 시켜본 뒤 미주는 반장에게 그를 창고 관리에 배속시킬 것을 권했다.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일을 책임감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이자 실제 미주가 십오 년 동안 보아 온 승완의 됨됨이였다. 그러나 어찌 됐든 승완과 얼굴을 마주하기가 거북한 건 분명했고, 창고에 붙여 놓으면 그만큼 매장에서 맞닥뜨릴 일이 적어질 거라는 게 미주의 본심이었다.

자기보다 스무 살은 어린 사수 겸 담당자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며 승완은 철저히 아랫사람의 입장을 지켰다. 승완이 맘에 든 담당자는 사흘째 되는 날 재고를 파악할 것을 지시했고, 승완이 창고 가득 쌓인 상품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걸 보고 곧바로 지게차 운전과 창고 관련 서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람이랑 거의 안 마주치면서도 무거운 박스를 숱하게 옮겨야 하는 일이라 오랫동안 책상 일만 하신 분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강 주임님이 역시 저보다 사람을 잘 보나 봐요.”

반장의 말에 승완은 겸연쩍어하며 고개를 숙였고, 미주는 조용히 웃었다. 승완은 편집장의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팔굽혀펴기나 스쿼트 같은 맨손 운동을 하던 사람이다. 동년배 중에서도 체력으로는 상위권에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매를 걷어붙인 승완의 팔은 방금까지도 힘쓰는 일을 했는지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 있었다.

흘끗 그를 본 미주는 불현듯 다시 옛날 생각이 날 것 같았다. 미주는 승완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일요일인데 이만 자리 정리하고 퇴근하세요.”

승완은 잠시 주춤거리더니 “네, 들어가 보겠습니다.”라 조용히 인사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미주는 뒷목을 주무르며 정신을 다잡고는 다시 보고서 작성에 집중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까부터 마음은 이미 집에 가 있었다. 월말만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퇴근해서 우주를 앉혀놓고 오늘 있던 일을 저녁 반찬으로 삼았을 것이다. 소녀하고 어떤 어트랙션을 탔는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고백은 했는지 같은 여느 가정의 흔한 팔불출 엄마 행세를 했을 것이다.

‘…너무 늦은 건 세상에 없으니까, 그렇지?’

우주에게 그런 일상을 되찾아주기 위해, 미주 자신이 그런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작가 강미주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단절되고 망각되어야 한다. 그것이 미주가 그 날 이후로 지켜온 격률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승완의 마음도, 소녀의 동경도 기꺼이 내칠 수 있었다.




은비는 눈을 감은 채 북유럽의 이름 모를 숲속을 여행하고 있었다. 시냇물은 때로는 유유하게, 때로는 거칠게 피아노의 음색을 한 채 흘렀고, 토끼와 여우는 이곳저곳에서 얼굴을 숨겼다 드러냈다 하며 클라리넷 소리로 곱게 울었다. 은비의 마음은 점차 숲처럼 고요하면서도 차분해졌다. 이윽고 소나타의 숲은 표변하여 봄비를 머금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냇물은 찰랑거리고, 동물들은 커다란 힘을 감지한 듯 앞다투어 모습을 감추었다.

“와앗!”

누군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어깨를 치는 바람에 라흐마니노프의 숲은 은비의 눈앞에서, 심상 속에서 빠르게 사라져갔다. 은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헤드셋을 벗었다.

“술 다 깼어요? 그럼 빨리 돌아가요.”

뒤도 안 돌아보고 은비가 축객령을 내리자 미수는 “와, 동생 너무 쌀쌀맞은 거 아냐?” 하며 짐짓 토라진 척을 했다. 은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수에게 계속 핀잔을 주었다.

“저는 월요일에 출근하는 ‘직장인’이거든요. PD님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배 째라 식으로 인사불성이 되면 결국 우리 보고 뒤치다꺼리하란 거잖아요.”

“…화났어…?”

“화낼 기운도 없어요. 술 덜 깼으면 얌전히 거기서 자요. 전 시간 되면 거실에서 잘 테니까.”

미수는 “쳇” 하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은비는 질렸다는 듯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리고 헤드셋을 끼려 했다.

“은비야, 은비야!”

미수가 부르는 소리에 은비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의자를 뒤로 돌렸다. 미수는 베개를 꼭 끌어안고는 눈을 반짝거리며 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서 그러는데, 오늘 언니랑 같이 자면 안 돼?”

은비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손에 든 헤드셋을 던지는 시늉을 하자 미수는 재빨리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은비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행사는 무사히 마쳤잖아요?”

미수는 천천히 베개를 내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봤던 쓸데없이 밝고 텐션이 높은 얼굴과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은 몇 번 본 적이 없다 보니 그녀의 눈을 보는 건 아직 조금 낯설었다. 살짝 우울한 빛을 띤 눈동자는 은비가 방금까지 듣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을 연상케 했다.

“응, 행사 때문이 아니고…”

미수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이내 은비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내 동생이 거기 있었던 것 같아서.”

은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동생이 있었다고?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무슨 까닭인가?

“사실은 나, 여동생이 있어. 조금 터울이 큰.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못 했어.”

미수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은비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반년 전, 그 애는 집을 나갔어. 편지 한 장만 남겨 두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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