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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an 31. 2024

사랑, 때때로 구원

봄 (4)



16     


가장 오래된 기억은 또래 아이들 몇 명에 둘러싸여 동화책을 읽어 주는 원장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도 엄마의 얼굴도, 아빠의 목소리도 남아 있지 않다.

부모의 품에서 그들과 주파수를 동조시키며 원초적인 자아를 형성할 시기에, 나를 낳은 정체 모를 자들은 일찌감치 보육원 문 앞에 나를 버리고 갔다고 한다.

처음부터 있던 적이 없는 셈인 부모에 대한 그리움도 원망도 나는 없었다. 적어도 나를 비롯한 보육원 아이들에게 부모란 실재가 아닌 개념에 불과했고, 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스스로의 처지를 비교하며 불행을 곱씹기에는 난 너무 조숙했고 원장의 사랑은 넘치도록 컸다.

네 살 때 한글을 뗀 나는 잡히는 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모두 읽었다. 역사, 철학 같은 인문학부터 경제, 정치 등 사회과학과 화학, 생물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책을 통해 인류가 이끌고 또 끌려 온 전 방위의 맥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심장을 뛰게 하는 책들은 언제나 소설이었다. 나이를 먹으며 그것들이 한국어로 번역된 판본임을 의식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원본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게 되었다. 한쪽에 사전을 낀 채 원장이 어렵게 구해 준 영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으로 이루어진 원서들을 책등이 뜯어질 때까지 정독하다보니 여러 외국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방 안에서 홀로 지적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사이, 같이 있던 아이들은 하나둘 입양되어 갔다. 딱히 외로워지거나 조바심이 들지는 않았다. 애당초 입양되고픈 마음도 없었고, 성년이 되면 혼자 무슨 일을 해서든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만약 원장만 괜찮다면 필요한 자격을 이수해서 교사가 되어 돌아와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원장이 마침내 나에게 입양 건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자 원장은 눈을 감고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이곳은 네가 성년이 되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지, 평생 있을 집 같은 게 아니라고.

처음으로 원장에게 대들었다. 누가 지금 빌붙어 살겠다고 이러는 줄 아느냐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 될 자신이 있고 얼마든지 이곳에 도움이 되어줄 수 있다고. 나중에는 무릎을 꿇고 다리를 붙들며 사정했다. 뭐든 할 테니 제발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원장은 가늘게 한숨을 쉬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버리는 게 아니란다. 단지 더욱 넓은 곳에서 더욱 큰 역할을 하며 더욱 행복해지길 원할 뿐이란다. 기억해 두렴. 사람은 예상보다 훨씬 더 자신 바깥의 환경에 의해 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질 수 있단다.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내 말을 금방 깨닫게 될 거란다.”

일주일 후, 원장이 불러서 간 응접실엔 나이 지긋한 부부가 앉아 있었다. 자신들의 직업을 고고학자라 소개한 부부는, 마음에도 없는 입양 대면으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 똑똑한 아이라고 들었단다. 지적인 면에서는 어지간한 어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말이다. 그런 부분은 굳이 우리가 돌봐 주지 않아도 넌 무섭게 성장할 거야. 하지만 때로는 네가 보기에 뻔하고 우스꽝스러운 사소한 일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단다. 우리 역시 그런 마음으로 고대의 유적들을 발굴하고 있거든.”

정말이지 기세만 좋지 알맹이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운문이었다. 그러나 부부는 자기들 딴에는 멋진 말을 했다며 서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원장이 다급히 외치는 소리를 무시한 채, 마을로 도망갔다. 모든 게 다 꼴 보기 싫었다.

반나절 만에, 나는 돈이 없는 열 살짜리 여자아이의 무력함을 실감했다. 배가 고파도 뭘 사 먹을 수 없었고, 목이 말라도 뭘 마실 수 없었고, 졸리고 피곤해도 하다못해 롯데리아에서 콜라 한 잔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운이 나빴던 건지, 너무나도 당연해서 말해 주지 않았던 건지, 수년간 책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맨몸의 인간의 약함’을 가출한 지 열두 시간 만에 깨닫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보육원을 떠나는 것만은 싫었다. 이대로 돌아가 봤자 원장은 자신을 어떻게든 입양시켜 내보내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원장이 자신이 사라진 걸 걱정해 뜻을 거둘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 순간 바로 두 블록 앞의 후미진 곳에 작은 편의점이 보였다.

열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도둑질을 떠올릴 수 있냐고 묻는 순진한 사람들은 지구 어딘가에서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살기 위해 권총을 뒷주머니에 넣고 마약을 판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하자. 마음을 허락한 환경을 하루아침에 박탈당한다는 건 성장기의 아이에게는 특히나 충격적인 사건이다.

나는 근처를 서성이며 편의점의 동태를 살폈다. 밤 열두 시가 되자 카운터의 사람이 청년에서 중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허기와 갈증은 슬슬 한계에 달해 있었다. 잠시 후 이십대쯤으로 보이는 네다섯 명의 그룹이 술을 마신 듯 상기된 얼굴로 고성을 지르며 가게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들의 뒤에 잘 숨어들어간다면 무리 없이 식량을 훔쳐 도망칠 수 있다는 계산이 났다.

맨 마지막 사람이 들어가고 약 1분 후, 나는 살금살금 문을 열며 들어갔다. 두어 명은 벌써 물건을 골라 계산대 앞에 있었다. 직원은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빵과 과자 열 개 남짓을 집어 들고는 뒤도 보지 않고 가게 밖으로 도망쳤다. 한 이십 발자국 쯤 뛰었을 때 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직원은 큰 소리로 외쳤다. “사장님!”

그러자 갑자기 내 옆에 있던 가게에서 아까 전까지 카운터를 지키던 청년이 뛰쳐나왔다. 나는 그제야 함정에 걸린 걸 깨닫고 끌어안고 있던 식료품들을 내팽개치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나 방에서 책만 읽던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혈기왕성한 청년 남성을 따돌리는 건 무리였다. 백 미터도 못 가서 나는 붙들려 왔고, 어느새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했다.

나는 나를 신고한 어른들과 분리된 채 경찰차를 타고 갔다. 조수석에 탄 경관이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품속의 사진과 대조하고는 어딘가로 전화했다. 부끄러움에 당장 차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뒷좌석에는 손잡이도 없었다.

경찰서에는 이미 원장과 그 부부가 와 있었다. 나는 차마 원장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원장은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쌀쌀맞게 말했다.

“나가거라. 네 짐은 전부 문 밖에 버렸으니 알아서 가져가든 말든 해라.”

그러더니 자신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눈이 동그래진 부부에게 말했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이런 고삐 풀린 망아지인 줄 모르고 제가 이날 이때껏 사람처럼 키웠군요. 입양을 가 봤자 금세 또 사고나 칠 겁니다. 이번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하시죠.”

그러자 남편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비죽비죽 흘리던 나에게 다가와 폭 끌어안고는 귀를 막았다. 손바닥과 귀가 맞닿아 웅웅거리는 가운데 몇 마디씩 “…저희 딸을 대신해 사과…” “…얼굴 보기 싫으니 필요한 서류가 있으면…” 등의 말소리가 들렸다.

부부는 곧바로 나를 차에 태워 집으로 향했다. 정원이 딸린 아담한 주택은 깜깜한 밤이어도 왠지 모를 운치와 정감이 느껴졌다. 내가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린 기색을 보이자 남자는 나를 들쳐 업었다. 지치기도 지쳤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자 남자가 말했다.

“당장 우리를 아빠나 엄마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단다. 다만 앞으로 이곳이 네 집이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으면 좋겠구나. …그래, 가족이라는 게 부담이 된다면, 우리와 이 집을 그저 이용한다고 생각하렴. 알겠지?”      



     

그렇게 그 아이는 우리 집에 왔어.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어느 봄날 늦은 밤이었지.

아침부터 종일 밖에 나가 있던 부모님을 올려보내고는 그 아이에게 라면과 반찬 몇 가지를 차려 줬어. 다 먹으면 싱크대에 대충 담가 놓고 올라오라고 했지.

혼자 먹게 내버려 두고 책을 보는데 삼십 분이 지나도록 얘가 올라오지 않는 거야. 밥이라도 찾는 걸까 싶어 내려갔더니, 식탁 의자를 싱크대 앞으로 끌어와서는 딛고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더라고.

그 뒤로도 그 애는 그런 식이었어. 부모님은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나에게 “동생을 잘 부탁한다”며 어깨를 토닥였지.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 애초에 밖에서 흙 파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부부가 입양을 해 봤자 돌보는 건 장녀의 몫이거늘, 정작 내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으니까.

그 아이는 올 때부터 그런 사실을 깨닫고 있었는지, 나에게 다가오지 않은 채 손에 걸리는 집안일은 전부 했어. 나 역시 그 애에게 말 한마디, 눈빛 한번 주지 않았어. 허드렛일을 시키지도 않았지만 혼자 하고 있는 걸 말리지도 않았어.

걔는 내 눈치를 보느라 그랬던 게 아니었어. 내가 거실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어도 그 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갰어. 마치 그게 이 집에서의 자신의 역할이고, 따라서 딱히 나를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듯 말이야. 아이가 아이답지 않게 구는 그런 상황을 난 애써 외면하고 있었어.

가끔 부모님이 돌아와 같이 식탁에 앉을 때 둘이서 잘 지냈냐고 물으시면,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둘이서 집안일도 하고 밥도 해 먹는다고 거짓말을 했어. 실제로는 집안일은 그 애가 다 하고 있었고, 밥은 내가 그 애 몫의 용돈까지 쓰며 밖에서 사 먹을 때 걔는 혼자 지어서 몇 안 되는 반찬을 놓고 먹고 있었는데.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만 했어.

그 애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딱 하나였어. 부모님이 거의 집을 비우다 보니 우리 집은 소위 노는 친구들의 아지트처럼 되어 있었어. 일주일에 한두 번 친구들이 오는 날이면 난 그 애에게 간신히 차비나 될 정도의 돈을 주며 밤 열한 시 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 어딜 갔다 올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어질러진 집의 청소는 당연한 듯 밤늦게 들어온 걔에게 떠넘겼고. 정말이지 못돼먹은 언니였어.

열일곱 살 먹고 처음으로 생긴 피가 이어지지 않은 열 살짜리 동생을 무조건 수용하기엔 나나 걔나 자기만의 삶을 오래 살았고 머리가 클 대로 커진 상태였어.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 ‘지금까지의 삶을 방해 안 할 테니 나한테 간섭하지 마’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고, 나는 제멋대로 단정해 버렸어. 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집이나 다름없던 보육원에서 하루아침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나온 아이의 고독함과 배타성을, 가족은 단순히 주거 공간을 공유하는 형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 날도 나는 그 애에게 늦게 들어오라고 했어. 그런데 자정이 지나고, 새벽 두 시가 지나도록 얘가 돌아오지 않는 거야. 순간 얼마 전에 동네에 성범죄 전과자가 전입해 왔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은 게 생각났어. 스스로의 무신경함을 자책하며 나는 밤거리로 뛰쳐나갔어. 그 애가 갈 만한 곳을 모르니 그저 정신없이 뛰어다닐 뿐이었어.

한참을 찾다 보니 하늘은 어느새 동 트기 직전까지 밝아 있었어. 거리가 환해질수록 내가 저지른 잘못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어. 어느새 마을에서 제일 큰 종합병원까지 다다른 나는 절망에 빠진 채 벤치에 앉아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어. 그때였어. 누군가 내 앞을 지나가다가 멈춰 서서는 내 어깨를 톡톡 쳤어. 고개를 들었더니 한 노파가 내 얼굴을 유심히 보고는 이윽고 입을 열어 “…혹시 태미수 양?” 이라 물었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내 팔을 끌고는 응급실로 데려갔어. 거기엔 얼굴엔 멍이 들고, 머리엔 붕대를 한 채, 한쪽 다리엔 깁스를 한 그 아이가 링거를 꽂은 채 자고 있었어. 노파는 자신을 그 애가 얼마 전까지 있던 보육원의 원장이라 소개하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줬어.

도서관에서 밤늦게 돌아오던 그 아이에게 뒷골목에서 걸어 나온 얼근히 취한 성인 남자가 말을 걸었어. “아저씨가 맛있는 거 줄게” 하며 손짓하자 반사적으로 그 사람의 발목을 봤고, 바지 왼쪽 발목에 무언가가 튀어나온 걸 놓치지 않았어. 무시한 채 걸음을 재촉했더니 남자는 그 아이의 팔을 붙들고 억지로 데려가려고 했어. 그 아이는 온 힘을 다해 뿌리치고는 악을 고래고래 지르며 손에 잡히는 건 책이고 벽돌이고 닥치는 대로 휘두르고 던지며 저항했어.

행인의 신고로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누가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나 봐. 정확히는 그 아이의 판정승이었지만. 머리를 맞아 뼈에 금이 가고 한쪽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눈이 돌아간 채 상대 남자의 얼굴을 벽돌로 찍고 있는 걸 경찰도 간신히 말렸대.

그런데 이 아이가 병원에 실려 와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느라 신원조회를 못하고 있었대. 정신적인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실어증에 걸렸을 수도 있어서 경찰도 고민에 빠져 있던 차에 교대 겸 무슨 일인가 알아보러 온 경관이 얼마 전 경찰서에 붙들려 온 그 아이의 얼굴을 알아본 거야. 그래서 곧바로 보육원장과 우리 집에 연락했고, 와서 상황을 파악한 원장은 전화를 받을 리 없는 나를 부르러 우리 집에 직접 찾아오려다가 병원 앞에서 맞닥뜨린 거고.

나는 곤히 자는 그 아이 옆에서 뜬눈으로 아침까지 지샜어. 점심쯤 다급히 온 부모님은 척 보기에도 한숨도 못 잔 채 정신이 빠져 있었어. 나를 본 엄마는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뺨부터 때렸어. 아빠는 엄마의 어깨를 붙들고 만류하면서도 나를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우리 셋은 그 아이 앞에서 말없이 한 시간 정도를 앉아 있었어. 침묵을 깬 건 아빠의 말이었어. “너한테만 책임을 묻는 것도 어불성설이긴 하지. 기껏 아이를 맡아 놓고 탐사니 발굴이니 하며 집을 비워 놨으니.” 뒤이어 아빠는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남은 탐사 일정과 이후 예정되어 있던 일정들을 모조리 취소했다고 밝혔어. “그거 국비지원 연구로 선발돼서 하던 거잖아…! 나중에 하려면 사비를 들인다 해도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고?” 내 말에 엄마는 목소리를 낮추라고 눈짓을 보내고는 “가족보다 중요한 연구가 있을 리 없잖아.”라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어. 그리고 이 일은 그 아이에겐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기로 했어.     




눈을 뜨자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언니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언니는 나를 와락 안으며 흐느꼈다. 간밤의 혈투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 감당하기엔 과분한 포옹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으윽!…” 하는 신음 소리가 올라왔지만 척 봐도 분위기를 깨는 짓이란 생각에 간신히 억눌렀다. 언니는 연신 “미안해… 미안해…” 하며 눈물로 내 어깨를 적셨다.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오자 여러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우선 엄마와 아빠가 늘 집에 있었다. 가끔 학교에 강의를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일은 있었지만 하루 이상 집을 떠나 있는 일은 없었다. 언니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돌아왔다. 더 이상 언니가 옆을 지나갈 때 술이나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유흥에서 멀어지다보니 기존의 친구들과도 멀어진 결과였다.

집안의 가사는 철저히 당번제로 분담되었다. 다 함께 하는 일요일 대청소를 제외하면 아침 ・ 저녁 식사 준비 및 뒷정리, 1층 청소, 그리고 2층 청소를 돌아가며 맡았다. 의외로 요리를 제일 잘 하는 사람은 언니였다. 부모님은 언니가 워낙 어릴 때부터 탐사 작업을 전전한 모양이라 언니는 사실상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자취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밤 9시까지는 온 가족이 식탁에 모여 앉아 있었다. 책을 읽든 이야기를 하든 음악을 듣든 각자의 자유였지만 TV나 휴대폰은 금지였고, 이는 부모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원체 TV를 잘 안 보고 휴대폰은 연락용으로만 쓰던 분들이라 둘이서 연구 자료를 보며 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웠고, 나는 늘 그랬듯 사전을 끼고 두꺼운 원서를 읽는 데 열중했다.

유일하게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니였다. 언니는 참고서와 문제집을 쌓아놓고 학교 공부를 했지만 전혀 집중하지 못한 채 늘 지루함에 몸을 떠는 게 눈에 보였다. 문제집에 눈을 맞춘 지 이십 분도 안 되어 언니는 자기 공부거리를 밀어두고 내가 읽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하면 언니는 주의 깊게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내 지루한 듯 턱을 괴었다.

거꾸로 내가 언니가 하는 공부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유명한 수학 참고서에서 미적분 공식을 보고 있자 언니는 “얘, 아무리 너라도 그건 무리다.” 라며 실소했다. 한 시간 뒤 내가 연습 문제 하나를 풀어내자 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면서 심통이 난 듯 입을 비죽거렸다. “…너 밖에서 이러면 애가 애 같지 않다고 사람들이 싫어한다…?”

그러면 아빠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녀석아. 진짜 애 같지 않았으면 네가 뭐 읽고 있냐고 들여다볼 때마다 신이 나서 설명해 줬겠니? 넌 매번 따라가지도 못하는 주제들로 말이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에 접어들자 나와 누나는 방학을 맞았다. 부모님은 우릴 데리고 국내, 국외 가릴 것 없이 여행을 떠났다. 보욕원 시절에는 여행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책으로만 보던 곳들을 직접 걷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학교에서 낸 방학 숙제를 여유롭게 해 나가고 있었다. 여느 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 가족이 아이의 과제물에 매달리는 진풍경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모든 과제들을 해결한 나는 단 한 가지 과제를 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바로 글쓰기였다. 일기 이십 일 분과 여행 소감문 한 편과 단편 분량 소설 한 편 중 내가 고른 건 소설이었다. 돌이켜보니 그토록 많은 소설책을 읽은 주제에 단 한 편도 나의 소설을 쓴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인풋이 많으니 일단 연필만 잡으면 괜찮은 작품 한 편 정도는 뚝딱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교만이었음을 깨닫는 데엔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열 살밖에 먹지 않은, 그것도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책만 들여다 본 아이의 맹점은 ‘당장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소재를, 얼마나 좋은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방해일 수도 있었다. 그것들은 부담 없이 편하게 읽기만 하면 되니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동기를 발휘할 생각이 안 들게 하는 ‘완성된 남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나는 언니에게 도움을 청하러 언니의 방에 들렀다. 언니는 외출 중인지 자리에 없었다. 방을 구경하던 나는 언니의 책장을 보게 되었다. 절반 정도가 수험 관련 서적이었고 나머지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빼면 사회과학 서적, 시집, 사진집 등이 통일성 없이 마구 꽂혀 있었다. 장서의 규모만 비교해도 내 반의 반도 안 되어 보였다. 그나마 대부분 몇 년은 그 자리에서 묵은 듯 얇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런 와중에 책장 맨 끝의 두꺼운 원고지 뭉치들이 눈에 띄었다. 각각 철끈으로 묶인 종이뭉치 중 하나를 꺼내 보았다. 200자 원고지 천 장 가량이 언니의 필체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책상에 앉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기 시작했다. SF 소설이었다. 지구인 남성과 은하계 식민지 주민 여성의 만남을 둘러싼 장편 활극이었다.

전부 읽고 나니 어느새 창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원고를 내려놓고 “후…” 하고 한숨을 쉬자 뒤에서 “재밌었어?”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언니가 침대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를 보는 표정은 다소 굳어 있었다.

“미안해, 너무 재밌어서 그만…”

“영광이네. 용건 끝났으면 이만 나가 줄래?”

처음 만났을 때를 연상케 하는 차가운 태도에 나는 소기의 목적도 잊은 채 서둘러 방을 나왔다. 다음날 나는 오전 중에 원고지를 들고 조심스럽게 언니의 방을 찾았다. 언니는 다시 평소와 같은 태도로 나를 대했다. 소설을 쓰고 싶은데 갈피를 못 잡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자 언니는 다음과 같이 조언을 해 줬다.

“처음부터 아예 가공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힘들다면, 실제 있었던 일, 겪은 일을 살짝 비트는 것도 괜찮아. 그러면 더욱 생동감 있으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가령 우리가 프랑스에서 호텔을 못 잡아서 어느 싸구려 여관방에 간신히 묵었을 때 기억 나? 식당에서 얼굴에 상처가 있는 여자 옆에 앉은 남자애가 쉴 새 없이 조잘거린 거. 나야 프랑스어를 몰라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마치 레옹과 마틸다의 성별을 반전시킨 것 같았거든.”

나는 언니의 즉흥적이면서도 기발한 조언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언니가 프랑스어를 몰라서 대화 내용을 못 알아들은 게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에 도움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식당에 있던 건 우리 가족과 그 두 사람뿐이었고, 우리의 행색을 보고 프랑스어 할 줄 모르는 관광객으로 생각했는지 남자애는 거침없이 이렇게 말했다.

“Regarde la fille à côté de toi, ma chéri. Elle est grande, aux yeux perçants et aux gros seins. Juste ton type idéal, n'est-ce pas ? Si vous le désirez, je tenterais cette fille orientale.(자기야, 옆에 있는 여자 말이야, 딱 자기 취향 아니야? 키 크고 눈매 부리부리하고 가슴 빵빵하고. 이 동양에서 온 영계 맘에 들면 내가 좀 있다 꼬셔 올까?)”

그 말을 듣자마자 아빠와 엄마와 나는 일제히 일어나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식사를 즐기고 있던 언니를 일으켜 세워 둘러싸듯이 방으로 호위해 갔다. 그리고 언니를 제외한 우리 셋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또 하나 궁금했던 사실을 언니에게 물었다. “왜 소설을 써놓고 그냥 묵혀 두는 거야? 발표 안 해?” 그러자 언니는 별 일 아닌 듯 대답했다.

“나한테 소설은 그런 거야. 내가 쓰고 읽고 재밌으면 끝. 밖에 드러내봤자 딱히 달라질 것도 없고.”

욕심이 없는 사람은 강하다. 책장에 있던 원고지 뭉치들은 한두 달 만에 써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언니는 그렇게나 숨 쉬듯 뛰어난 작품들을 써내면서도 그것으로 세간의 인정을 받아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언제까지고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자신에게 없는 재능이기에 시기하고 폄하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와 비등하게 더욱 꽃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선택하고 책임지는 건 본인이기에 타인이 질척거리거나 강요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래도 아쉽네. 그 정도 글을 쓸 수 있는데 세상에 나오지 않는 건…”

“…”

“어떤 식으로든 언니가 다른 사람에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썼으면 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내가 못내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언니는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언니는 입을 열었다.

“엄마하고 아빠가 너를 입양한 이유는, 단지 마침 네 차례였기 때문이야.”

“…”

“네가 똑똑하니까 키우는 보람이 있다든지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야. 네가 어떤 아이든 부모님은 널 사랑하려고 전력을 다했을 거야.”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거야?”

언니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네가 비범한 천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리고 네가 계속 그 보육원에 있었으면 넌 인생에서 그 재능을 반도 못 발휘했을 거야. 그렇지?”

“…”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언니는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줘. 너한테 공치사하려는 게 아냐. 부모님이나 나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이젠 너 없는 가족은 생각할 수 없어. 너도 그럴 거라고 믿고 있고. 다만 나는 네가 그 나잇대 평범한 여자아이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의 환경을 발판 삼아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으면 해.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언니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나는 놀란 나머지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었다. 그 정도까지 언니가 나에게 기대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때, 약속할 수 있어? 그러면 나도 한번 노력해 볼게.”

언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기대를 받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새로운 가족을 만난 뒤에도 여태껏 나의 세계는 고아원 담장 밖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토록 무수히 많은 책들을 읽으며 위인들을 동경하면서도, 내가 그런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문득 원장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람은 예상보다 훨씬 더 자신 바깥의 환경에 의해 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질 수 있단다.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언니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 날, 나와 언니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 새롭게 자매가 되었다, 피보다도 진한 약속을 매개로.     




동생과 약속을 하고 얼마 안 있어 2학기가 시작됐어. 난 개학 첫날 곧바로 신문부의 문을 두드렸어. 학생 신분으로 가장 확실하게 다수에게 내 글을 보일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굳이 공모전을 전전하며 몇몇 사람의 코드에 맞춘 글을 쓰느라 스스로를 소진하기는 싫었거든.

부실에 들어섰을 때 부장을 위시한 부원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 노는 애들과 연을 끊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를 경계하는 눈치더라고. 다른 1학년 부원이 교내 방송 원고를 쓸 때 나는 학년이 올라갈 때까지 청소랑 잡일만 전전했어. 딱히 조바심이 나진 않았어. 한심하게 들리겠지만, 애당초 동생의 말 한 마디만 아니었으면 내 글을 세상에 선보이겠다고 시도할 생각조차 안 했을 테니까.

학년이 올라가고 부장이 바뀌었어. 내가 군소리 없이 한 학기 내내 청소와 잡일만 하는 걸 보고 생각한 바가 있었는지 어느 날은 책상에 앉혀 놓고 중・고등학생들의 놀이 문화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써 보라고 하더라고. 그때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썼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스쿨 카스트와 관련지어서 이런저런 청소년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거야. 그 글 덕분에 학창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장이란 걸 받았지만, 그 글 하나 때문에 난 매주 교내 신문에 한 편씩 칼럼을 써야 했지.

신문이 나올 때마다 한 부를 집에 가져가면 동생은 그걸 오려서 스트링노트에 스크랩했어. 그리고는 자기 리뷰를 길게 덧붙여 나한테 가져왔지. 우린 마침내 공감대를 형성할 매개를 발견했던 거야.

고2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또 다시 가족 여행을 계획하는 아빠에게 나는 엄마랑 두 분이서만 갔다 오시라고 등을 떠밀었어. 아빠는 집에 둘만 남겨놓는 걸 걱정했지만 엄마가 “이제 미수도 언니가 다 됐네” 하며 나를 믿어준 덕에 결국 아빠는 엄마하고 둘이서만 여행 겸 다음 유적의 사전 답사를 떠났어. 내 생일 전에는 돌아올 테니 선물을 기대하고 있으란 말을 남기고.

방학 내내 나는 집에서 동생과 함께 소설을 썼어. 어지간한 대학원생보다 과학과 철학에 밝은 동생이 나에게 이런저런 소재들을 이야기해 주면 나는 그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짜냈고, 동생은 그걸 읽으며 중간에 해설을 쓰거나 오류를 고쳤지. 서로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공동 작업이었어.

동생은 둘이서 쓴 소설을 어느 익명 게시판에 올렸고, 삽시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어. 유명 리뷰 블로거들이 앞다투어 우리의 작품을 “천재 혹은 미친놈이 생각나는 대로 휘갈긴 광기 넘치는 수작”이라 호평했고, 어느 메이저 언론사의 논설위원은 “나이 지긋한 교수가 소일거리로 쓴 작품이 아닐까” 추측했어. 우리는 사람들이 작품을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걸 보며 재미있어했어.

틈만 나면 메일로 오는 취재 요청에 동생은 내 이름으로 세상에 출사표를 낼 때라고 나를 설득했어. 나는 “네가 없었으면 성립할 수 없는 작품”이라며 반대했고, 거꾸로 동생이 그 재능을 세상에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는 걔를 설득했어.

“지금 네가 작가라고 나서면 불필요한 절차를 밟지 않고도 네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그 어디든 갈 수 있어. 고민할 건 아무것도 없잖아?”

하지만 동생은 완강하게 거부했어.

“내가 가긴 어딜 가? 여기가 내 집이고, 언니랑 아빠랑 엄마가 내 가족인데! 내가 한 일은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 불과하지만, 누구나 언니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내진 못해! ‘대중’, ‘통속’, ‘장르’, 이 2음절의 단어들에 대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혐오를 애써 점잔빼며 숨기는, 숨 쉬듯 현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양 엄살이나 떠는 저 잘난 먹물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걸 보라고! 언니야말로 대체 뭘 고민하는 거야?”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언제나 모두에게 좋은 결과로만 나타나진 않더라고. 돌이켜보면 그 아이의 말이 결국 맞았어. …그래, 내가 미숙한 나머지 그 애의 집에서 그 애를 내몰았던 거야. 세상에 단 하나 남은 가족을….

9월의 어느 유독 석양이 아름답던 날 저녁이었어. 우리는 둘이서 집을 대청소하고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어. 자기도 요리를 해 보겠다는 그 아이에게 “다음에~ 라면이라도 맛있게 끓일 정도가 되면~!” 라고 반쯤 약을 올리며 길모퉁이를 돌았을 때였어. 집 앞에는 양복을 입은 사람 둘이 서 있었어. 그 중 한 남자가 나를 보고는 눈가를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어. 부모님이 몇 번인가 집에 초대한 연구실 동료였어.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했어.

손님들을 거실에 앉히고 발을 떼지 못하는 동생을 달래 올려 보내자 자기를 대사관 직원이라 소개한 다른 한 명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어. 페루에서 사전 답사가 예정보다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부모님은 다른 팀원들을 남겨둔 채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를 탔대. 두 사람이 방문하기 전날 새벽 두 시, 한국 시간으로 저녁 여섯 시에 부모님이 로스앤젤레스발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게 확인됐대.

굳은 얼굴로 잠자코 듣고 있던 나에게 대사관 직원은 석간신문 한 부를 건넸어. 바다 한가운데에 뜬 대파한 여객기의 잔해 사진이 1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어. 관제탑 통신에 따르면 버드 스트라이크로 인한 노후 엔진 고장과 유압계통 무력화로 한국 시간 22시 30분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전원은 구명조끼를 입고 태평양 상공에서 비상탈출, 현재 군・관・민이 합동으로 생존자 수색 중…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에게 직원은 한국인 생존자를 적극적으로 수색 중이고 부모님의 행방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주겠다며 명함을 남기고 갔어. 부모님 동료분도 요즘은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다 찾게 된다고 너무 걱정 말라며 어깨를 토닥이셨어. 인기척이 나서 고개를 들어 계단 쪽을 보니 동생이 거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감싸고 있었어. 나는 애써 웃는 얼굴을 하고 “괜찮아, 괜찮아…” 하며 동생을 끌어안았어.

며칠 후 우리 집에는 친척들이 모였어. 외삼촌은 동생을 올려 보내고는 뜸을 들이며 말을 꺼냈어. 향후 나와 동생의 거취에 대한 얘기였어. 우선 나와 동생은 각각 친가와 외가에서 생활하고, 그러자면 이곳을 비울 수밖에 없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셨어. 앞으로 중학생이 될 동생도 동생이지만 미수는 수험생이지 않으냐며… 나는 들고 있던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는 동생과 결정한 사항을 말씀드렸어.

“이곳은 제 집이고, 동생은 제 가족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끝까지 부모님의 생존을 놓지 않기로 했습니다. 돌아오실 때까지 둘이서 이곳을 지키며 기다리겠습니다. 배려해 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어느새 내려와 있던 동생의 손을 붙들고 나는 고개를 숙였어. 그날은 내 열여덟 살 생일이었어.               




“우리 둘이서 이 집을 지키면서 아빠랑 엄마를 기다리자. 기껏 돌아왔는데 집에 우리가 없으면 얼마나 실망하시겠어. 나중에 돌아오셨을 때 깜짝 놀라게 해 드리자.”

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진짜 이유를 모를 내가 아니었다. 곧 성인이 되는 언니는 독립해서 살 수 있겠지만, 곧 있으면 사춘기를 맞고 중・고등학교 6년을 양육해야 하는, 하물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는 친척집에 가 봤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 게 뻔했다. 언니는 그런 꼴을 보느니 혼자서 나를 책임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차마 언니에게 직접 묻진 못했지만, 언니는 부모님이 사고에 휘말린 가장 큰 원인을 자신이라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생일을 함께 하기 위해 일정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현장을 빠져나왔다가 변을 당했을 거란 이야기였다.

그날부터 언니, 태미수의 소녀가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친척들이 다녀간 다음 날 언니는 신문부에 퇴부서를 냈다. 얼마 안 있어 언니는 방과 후 집 근처 해장국집에서 저녁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아홉 시쯤 언니가 일하는 식당을 찾아갔다. 그러면 언니가 태연하게 국밥 한 그릇을 차려 주고는 다시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고, 빈 테이블의 식기를 치웠다.

열 시가 넘어서야 언니는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했다. 나는 언니의 퇴근에 맞춰 목욕물을 받아 놓고, 언니가 탕에 들어가 있는 사이 집안일을 마무리했다. 목욕을 마친 언니가 알몸으로 침대에 엎드리면 나는 비닐장갑을 끼고 등, 허리, 허벅지 뒤쪽 등에 안티푸라민을 바르고는 선풍기를 약하게 틀었다. 기분 좋은 듯 신음하는 언니한테 내가 “대학 가면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지 말고 지금 번 돈 써. 아빠랑 엄마가 적금도 들어 놨다며.” 라고 말하면 언니는 반쯤 힘 빠진 목소리로 “그게 내 돈이니…” 라 받아칠 뿐이었다.

원래부터 하위권이던 언니의 성적은 모의고사를 거듭할수록 떨어져 갔다. 언니는 신경 쓰지 않고 고3 가을이 지나도록 식당일을 계속했다. 언니는 처음부터 입시를 치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꼭 대학을 가야 한다는 전근대적 사고가 아니더라도, 이대로는 언니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언니가 묵묵히 허드렛일을 하는 이유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약속이 틀리잖아…! 혼자서 희생해버리면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글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밖에 전전할 수 없게 된다. 다름 아닌 나 때문에. 그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순간 떠오른 것은 언니와 함께 쓴 소설과 반 년 동안 칼럼을 스크랩한 스프링노트였다. 나는 도서관에서 그를 서른 부 가까이 복사하고는 언니의 이름으로 쓴 지원서와 동봉해 파주출판단지 일대의 출판사마다 우편으로 보냈다.

게재 당시 워낙 센세이션을 일으킨지라 일 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몇몇 출판사들이 메일에 그에 대한 소회를 동봉해 주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그럼에도 입사는 힘들 것 같다”는 입장이었다. 말 그대로 일 년 동안 이미 인터넷을 통해 내용이 다 퍼진 이상 판권 행사를 통한 수익을 기대할 수도 없고, 취업이 힘들다보니 박봉과 열악한 근무환경임에도 대졸 지원자가 미어터지는 와중에 고졸자를 채용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매일 오후 도서관 컴퓨터를 통해 메일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며 언니가 보지 못하게 지우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 자동응답기의 메시지를 확인하던 나는 “면접을 보고 되도록 채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다”는, 자신을 ㅅ출판사 채용 담당자라 소개하는 사람이 남긴 메시지를 들었다.  

잠시 후 돌아온 언니에게 난 사실을 털어놓고 면접을 보러 갈 것을 권했다. 언니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더니 일단 씻고 올 테니 자기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조금도 기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방에 들어온 언니는 의자에 앉더니 "왜 그런 일을 한 거야?" 하고 목소리를 깔며 물었다. 나는 언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가 조금이라도 적성과 가까운 일을 했으면 해서…"

"내 적성이 뭔데?"

언니는 여전히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내게 대꾸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르는 체 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야? 언니는 글을 쓰고, 글을 가까이 해야 하는 사람이야, 그걸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식당일이나 하며 동생 뒷바라지나 할 사람이 아니라고…"

언니는 한숨을 후우 쉬고는 말했다.

"내가 원해서 식당일을 하는 거야. 내가 글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건 네 욕심이고."

그리고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서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난 어차피 공명심 같은 거 없어. 부모님을 완전히 대신하진 못해도 너 뒷바라지하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어. 약속했지? 네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되기로."

"언니…"

"부탁이야. 넌 예전과 같이 있어주기만 하면 돼. 난 정말 식당일이 좋아서 하는 거라니까. 몸을 움직이다 보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거든."

그 말을 들은 나는 몸을 떼어내고 언니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다. 다크서클이 짙게 낀 눈가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에 가득했던 총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언니가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언니는 늘 앞장서서 부모님의 실종과 관련된 뒷수습을 처리했고, 내 앞에선 언제나 웃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 온 언니는,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감정 어딘가가 고장난 나보다 훨씬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피도 안 이어진 나를 동생이라며, 가족이라며 끌어안았다. 하루 아침에 천애 고아가 된 열여덟 살 소녀가 말이다.

그러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는 세상에 남은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랬고, 그를 위한 가장 가까운 길은 글로써 자신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이라 믿었다.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이 나 때문에 앞으로도 인생을 결정하는 선택들에 제약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

“언니, 솔직히 나는 언니가 다시 나를 보육원에 보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하루아침에 학교 공부랑 집안일에 생계까지 꾸리는 게 쉬운 게 아니란 건 나도 알아. 내가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할 나이가 아니니 자동적으로 언니 혼자 짐을 떠안을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해 쉽게 이러쿵저러쿵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

“하지만 언니… 내가 어떻게 예전과 다름없이 태평하게 있을 수 있겠어. 가장 빛나는 시기의 언니를 허드렛일이나 시켜 놓고 어떻게 유유자적하며 내 인생을 누릴 수 있겠냐고. 언니야말로 약속 잊었어?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 위한 글을 쓴다고 했잖아.”

“…이젠 우선순위가 달라졌어. 알고 있잖아.”

“아니, 출판사에 들어가면 양립할 수 있어. 비루한 글부터 풍성한 글, 소박한 글부터 화려한 글까지 되도록 많은 날것의 글들을 접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언니만의 심상을 그려내는 거야. 그리고 꾸준히 습작을 쌓아 가다가, 때가 됐을 때 언니의 모든 걸 쏟아 부은 회심작을 쓰면 돼. 나를 믿어, 언니는 분명 SF 소설로 대문호가 될 거야.”

언니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쐐기를 박았다.

“지금부터 하지 않으면 나중에 나한테 아쉬운 소리 하게 될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의아해 하는 언니에게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의 힘으로 소설을 써나갈 거야. 그리고 언젠가 언니를 뛰어넘을 거야. 그거면 언니랑 한 약속에도 부합되지?”

“약속…?”

“내가 아는 가장 대단한 사람은 언니니까, 언니보다 뛰어난 작가가 되면 약속을 지키는 거잖아?”

“너…!”

언니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평소보다 두 배로 커진 눈망울은 갈피를 못 잡고 왔다 갔다 했다. 이윽고 진정한 듯 눈을 감고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다시 뜬 눈에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기대할게, 나를 뛰어넘는 날을.”

“…그리 멀지 않을 거라는 거 알지?”

그날 밤 그렇게 우리는 약속을 재확인했다. 다음 날 언니는 ㅅ출판사에서 면접을 보았고, 이듬해 2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신입 사원으로 내정되었다. 언니가 스무 살, 내가 열세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친구들이 대학교의 신입생이 될 때, 난 ㅅ출판사의 사원이 됐어. 그곳은 사장을 포함해 일곱 명밖에 안 되는, 파주의 많고 많은 군소 출판사 중 하나였어. 특징이 있다면 오컬트나 마이너 철학이나 비주류 놀이 문화 같은 서브컬쳐 서적에 특화되었다는 거였어.

면접을 보고 나를 내정한 편집장도 “출판은 고사하고 독서력부터 떨어지는 어지간한 대졸자보단 태미수 씨가 훨씬 가능성이 있어요.” 하면서 나를 높이 샀어. 나는 그런 것보다는 어쨌든 동생이 밀어준 진로인 만큼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생각이었지.

대형 출판사도 간간이 히트작을 내서 겨우 꾸리는 한국 출판 시장에서 중소 출판사의 생존 전략은 무조건 많이 책을 내는 거였어. 200자 원고지 천 장 분량은 되는 책을 한 달에 최소 열 권에서 최대 열다섯 권까지 만들었어. 평일에는 밤 9시 이전에 퇴근한 날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주말에도 당연한 듯 출근했어.

원래 이 나라 중소기업이 한 사람에게 두세 사람 몫의 일을 시키는 건 관행이나 다름없는 거지만 출판업계는 유독 심해서 연중 크런치 모드가 지속된다고 봐도 무방해. 책상 앞에 앉아서 원고를 보는 시간보다 편집장과 외근을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어.

ㅅ출판사에서 나는 유일한 여사원이었어. 나머지는 사장의 아들인 편집장을 제외하면 모두 40대 이상의 유부남들이었어. 대부분 대기업에 다니거나 자기 사업을 하다가 몰락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입사한 사람들이었어. 제 딴에는 한때 똑똑하다는 소리 들으며 잘 나갔던 사람들이니 여자, 그것도 고졸이 입사했다는 데 대해 내심 마뜩찮았던 모양이야.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은 중년 남자 특유의 능글맞음을 장착하고 나를 희롱했어. 가정이 있는 유부남들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드는 정도였지만 이혼하고 자식과 단둘이 사는 홀아비들은 거리낄 게 없었어.

삼십 대 중반인 편집장은 나를 업계 미팅 자리마다 데리고 다녔어. 서점 관계자들에게 수시로 나를 소개하며 “고졸이지만 어지간한 대졸보다 낫다”며 쓸데없는 사족을 달았지. 하지만 나는 말 한 마디 못한 채 늘 그의 옆에 앉아 있기만 해야 했어. 언젠가 “왜 선배 편집자들을 두고 저를 데리고 다니시나요?”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어.

“우리에게 책은 상품이자 돈벌이 수단이에요. 어떤 미사여구를 들이대도 그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죠. 아무리 좋은 상품도 팔지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요. 저는 미수 씨에게 상품을 파는 법을 가르쳐드리는 거예요.”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 편집장은 영업을 위해 나를 데리고 다니는 거였어. 말하자면 꽃병풍이었지. 내 학력을 굳이 들먹인 건 ‘우리 회사가 이렇게나 고용에 차별이 없다’고 보이기 위한 거였고. 어쨌든 편집장과 외근하는 동안은 회사의 중년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 나름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어. 외모가 예뻐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사무실에서 온갖 잡일은 다 떠넘겨진 채 시시한 중년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을 테니까.

어느새 일 년이 지나고 동생은 중학생이 되었어. 동생이 입학하는 날 나는 연차를 쓰고 하루 종일 동생과 함께 있었어. 새로 맞춘 교복을 동생은 영 거추장스러워했지. 나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 “이제 네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친구를 사귀는 거야. 서로 억지로 맞추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아낄 수 있는 관계로 있을 수 있는 친구. …알겠지?”

동생은 눈을 피하며 “내 걱정은 됐으니까 무리해서 일하지나 마.”라고 중얼거렸어. 여중생들 집단의 스쿨 카스트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살얼음판 같은 정치 공방을 짐작하기 어렵지. 동생처럼 여러모로 비범한 아이는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았어. 교사도 학부모도 그들만의 사회에 함부로 끼어들 순 없어, 그 순간 무리에서 비겁자가 되고 낙오자가 될 테니까. 나는 말없이 돈가스를 썰어먹는 동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그즈음에는 나도 출판사에 완전히 적응해 있었어. 업계 사람들도 나를 보면 먼저 아는 체를 했고, 상사들의 성희롱도 웃으며 받아칠 수 있게 됐으니까. 내가 원고를 담당한 저자의 책이 좋은 평가를 받아 상을 타기도 해서 편집자로서도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 딱히 보너스가 나온 것도 아니지만 말이야.

입사한 지 이 년 쯤 되었을 무렵 출판사는 나름대로 규모가 커져 있었어. 내 밑에도 신입이 들어오게 되었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부사수를 맞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어. 면접 때 열의 있게 자신이 하고 싶은 기획을 발표하는 걸 편집장 옆에서 본지라 내심 ‘면접 준비 열심히 했네’ 하고 생각했어. 어느 회사든 신입의 열정은 중요하거든. 어차피 일주일이면 현실을 파악하게 될 거고, 이후에는 열정을 찾아 박차고 나가느냐, 아니면 열정을 연료로 자신을 소진하느냐의 양자택일뿐이니 말이야.

나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쓴 비문 투성이 원고를 매일 밤 9시까지 만지며 그 친구의 눈빛이 사그라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았어. 밤에 단둘이 사무실에서 있는데 옆에서 한숨을 푹푹 쉬면서 삼십 분 간격으로 욕을 중얼거리는 걸 들으니 영 마음이 불편했단 말이야. 수습 기간이 끝난 날 기분 전환 겸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바에서 한 턱 쏴 줬더니 위스키를 무슨 이온음료 마시듯 들이붓더라고. 결국 제일 가까운 모텔에 간신히 던져 주고 왔어.

그랬더니 당장 다음 날부터 사람이 바뀌더라. 분명 담배를 안 하던 친군데 자기 삼촌뻘 상사들 따라 식후땡을 하러 나가더라고. 처음 자기가 맡은 원고를 손볼 때만 해도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왕창 빌려 와서 일일이 찾더니 그 날부터는 위키피디아 한번 읽는 게 다가 됐어. 무엇보다도 내가 자기보다 어린 걸 어디서 들었는지 은근슬쩍 말을 놓고, 원서 같은 걸 볼 일이 있을 때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자꾸 한두 마디 거들더라고. 자긴 대학 나왔다 이거지.

뭐, 일 가르쳐 준 사람 잡아먹으려 드는 건 기본적으로 작은 육각형의 인재상을 추구하는 중소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야. 그래도 기왕이면 열정의 방향을 직무에 맞춰서 나보다 훨씬 일을 잘하게 되는 결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친구는 회사 생활에서 직무보다 중요한 게 뭔지 참 빨리 파악하고 거기다가 열정을 쏟더라고. 지금도 그 친구가 딱히 밉진 않아, 싫을 뿐이지. 사람을 미워하는 건 한순간이라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어도, 싫어하는 건 자기도 모르는 새 천천히 진행되어 어느새 같은 사람으로 못 보게 된다는 교훈을 얻었어. 그 친구 덕분에 말이야.

그렇게 살쾡이 새끼를 키우는 바람에 회사 생활이 암울해질 무렵 희망적인 소식이 들렸어. 국내 유수의 웹소설 사이트와 ㅅ출판사가 제휴하게 되었는데 그에 따라 새로운 레이블을 신설하고 내가 그 담당자가 되라는 거였어.

얼마 안 있어 제휴 관련으로 관계자들이 미팅을 갖게 되었어. 그 자리엔 나, 편집장, 저쪽 대표, 그리고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어. 이윽고 대표가 남자의 이름을 소개하는 순간 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어. 마천희. 십 년 넘게 SF 소설을 집필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한 작가. 평론가보다 팬덤에게 더욱 굳건한 지지를 받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욱 진가를 인정받는 작가. 내가 SF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마천희 선생님의 책을 읽은 게 계기였어. 오 년 가까이 신작이 없어서 계속 소식을 궁금해 했는데 그곳에서 실제로 만나게 된 거야.

순간 정신을 차리고 민망함을 느끼며 조용히 자리에 앉는 나에게 대표는 껄껄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어. 선생님은 그 동안 신작을 집필하는 데 슬럼프를 겪어 왔고, 재정적으로도 돈이 들어갈 일이 많아서 힘든 상황이셨다고. 선생님의 전성기였던 대여점 시절에 비해 장르소설의 출판 시장은 규모도 줄었지만 특정 장르로 편중되느라 더 이상 종이책으로 작품을 내는 건 시장 가치가 떨어지고, 그래서 이번에 웹소설 쪽으로 완전 신작을 내어 재기를 꾀하는 거라고.

대표가 이야기를 마치자 선생님은 말없이 내게 악수를 청하셨어. 마주 쥔 선생님의 손은 아빠의 손처럼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었어. 나는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을 애써 감추고 있었어.

그렇게 레이블 담당 일이 시작됐어. 사실 작품들 자체에 관한 어지간한 관리는 그 동안 쭉 해온 사이트 쪽 일이었고, 나는 연재분들의 반응을 검토하며 출판사 차원의 판권이나 판촉 사항 등을 관리하는 게 주 업무였어. 원래라면 특정 작가와 필요 이상으로 접촉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했어. 하지만 기껏 연락처까지 교환했는데 철저히 선을 지키기엔 나를 유혹하는 조건들이 너무나도 많았어. 상대는 어릴 때부터 동경해 온 작가이자 중후함과 지성을 겸비한 띠동갑 연상의 남자, 이쪽은 십사년지기 팬이자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여의고 졸지에 가장이 된 이십대 초반의 여자.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끌리지 않는 게 이상한 거였어.

신작에 대한 논의를 빌미로 나는 종종 선생님을 불러냈어. 선생님은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고 매번 나와 주셨지만, 나를 보는 눈은 어디까지나 조카뻘 아이를 보는 자상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어떤 방식으로 유혹해도 그저 허허 웃으며 넘기실 뿐이었어.

클레임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들어왔어. 어느 날 미팅을 마치고 오는 길에 편집장이 나한테 “제가 태 대리를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라고 말하는 거야. 행간이 잡히지 않아서 “제가 잘 이해를 못 했는데요…” 라고 하니까 갑자기 언성을 높이면서 말하는 거야.

“편집자가 품위를 지켜야죠. 그저 유명 작가라고 졸졸 쫓아다니며 웃음이나 흘리고… 태 대리 그렇게 가벼운 여자였어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어. 선생님을 쫓아다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 문제였어. 품위? 웃음이나 흘려? 가벼운 여자? 나를 누구보다도 꽃병풍 취급한 게 자기라는 자각은 없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대꾸할 말을 못 찾았어. 하지만 쫓아다닌 건 명백한 사실이고, 따진다면 결국 편집장의 저렴한 인신공격을 따지게 되는 거니, 말싸움을 해 봤자 그저 감정 소모에 자존심 싸움에 불과하다는 건 명백했어. 그래서 차라리 정색하며 받아치기로 했어.

“아니, 편집자고 작가고 이전에 여자와 남자거든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 쫓아다니고 남자도 딱히 싫다고 안 하는데 뭐가 문제예요? 뭐, 혹시 저 좋아해서 침이라도 발라놓았어요?”

마지막 말은 “뭔 웃기지도 않는 소리예요!” 라고 태클 걸라고 일부러 뻘소리를 한 거였어. 그래야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다음 날도 어색하지 않게 인사할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거야. 살짝 운전석 쪽을 봤더니 편집장이 얼굴이 빨개진 채 앞만 노려보고 있었어.

아… 그때의 감정이란. 정작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날 쳐다보지도 않는데 좋아하긴커녕 굳이 따지면 불편한 사람이 그동안 나를 좋아했다고 해 봤자 부담스러울 뿐이었어. 무엇보다 이제 와서 지고지순한 순정남 행세를 해 봤자 지난 세월 봐 온 밑천이 있는데 달리 보게 될 리가 없잖아. 말했지? 사람 싫어하는 건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같은 사람으로 안 보이게 되는 거라고.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 날 불러내서는,

“마음 바꿔요. 현실적으로 나이도 너무 많고, 돈도 없다고요. 그 사람 작가 생명 순전히 미수 씨한테 달려 있는데, 여차할 때 의지나 할 수 있겠어요?”

정말… 표정 관리하기 힘들더라. 자기 아버지 낙하산으로 험한 꼴 안 보고 편집장으로 거들먹거리는 주제에, 선생님보다 자기가 더 현실적으로 의지가 되는 남자라 생각한 걸까. 그날부터 난 편집장의 사무실에 들어갈 때나 같이 외근을 갈 때는 늘 녹음기를 켜 놨어. 진심으로 나를 좋아했을지도 모르지만, 여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안 보면서 근거가 알량한 우월감을 내비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소인배는 영 신뢰할 수 없었거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여전히 철벽을 치고 계셨어. 하루는 선생님을 불러 놓고 먼저 술에 취한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저에게서 못 헤어 나오게 할 수 있을까요?” 하고 평소의 서운함까지 실어서 푸념을 했어. 그랬더니 선생님은 푸하 하고 숨을 터뜨리시고는 진지한 눈빛을 하고 대답하셨어.

“미수 군. 미수 군이 가진 젊음과 미모는 참으로 짧고 유한한 것입니다. 물론 한정된 시간 속에서 빛나기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한정된 시간 속에서 누구에게나 거저 주어지기에 그 광휘에 새삼 반색할 동기가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난 이상 주어져 버린 시간 동안 가능한 한 쇠하지 않고 멸하지 않는 무언가를 글로써 남기고자 예전도 지금도 애쓰고 있고, 그런 나 자신을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도움이 됐나요?”

그래, 선생님은 천상 작가셨어. 선생님은 글을 쓰는 당신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셨어. 그것은 타인이 어설프게 짐작할 수 없는 하나의 상이자 경지, 진정 순간을 영원처럼 여기며 자신이 믿는 것에 투신하는 사람만이 스스로 현상의 단계를 월경하고서 뒤돌아 보이는 양태.

“미수 군의 과거에 대해서 들은 바 있어요. 벌써 오 년 가까이 지났지만, 인터넷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소설이 있었지요. 나도 어쨌든 SF 소설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라 읽었고요.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왜 그 일을 하고 있지 않나요? 시간은 이렇게나 야속하게 흘러가거늘.”

“…!”

어느 만화가가 그랬던가. ‘동경은 이해에서 가장 먼 감정’이라고.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결국 선생님에겐 자신의 작품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고 자신에게 어떤 이득을 주는가 같은 건 염두에도 없고, 영원성의 투사로서의 글과 그를 마주하는 자신만이 있을 뿐이었어. 그를 이해하는 순간, 더 이상 나는 선생님을 동경하는 게 아니라 한 명의 경쟁자로 보게 되는 거였어.

그때서야 나는 잊고 있던 동생과의 약속이 생각났어. 이곳에 온 최우선 목적은 돈을 버는 게 아니었어. 수많은 초벌 원고를 접하며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고민을 하는 것이었지. 언제부터인가 일상에 떠밀려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던 거야.

다음 날 오전이었어. 나는 원만하게 퇴사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어. 고까운 후임에게 인수인계할 레이블 담당 업무를 정리하던 중 휴대폰이 울렸어.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운정중학교 교사 이○○라고 합니다…”

동생의 담임이 덤덤히 하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휴대폰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어.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사무실을 뛰쳐나갔어. 편집장이 불러 세우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어.     




언니의 걱정은 그대로 적중했다. 나는 중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먼저 다가가지 않는 나에게 먼저 다가오는 아이는 없었다.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었다. 문제는 중학교에서 혼자 다니는 말수 없는 아이는 으레 질 나쁜 양아치들의 타겟 1순위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1학년 1학기가 끝나기 전에 나는 불량 학생들에게 찍혔고,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괴롭히는 패턴은 뻔했다. 물건에 낙서하기, 발 걸어 넘어뜨리기, 급식에 침 뱉기…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거기에 대고 울거나 괴로워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그게 재미있어서라도 그 년들은 괴롭힘을 그만두지 않고 더욱 가속할 것이다. 눈 딱 감고 한 명만 잡아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팰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단념했다. 교사란 족속들 대부분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전까지 자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왕따 문제는 애써 쉬쉬하면서 정작 피해자가 자기 방어를 위해 모종의 액션을 취하면 경계하고 억제하려는 위선자들이니,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건 언니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다.

애초에 학교 수업 따위에 흥미나 열의가 생길 리가 없었다. 집에서 밤새도록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는 학교에선 수업 시간 내내 그저 엎드려 잤다. 태도가 그러니 교사들에게도 진작 눈 밖에 나게 되었다. 수업도 안 듣고 학원도 안 다니는데 성적은 상위권이니 교사들도 ‘이 녀석 뭐야’ 싶었을 것이다.

이 무렵 내 일상의 동아줄이 되어준 게 강미주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늘 만인에 대한 연민이 깃들어 있었고 도저히 구제할 수 없어 보이는 군상들에게조차 구원의 단서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사랑과 비슷한 격률을 늘 구조적으로 내포하고 있지만, 작가는 대사로든 독백으로든 후기로든 “신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그에서 비롯된 불완전한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니체식 인간 찬가를 꾸준히 역설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 학년이 된 해,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결손가정 복지 지원 때문에 학교의 몇몇 교사들은 우리 집의 사정을 알고 있었는데, 그걸 술안주거리마냥 교무실에서 떠들다가 나를 괴롭히는 무리 중 한 명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다음 날 학교에 간 내가 본 광경은 교실 칠판에 쓰인 ‘피도 이어지지 않은 부모님 목숨 값과 언니 몸값으로 연명하는 버러지 왜 사냐 나가 죽어’ 라는 문장과 시선을 피하는 학생들 그리고 낄낄거리는 녀석들이었다.

그 뒤의 일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책상이든 걸상이든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던지면서 달려가서는 가장 크게 웃고 있던 년의 배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그리고 마운트를 잡고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얼굴을 셀 수 없이 때렸다. 몇몇 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교사가 들어오기 전까지 아무도 나를 저지할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경찰서에 연행되었고, 잠시 후 언니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나는 언니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언니는 부모님을 모욕하고 자길 몸 파는 여자라 음해한 피해자의 부모와 멱살을 잡고 싸웠다. 합의 같은 건 개나 주라고 하고 법정에서 똥 지리게 해 주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소를 안 했는지, 했지만 기각됐는지 법원에 출두할 일은 없었지만, 학폭위 결과 나와 가해자들은 똑같이 1개월 정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선고가 떨어진 날 언니는 사무 용구를 한가득 담은 종이 박스를 들고 퇴근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퇴사했다고 말했다.

“언니…!”

“참고로 이번 일 때문은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너 때문이 아니라 날 위해서 나온 거야. 더 빨리 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네. 그 동안 너나 나나 혼자서 참 애썼어, 그치? 역시 우린 함께 있어야 무적인데, 왜 잊고 있었을까.”

그날 밤 나는 언니의 품에서 원 없이 울었다. 나는 여전히 어린애였다. 혼자서 뭐든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서 뭐든 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

다음 날부터 언니는 나를 깨워서 아침을 먹이고는 집에서 십 분 거리의 백숙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오후 4시 브레이크타임이 되면 퇴근해서는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버는 돈은 한 달에 백만 원 남짓.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두 사람 분의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저금을 조금씩 까먹기 시작했다.

언니는 저녁을 준비하며 그날 쓸 글의 내용을 정리하고, 둘이서 저녁을 먹은 뒤에는 노트북 앞에 앉아 자기 전까지 집필했다. 요리 외의 모든 집안일이 내 몫인 건 변함없었지만, 언니가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언니는 신작 원고를 쓰는 동시에 십대 때 쓴 장편들을 활자화하여 업로드해 나갔다. 종종 언니가 그날 정한 분량을 제때 못 쓸 것 같으면 내가 타이핑해 주기도 했다. 그것은 나에겐 오래 전 둘이서 함께 소설을 쓰던 감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흘러갔다.

언니의 소설은 점점 입소문을 탔고, 내가 삼 학년의 여름을 맞을 때쯤 언니는 자신이 다니던 출판사가 운영하는 장르소설 레이블과 전속 계약을 맺게 되었다. 팬들은 언니의 평가를 두고 ‘마천희의 후계자’와 ‘마천희를 뛰어넘을 천재’ 사이에서 갑론을박을 벌였다. 편집자에서 전업 작가가 된 지 일 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한편 나는 여전히 나만의 작품을 쓰고 언니를 따라 인터넷에 게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피드백이 돌아오거나 입소문을 타는 일은 없었다. 조회수도 조회수지만 ‘잘 봤습니다’ 이상으로 진지한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판타지를 써도, 로맨스를 써도, 언니처럼 본격적인 SF를 써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전 언니와 함께 쓴 소설의 반응과 대조적으로 이후의 집필과 반응이 보여주는 사실은 명약관화였다.

내 소설은 독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나는 이유를 절실히 고민했다.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는 할 수 없어도 평범한 성장 과정은 결코 아니었다. 미처 겪지 못한 경험들도 수많은 독서로 간접적으로 보충해 왔다. 나에게 부족한 것을 명쾌하게 짚어 줄 사람이 나타나길 막연하게 바랬다. 그리고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고 2 여름방학 때였다. 평소처럼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있다가 집에 와서 전날 올린 글의 반응을 확인하는데 처음으로 메일함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 작품을 쭉 읽어 왔다는 독자가 보낸 것이었다. 정말 전부 다 읽은 것인지 이런저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캐치해서 비평을 하고 있었다. 다소 들뜬 기분으로 메일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이윽고 마지막 문단에 다다랐다.     


…다만 작가님의 모든 작품군에서 공통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작가님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좀처럼 읽히지 않습니다. 창작자로서의 에고가 느껴지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몇 년 전, 작가님을 연상케 하는 정교하고도 빈틈이 없는 문체의 소설이 인터넷에 올라온 적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작가님이 그 작품의 저자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럴 리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소설은 읽는 내내 시시각각으로 저자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어떤 의미에선 섬뜩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었거든요.


그동안의 노력을 부정당하는 것도 모자라 처음 소설을 쓸 때부터 지금까지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선고받은 나는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 책상 앞에 굳어버렸다.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나니 밀려오는 답답함에 목이 탔다. 주스를 가지러 부엌에 내려갔더니 언니는 설거지를 하며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럼 개런티 문제는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에이전트요? 어휴, 괜찮아요. 저도 출판사 밥 먹어 봐서 개인 사업자로 대처할 수 있어요. 그건 그렇고, 우리 언제 또 얼굴 보죠?”

개런티? 에이전트? 출판사? 단어만 들어 보면 연재처 담당자인 듯 했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게 살금살금 냉장고를 열었다. 주스를 꺼내 컵에 따르면서도 신경은 통화 중인 언니에게 쏠려 있었다. 언니는 나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누그러진 눈에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이, 참! 글쎄 PD님 무슨 위정척사냐고~ 갓 쓰고 두루마기 입고 다니냐고~ 게임 만드는 사람이 그렇게 고지식해서 재밌는 게임이 나오겠어?”

순간 손에 든 주스 병을 놓칠 뻔했다. 게임이라고? 그럼 게임회사 사람이랑 일적인 이야기를 한 거야? 나는 컵을 들고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방으로 올라갔다. 주스를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인터넷을 켜고는 구글에서 언니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검색했다. 만약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어딘가 한 줄이라도 유출된 정보가 있을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의 아카이브에 제나두워크스라는 게임회사를 다닌다는 어떤 얼간이가 “이번 신작의 원안은 태미수 작가의 『별과 바다의 전쟁』인듯 ㅋㅋ"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가 삭제된 기록이 있었다. 언니가 중학생 때 써서 원고로만 가지고 있던 장편 소설로, 퇴사 후 가장 먼저 업로드한 기존 작품이었다. 별다른 호응이 없어 그냥 묻히는 줄 알았더니, 진작 발견되어 게임화를 제의받고, 또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일언반구도 안 한 언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턴가 자신의 작품 활동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아쉬운 건 없는지 물어볼 뿐이었다. 자신의 신작이 레이블 베스트 인기작이 되었다든지, 유명한 웹진에서 인터뷰를 했다든지 하는 일은 말하지 않았다.

언니는 부모님 실종 이후 모든 걸 혼자 끌어안으면서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기어이 세상에 펼치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언니가 진심으로 작가로서의 자신에 몰두하자마자 곧바로. 그리고 심지어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쓴 작품을 업계에서 이름 있는 회사가 게임으로 만들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하나의 통찰에 다다랐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천재라고 부르는 건 그저 축적된 지식과 반복을 통해 학습된 인지 능력에서 나온 ‘어른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뒤이어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소설은 자기도 모르게 어른 흉내를 내며 언니와 어떻게든 접점을 찾던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수단이었고, 좋은 소설을 써 내면 그만큼 언니가 돌아봐 주리란 다소 맹목적인 방향을 잡고 나의 소설 쓰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교사로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보육원을 떠나지 않겠다며 원장 할머니에게 집착하던 열 살 때의 스스로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책을 읽는 게 언제나 흥미진진하진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언젠가 할머니한테 도움이 될 거야’라며 바깥에서 나를 부르던 아이들을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활자에 코를 박곤 했다.

언니가 나에게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 건 결코 빈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언니가 자신의 장래를 접어두면서도 나를 키워낼 때 마음 어디에선가 ‘언니는 자신의 꿈을 나한테 맡긴 거야’라 제멋대로 단정하고, 언니가 어떻게든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갖은 애를 썼다. 진실은, 언니는 약속대로 한 번도 마음속에서 글쓰기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저 일상에서 나를 우선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밀어붙이는 대로 출판사를 들어갔고, 혼자가 된 내가 문제에 휘말리자 곧바로 관두었다.

자신에 대해 맹신이 아닌 확신으로 가득 차 있기에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 줄 수 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으레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이 원하는 상을 은연중에 강요한다. 세상의 불행의 가장 흔한 유형 중 하나가 그렇게 발아하여 사람들을 좀먹어 왔다.     

언니는 올곧게 자신을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했기에 강한 척을 하지 않아도 이미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하루아침에 친부모를 잃고도 나를 끌어안고 밝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 내가 없어져도 금세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누군가를 거울삼고 거기에 비치는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면 혼자서 계속해 나갈 수 없다. 평생을 건 약속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     

─── …기대할게, 나를 뛰어넘는 날을.     



친애하는 언니.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면 저는 이미 당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을 위해 용돈을 모았고, 거처와 앞으로 살아갈 수단을 모색했습니다.

이 정든 파주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에 말입니다.

그러니 쉽게 찾을 수도 없겠지만 구태여 부탁합니다.

저를 찾아 경찰에 신고하거나 흥신소에 의뢰하지 말아 주세요. 만약 그런 일을 하면 저는 영영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저는 아빠의 넓은 등도, 엄마의 따뜻한 품도 모르던 아이였습니다.

저를 낳은 사람들은 외딴 보육원에 저를 버렸고, 보육사를 비롯한 직원들의 돌봄으로 저는 사람의 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밖에 나가 노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이인 저에게 세상은 책 속에 있었고, 100평 남짓 되는 보육원 안의 사람들이 인간관계의 전부였습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로 아무 불만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년이 되어 보육원을 나가게 되더라도 교사가 되어 돌아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 살이 된 어느 날, 저는 엄마의 품과 아빠의 등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어떤 경험보다도 경이롭고 충만했습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감각이 가슴까지 내려갈 때 저의 인생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음을 곧바로 깨달았습니다.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땐 저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아 무서웠고, 그래서 당신을 없는 사람 취급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까스로 소중한 몸을 지켜냈던 그날, 당신은 나를 끌어안고 몇 번이고 사과했습니다. 그때서야 당신이 그저 서툴렀을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함께 있던 일 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딸로서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받았고, 당신과 함께 한 팔 년 동안 여동생으로서 차고 넘칠 정도의 우정과 헌신을 받았습니다.

이대로 둘이서 죽을 때까지 한 지붕 아래서 자매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저는 깨닫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건 당신에게도 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당신은 저 때문에 가장 찬란하게 빛날 이십대에 사랑 한 번 못 해봤습니다.

저는 그런 당신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묻혀 있던 재능을 끝끝내 개화하는 당신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질투심 역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먼 곳에서 서로의 행복을 비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당신은 지금의 저와 같은 나이에 스스로는 물론 어린 동생까지 지켜내야 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하게 될 고생은 감히 당신에 비할 바도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변명하며 펜을 놓지 않겠습니다. 진정 제가 원하는 이야기를 찾을 때까지 멈춰서 있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스스로의 이름 앞에 작가라는 직함을 떳떳하게 달 수 있게 되는 날, 다시 이 집에 돌아오겠습니다.     


하늘에 가을의 대사각형이 떠 있습니다. 탕아가 시련과 고난 끝에 집으로 돌아왔듯 저 별도 일 년 후면 다시 회귀할 것입니다.

제가 이 집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돌아올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엄마와 아빠가 어딘가에 있고, 언젠가 돌아오리라고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믿기만 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 가족은 늘 함께 있습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지고의 사랑을 담아…──────     


태미수를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동생

태 미 래     



17     


은비는 어느새 몸을 돌리고는 미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늘 밝은 모습만 보이던 미수이기에 어딘가 말 못할 그늘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해 왔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은비는 눈앞에서 베개를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린 스물여섯 살의 미수에게서 당시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된 열여덟 살의 미수를 떠올리게 되었다.

“…정말로 실종신고도 안 했어요?”

은비가 조심스럽게 묻자 미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서 제일 꺾기 힘든 게 내 동생 고집인걸. 만약 그렇게 억지로 찾아냈다면 날 절대 용서 안 했을 거야.”

은비는 잠자코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과연 자신이 함부로 해도 되는 이야기일까. 미수는 은비의 얼굴에서 그를 읽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이렇게 된 건 내 책임이 커. 내가 그 아이에게 바란 건 그저 평범한 행복이었어. 누군가와 만나고, 놀고, 싸우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배우고, 성장하는… 그런 행복.”

완벽하게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는 부모는 극소수다. 하물며 미수는 부모도 아닐 뿐더러 같이 나고 자란 자매도 아니었다. 그런 미수에게 소녀는, 아니 미래는 어떤 의미에선 정말 어려운 동생이었다. 성장 배경도 재능도 성격도 여러모로 비범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사람과 환경으로는 미래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미수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북돋아 주려고 했다. 언젠가 자신이 개척한 환경에서 자신만의 소중한 상대를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좀 더 믿어 줬어도 됐는데. 충분히 자신만의 길을 찾아내고 나아갈 수 있는 아이였는데. 내가 너무 서툴렀어.”

만약 자신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차라리 회사가 아닌 대학교를 다니며 좀 더 일찍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했던 게 아닐까? 보호자 입장에서 마냥 돌봐 주는 게 아니라 흔한 자매지간처럼 유치하게 으르렁거리고 싸우고 또 화해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미래가 사라지고 몇 달간 미수는 혼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식으로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잘못되었는지 복기하곤 했다. 그러다 보면 ‘차라리 계속 차갑게 굴었으면 부모님이 둘이서 비행기를 타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런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까지 다다라 사건 이후 몇 년 만에 극심한 자기혐오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나야말로 그 아이한테 알게 모르게 의존하고 있었던 거야. 버텨내기 위해서…”

그를 떨쳐내게 된 계기는 은비와의 만남이었다. 게임회사와 같이 일을 하고 있지만 학생 때도 성인이 되어서도 딱히 게임을 즐기지는 않았다. 단 하나의 예외가 스피릿 스트림이었다. 장르소설 레이블 관리를 맡으며 서브컬처 팬덤의 트렌드를 파악하고자 몇몇 유명 커뮤니티를 정독했고, 그러던 중 ‘개쩌는 브금.mp3’라는 제목의 글을 누르고 듣게 된 게 은비가 만든 BGM 중 하나였다. 밑의 댓글들은 “은비좌 곡을 들고 오려면 다른 걸 들고 와야지 ㅉㅉ” “구작 그만 좀 빨아라 똥꼬 헐겠다” 등 적나라한 말투로 서로 쏘아대고 있어서 순간 미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자연스럽게 미수는 스피릿 스트림의 다른 곡들도 찾아서 듣게 되었고, 일을 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게임 본편도 플레이하게 되었다. 전업 작가의 길을 결심하고 출판사를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처녀작에 해당되는 옛날에 쓴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제나두워크스의 프로듀서라는 사람이 연락을 해 왔을 때만 해도 그저 빨리도 OSMU의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그리고 미래가 집을 나간 이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하난이 보내 온 서류에서 무심코 크레딧에 눈길이 간 미수는 ‘음악 감독 : 유은비’라는 이름에 벌떡 일어나 눈을 비비고 다시금 확인했다. 곧바로 하난에게 전화를 건 미수는 ‘그 스피릿 스트림의 유은비가 맞냐’고 다그치다시피 물었고, 다음 미팅 때 꼭 데려와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간만에 정장을 차려 입고 나간 자리에서 처음으로 만난 은비는 외모나 분위기나 미래를 쏙 빼닮은 친구였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런 느낌은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매사에 진지해서 잘 웃지 않고, 그 때문에 다소 어려운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주기 쉬운, 그러나 가끔 감정이 폭발할 때는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그러면서도 주변에 대한 호의를 절대 잃지 않는….

“정말 똑 부러지는 동생이었나 봐요. 언니랑 다르게.”

은비는 모니터를 끄고는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미수가 들고 있는 베개를 뺏어서는 옆에 나란히 누웠다. 미수는 생각했다. 그래, 이런 모습도 미래와 헷갈릴 정도로 닮았어, 라고 말이다.

“응. 내 동생은 나보다 훨씬 대단한 애니까.”

하지만 미래는 미래고, 은비는 은비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은비는 미래 대신이 될 수 없다. 외로움을 달래고자 은비를 미래처럼 대하는 건 자칫하면 은비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은비도 미수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비는 기꺼이 미수의 응석을 받아주었다. 어색하면서도 최선을 다한 은비의 배려에 미수는 눈가가 흐려지고 코가 꽉 막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은비는 말없이 돌아누워 미수의 머리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 콧물을 쏟아내는 미수 덕에 잠옷 가슴팍이 젖어가는 걸 느끼며 ‘어제 빨았는데 아침에 또 빨아야겠네…’ 하며 은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일요일 늦은 오후의 지하철 안은 습기와 열기로 가득했다. 우주는 눈앞에 자리가 난 것도 모른 채 멀뚱히 서서 애꿎은 입술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반대편 문에서 탄 승객이 건너와 가방부터 던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우주는 미래가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미래는 자신의 언니에게서 안락함과 동시에 벽을 느꼈다. 그것이 언니에게나 자신에게나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집을 나왔다. 그리고 이날 이때까지 혼자서 힘내왔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우주에게 한 걸까? 마지막이라는 말과 함께 보인 눈물과 키스는 무슨 의미였을까?

우주는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런 건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나 미래는 자기 멋대로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뒤쫓으려던 우주는 문득 자신이 미래가 사는 곳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미래와 안 지 한 달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서로 시시한 걸로 다투고 또 화해하고 감정을 나누며 밀도 있는 만남을 계속하다 보니 무심코 잊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고 시간을 보낸다는 건 그런 것이다. 같이 있는 순간이 충만하다고 느끼면 의외로 각자가 살아온 과거와 살고 있는 현재의 일상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열두 시가 되고 마법이 풀리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나와 상대가 엄연히 다른 인생을 살아온 별개의 개체임을 실감하고야 만다.

신데렐라는 먼지투성이 천덕꾸러기인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도망쳤다. 그렇다면 이제 왕자가 그녀를 수소문할 차례다. 그러나 우주는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 미래를 억지로 찾아내는 게 정말 맞는 일일까, 자신은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러한 잡념들이 돌아오는 내내 우주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른 한편으로 우주는 미주를 떠올렸다. 입사 오 년 만에 제나두워크스를 퇴사하고 온 날 미주는 식탁 가득 음식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면목 없어 하는 우주에게 미주는 “이제 저녁밥 혼자 먹을 일 없어서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저녁밥은 거의 우주 혼자 먹게 되었다. 미주가 잔업과 야근을 늘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을 해서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있지만 엄연히 가출 청소년인 미래를 붙든다는 게 얼마나 잠재적인 부담을 야기할지 어렵지 않게 상상한 우주는 스스로에게 적잖이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누가 가장 슬퍼하고 고생을 할지 뻔히 알기에 비겁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일도와 함께 일하며 미주와 둘이서 동고동락하는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게 모두를 위한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세상에는 알아야 하는 진실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차라리 처음부터 모르는 게 나았다.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는 게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아니던가. 잘 알고 있잖아.

─책장에만 머무른 채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없으면 아무리 지식이 쌓여도 인간으로서의 넌 제자리걸음일 거야.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세계가 늘 호의적이란 보장이 없다. 별다른 보험도 없이 알 수 없는 일에 뛰어드는 걸 종용하는 것이야말로 책상물림의 소산이 아닌가.

우주는 자꾸만 떠오르는 소녀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으려 기를 썼다. 그러나 오히려 더더욱 소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 한 번 더 강우주 씨 그림을 보고 싶어. 내가 쓴 글도 보여주고 싶어. 친구끼리 하는 것들을… 하고 싶어.

그러고 보니 아직 미래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친구로서 해보지 못한 게 차고 넘쳤다. 아니, 그저 인간 태미래와 좀 더 여러 가지를 하고 싶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가르쳐주고 싶었다. 이대로 끝내는 건 싫었다. 하지만─     


─만약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 우주 씨가 날 붙든다면, 난 그대로 우주 씨에게 날 바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갑자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언가 찌릿한 느낌이 우주를 관통했다. 곧바로 우주는 만지작거리던 입술을 그대로 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건 미래의 명백한 S.O.S 요청이었다. 자신을 붙들어 달라고, 멈춰 달라고 있는 힘을 쥐어짜낸 외침이었다. 열아홉 살 소녀의, 최고의 친구의 구조 요청을 애써 모른 체 하고 몸을 빼려는 자신은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뭐가 그렇게 잃을 게 많다고 외면했던 걸까. 혈혈단신의 소녀가 자기만을 의지하고 있는 이 상황에, 그를 저버리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대단한 게 무엇이란 말인가. 우주는 스스로에 대한 맹렬한 혐오감과 함께 고개를 쳐들었다.

-이번 역은 수유, 수유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우주는 문 앞에 섰다. 지금 당장 미래를 찾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다. 그 아이가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는 확실하다. 우주는 롯데월드에서 미래가 한 말을 떠올렸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책임감이 강한 그녀가 지금 있을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티블리 안나의 디너 타임 개시 삼십 분 전이었다. 퇴근을 앞둔 하린은 테이블을 닦으며 다른 스태프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현지는 화장실에 숨어서 통화라도 하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냅킨통을 채우는 이재는 오늘따라 신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종종 움직임을 멈추고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은근히 사무실 쪽을 돌아보았다. 미래는 멀리서 봐도 좋지 않은 안색으로 대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미래의 컨디션 난조를 단박에 알아챈 이재가 휴게실로 끌고 가 강제로라도 눕혔을 텐데 오늘은 눈치 채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디너 타임이 시작하는 순간 온 가게가 전장이 되는지라 브레이크타임은 보통 힘을 빼지 않고 조용히 흘러가긴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마치 폭풍 전야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미래는 오늘 모든 결심을 다 마친 상태였다. 우주에게 작별을 고한 후, 곧바로 택시를 타고 가게까지 도망쳐 와서는, 사장에게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었다고 양해를 구할 결심이었다. 몸은 아까부터 한계까지 다다라 있었다. 대걸레질을 하기보단 대걸레를 잡고 버티고 있었다. 사무실에 있는 두영의 면담이 길어질수록 미래는 당장이라도 우주가 가게 문을 박차고 들어올까 조마조마했다.

집을 나올 때 미래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사람이었다. 여사장이라는 호인을 만나 보금자리를 얻었지만, 동료들의 악의에 무척 괴로워했고, 이재라는 좋은 상사를 만나 가까스로 구원 받고, 그 외에도 여러 사람과 맨몸으로 부딪히며 때로는 보람을, 때로는 감사를, 때로는 뼈아픈 좌절을 겪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건 이렇게나 달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뜻밖이었던 건 우주와 만나 그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첫 만남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만날 때마다 어느 부분에서 자신의 미숙한 감정을 흔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와중 얼핏얼핏 보여 주는 상냥함을 외면하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자 어느새 하루 종일 미래는 우주의 연락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미래는 더 이상 예전처럼 글을 막힘없이 쓰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구축한 견고하다고 믿어 온 사상관, 세계관, 인간관… 그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고고하면서도 고유한 십구 년 인생과 그에서 나온 모든 형이상학적 결과물이 한순간에 흔한 사춘기 소녀의 자물쇠 달린 다이어리의 내용물이 되는 감각이었다. 다이어리의 페이지 하나하나가 찢겨나가고 그 자리를 우주의 얼굴이, 목소리가, 손끝이 대신 채워갔다.  그러나 정작 미래를 점유하는 감정은 허무함이나 상실감이 아니라 만족감과 따스함이었다.

동시에 미래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더 이상 우주를 만나기 전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또 다시 타인에게 자신을 의탁해 버릴 것 같은 두려움. 그 결과 자신은 언니가 말한 대단한 존재가 되지 못한 채, 어느 것으로도 그 대단함을 증명하지 못한 채, 한때 천재 소리나 들어 본 흔하디 흔한 고아 소녀가 될 것 같은 두려움. 그렇게 영영 언니를 볼 낯이 없어 다신 만나지 못하게 될 두려움.

그러니 이젠 모든 걸 단절할 수밖에 없다. 사장의 온후함도, 이재의 오지랖도, 두영의 넉살도, 하린의 무표정도, 현지의 어리광도… 그들은 모두 우주를 알고 있고, 우주와 친하고, 우주와 자신을 연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미래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그 눈물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달래기 위한 눈물이니 이 자리에서 멋대로 흘리면 안 된다. 무책임하고 제멋대로라 욕을 먹더라도 이들에 대한 배신의 대가로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 말이다.

사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두영이 신묘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이재가 돌아보며 일순 두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리는 걸 하린은 놓치지 않았다. 미래는 대걸레를 벽에 세워 놓고는 사무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것으로 여기서의 인연은 끝난다. 당분간은 텐트에서 혼자 글을 쓰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다. 지난 반 년 간의 소중한 기억을 위안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몸이 무거워졌다. 눈앞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아직이다. 조금만 더 버텨야 한다. 매듭은 깔끔하게 지어야 한다…

사무실을 세 발자국 남기고 미래는 눈앞이 하얘지며 온몸의 힘이 탁 풀렸다. 의식을 잃기 전 그녀의 귓가에는 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털썩!

“실례합니다!… 아앗!”

출입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마자 우주가 본 것은 바닥에 쓰러지는 미래였다. 순간 옆에 있던 이재, 두영, 하린과 화장실에서 나오던 현지가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전광석화의 속도로 달려온 현지는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밀어내고 미래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다. 사장은 어느새 사무실에서 혈압계와 체온계를 가져와 측정하고 있었다.

하린이 수건에 싼 아이스팩을 가져와 미래의 유니폼을 벗기는 사이 이재는 휴대폰으로 바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예. 열아홉 살 여자애고요. 방금 막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어요. 다른 외상은 없고요, 무호흡이나 심정지도 없어요. 바이탈은 190에 110에 120, 체온은 9도 8부. 여기는 티블리 안나 2호점이에요. 빨리 와 주세요!”

마치 예행연습이라도 한 듯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일반인 차원의 소생술을 실시하고 있었다. 우주는 도저히 끼어들지 못하고 출입구 앞에서 멀뚱히 서 있다가 잠시 후 들것과 함께 들어온 구급대원에게 허둥지둥 길을 비켜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여사장은 가디건을 걸치고 나오며 직원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따라갈 테니까 다들 당황하지 말고 업무에 집중해요. 이재 씨, 두영 씨! 가게 좀 부탁해요!”

“…네.”

얼굴에 근심이 잔뜩 서린 이재와 두영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여사장은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거리고는 우주를 돌아보았다.

“…여기 이렇게 왔다는 건 결심이 섰다는 의미겠죠?”

우주는 잠시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이내 여사장의 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그럼 어서 따라와요!” 여사장은 우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도는 비닐 우의를 입고 흙바닥에 대충 주저앉아 있었다. 바지에 흙탕물이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차피 그 전에 옷이 전부 땀으로 절어 있어서 이제 와선 그것이 찝찝함보단 시원함으로 다가왔다.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니 일회용 라이터에 불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새 땀이든 빗물이든 물이 스며들어 있었나 보다. 아침에 마을 공원 관리인의 전화를 받고 가서 얇은 우의 한 장 걸치고 오후 늦게까지 작업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불을 당겨도 불이 켜지지 않자 일도는 “에잉!” 하며 바지 주머니에 라이터를 도로 우겨넣었다. 몇 발자국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우비 차림의 중년이 다가와 앉았다. 일도가 고개를 돌리자 중년은 씨익 웃으며 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 팅 하는 경쾌한 금속음을 내며 일도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고맙습니다, 부장님.”

“제가 고맙죠, 유 사장님.”

시청 토목부장은 가볍게 대답하며 자신 역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둘은 공원 뒷산의 법면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무원이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전 태양광 이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

일도는 대답 없이 담배에 열중했다. 부장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 년 중 절반 가까이 비나 눈이 오는 나라에서, 태양광 발전으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량과 토사 붕괴의 위험을 감수하며 멀쩡한 자연을 파괴함에 따라 손실되는 에너지량을 비교하면 말이죠. 과연 몇 십, 몇 백 년이 지나야 전자가 후자를 상회하겠습니까.”

“흐흐, 그래서 오늘 절 불러서 자문도 구하시고 씨드스프레이도 뿌리신 거 아닙니까.”

일도는 살짝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차피 다 욕 먹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다는 걸 일도는 잘 알고 있었다. 몇 미터짜리 배수관을 박고 배수홀을 뚫든, 법면 토양이 흘러내리지 않게 붙들어주는 씨앗을 얼마나 뿌리든, 정말 큰 비바람 앞에는 장사가 없다.

하물며 업체란 놈들은 나라에서 주는 눈먼 지원금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윤을 남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공무원들은 최소한의 법적 기준만 맞추면 나머지는 딱히 관심이 없고 막상 일 터지면 서로 책임 전가나 하기 마련이다.

태양광 발전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토목 부장은 여차할 경우 자기가 책임을 지는 자리에 앉아 있기에, 일도는 도와주면 일당 쏠쏠히 쳐 준다고 해서 일요일 온종일 비를 맞으며 일했다. 프로로 일한다는 건, 돈 받고 일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자, 그럼 마무리하고 슬슬 집에 갈까요.”

부장은 끙차 하며 일어나서는 오후에 묻은 배수관에 담배꽁초를 대충 던졌다. 엉덩이를 탈탈 털며 산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부장은 “어?” 하며 품에 있던 안경을 썼다. 그러더니 일도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사장님, 저기 산 아래 있는 거 텐트 아니에요?”

부장이 손으로 가리키는 끝을 일도는 유심히 보았다. 정말로 3~4인용 초록색 텐트가 나무와 수풀 사이에 교묘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관리인은 저런 거 있다고 얘기한 적 없고… 애초에 불법 야영이니까 그냥 철거해버리죠.”

“어휴, 오늘 못 보고 넘어갔다가 나중에 사고라도 났으면 호된 일을 치렀을 겁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부장을 뒤로 하고 일도는 일어나 몸을 풀며 말했다.

“마침 저 아래에 포터도 끌고 왔겠다, 전 저거 철거하고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고는 일도는 조심스럽게 산을 내려갔다. 올라왔던 산길로 내려가자니 빙 돌아가는 형국이 되어 버려 아예 직진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하루 종일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작업한 몸으로 상당한 경사의 루트를 강행하려니 팔다리가 욱신거렸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은비를 생각하며 일도는 간신히 산 아래에 도착했다. 나무 몇 개를 헤치고 들어가자 아까 본 텐트가 있었다. 그 너머로는 나무와 수풀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어지간히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법도 했다. 꽤 오랜 시간 야영을 했는지 텐트 천은 얼룩과 곰팡이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텐트 입구부터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수풀은 한 사람 분의 보폭만큼 밟혀 있었다. 누군가가 여기를 왕래하고 있음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지금 저 안에 그 당사자가 있는 게 아닐까? 일도는 살짝 긴장한 채 텐트를 툭툭 치며 말했다.

“계십니까? …누구 계십니까?”

인기척이 없었다. 일도는 불안한 마음으로 “잠시 실례하겠습니다.”하며 텐트 지퍼를 내렸다. 살짝 머리만 넣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도는 코를 감싸 쥔 채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곰팡이와 습기로 가득한 텐트 안은 침낭, 손전등, 코펠, 버너, 냄비 같은 최소한의 캠핑 용구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침낭을 만져 보자 습기를 가득 먹어 눅눅해져 있었다. 버너는 가스가 떨어졌는지 불이 켜지지 않았다.

침낭 바로 옆의 이사용 플라스틱 박스에는 몇 벌의 옷와 속옷이 아무렇게나 포개져 있었다. 역시나 습기를 먹은 채 파란 곰팡이가 끝부분부터 피어나고 있었다. 짐작하건대 몇 주 간 내린 빗속에서 습기와 곰팡이에 대한 마땅한 대책도 없이 그저 버티기만 했을 것이다. 일도는 무심코 한숨을 푹 쉬었다.

한편 텐트 구석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책과 공책 그리고 앉은뱅이 밥상이 일도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 역시 상당수가 습기를 머금은 채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특이한 건 대부분 비교적 최근에 구입한 책이라는 점이었다. 우기에 이런 데서 죽치고 야영을 할 정도로 생활 감각이 없거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책은 꾸준히 사서 보다니, 누가 봐도 이 텐트의 주인이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사정은 있겠지만 정말 안쓰러워 못 봐주겠군.’

일도는 잡념을 떨치고 텐트를 철거할 순서를 머릿속에 그렸다. 우선 안에 있는 집기들과 짐을 전부 빼고, 젖을 수 있는 것들은 비닐을 씌워 놓는다. 그리고 나서 포터를 가까이에 대고 전부 싣고 나와서 관리사무소에 인계하면 된다.     

삼십 분 정도 걸린 끝에 일도는 텐트까지 철거하여 포터에 실었다. 운전석에서 숨을 고르고 있자니 문득 조수석에 둔 책과 공책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일도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기장’이라 적힌 공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혹시라도 신원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리화하면서.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일기장은 다소 악필로 쓰여 있어 가독성이 떨어졌다. 어지간하면 빠뜨린 날짜 없이 꾸준히 기록된 일기를 읽으며 일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독서에 몰입했다.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일도는 숨 쉬는 것도,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읽고 있었다.

어제 자 일기가 쓰인 마지막 장을 덮고 나자 이미 시계는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청 토목과와 업체는 한참 전에 철수했을 것이다. 일도는 잠시 숙연해지더니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조수석 앞 수납 칸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머리를 기댄 채 후 하고 내뿜은 담배 연기는 창문으로 나와서는 비와 함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11월 ○일. 기념비적인 독립 첫 날 밤을 센트럴터미널 근처의 찜질방에서 맞고 있다.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자다가 하루아침에 얇은 매트 한 장만 깔고 자려니 팔과 허벅지가 배긴다. 수면등 아래서 남자들이 잘 자리를 물색하며 옆을 서성거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익숙해져야 한다.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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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일. 주방 아르바이트 보름째. 뼈마디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무서운 기세로 밀려들어오는 설거지를 도무지 남들과 비슷한 시간에 끝내지 못하다보니 쉬는 시간에도 혼자 싱크대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일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부조리장 오빠가 “아침저녁으로 바르면 좀 낫다”며 약국에서 사온 안티푸라민을 다른 직원들 몰래 건네주었다. 퇴근하려는 걸 홀 매니저님이 붙들더니 온장판 위에 엎어 놓고 파스를 붙여 주셨다.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좀 더 버텨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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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일. 마침내 강미주 작가님의 행방을 알아냈다. 진리연출판사 측은 작가님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 알려줄 수 없다고 해서 학생 기자를 가장하여 작가님이 후기에서 언급한 몇몇 지역의 구청이나 동사무소를 찾아다녔다. 다섯 번째로 방문한 곳의 직원은 지하철역에서 꽤 떨어진 동네를 짚어 주며 내가 제시한 나이와 똑같은 강미주라는 이름의 여성이 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운 좋게도 티블리 안나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식으로 채용도 되었겠다, 시간 날 때 동네를 탐색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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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일. 마침내 내 보금자리가 생겼다. 이제 찜질방을 전전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좋은 건 더 이상 희미한 수면등에 의존해 엎드려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집을 나온 지 두어 달 만에 의식주를 어느 정도 해결하게 된 건 내 노력만으로 일군 게 아님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주어진 일상과 환경에 감사하며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내가 진정 쓰고 싶은 걸 깨닫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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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일. 세계는 언제나 친절한 양태로 다가오지만은 않는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난다. 내 선배란 작자들은 자기들보다 어리고 몸집도 작은 후배가 똑같은 대우를 받고 일하는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이럴 때 기선을 제압하는 법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 장소에 미련이 없을 때나 쓰는 제로섬 전략이다. 아직은 더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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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일. 열심히 소설을 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 스스로 이게 재밌는지 모르겠다. 쓸 때도 쓰고 난 뒤에도 재밌었던 건 결국 그 해 여름 언니와 함께 쓴 장편뿐이었다. 요즘은 그보다 가게 사람들 보는 게 재미있다. 두영이 오빠는 가끔은 매니저님 놀리는 낙으로 사는 초등학생 같아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매니저님이 씩씩거리며 돌아서면 그 모습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저것이 누군가를 연모하는 눈이란 걸까. 나도 사랑을 하게 되면 저런 눈을 하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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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일. 마침내 강미주 작가님을 만났다. 예상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우셔서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작가님을 그렇게 만든 원흉인 강우주라는 놈도 만났다. 덩치도 산만하고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놈이 일 같지도 않은 일이나 하며 유유자적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 그런 주제에 내 말꼬리를 잡고 훈계나 하고! 사실은 가게에서 걔가 못 본 사이 씨앗 하나를 슬쩍해 왔는데 본의 아니게 죄책감을 덜었다. 아마 사장한테 적잖이 혼났을 것이다. 어차피 두 번 다시 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그건 키스도 뭣도 아니다. 전술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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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일. 강우주, 도대체 너는 정체가 뭘까? 내가 살면서 본 가장 텅 빈 껍데기 같은 사람이 너인데, 어떻게 너의 손끝에서는 그렇게 풍부한 감정이 나오는 거야? 내가 너를 잘못 본 걸까? 스스로 채워지지 않는 내 갈증을 그저 너에게 투영한 것뿐일까? 무엇보다 왜 자꾸 너 같은 사람을 난 신경 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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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일. 우주 씨와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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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일. 두렵다.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내가 두렵다. 타성으로라도 쓰던 글도 이젠 더 이상 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린 언니의 대시가 마냥 싫지만은 않아 보이는 우주 씨의 태도가 신경 쓰인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저 친구일 뿐인데. 나보다 열 살은 많고, 어수룩하고, 센스도 엉망이고, 배려심도 없고, 어쩌다가 자상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일 뿐인데. 내가 그런 사람을 남자로서 좋아하게 됐다고? 이건 아무래도 진지하게 재고를 해 봐야 할 이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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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일. 너무나 아프다. 몸도 아프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아프다. 당신이 나를 여자로서 좋아할 가능성이 낮다는 게, 누구보다도 나와 닮았다고 여긴 당신이 나와는 척 봐도 다른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고 또 그를 굳이 밀어내지 않는 모습이 시리도록 아프다. 그래놓고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마. 혹시 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 버리잖아. 내가 적극적으로 당신을 좋아한다고 하면, 이 천둥벌거숭이 유아독존의 화신 태미래가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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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일. 전할 말이 있어 미리 일기를 씁니다. 강우주 씨. 저는 오늘 당신에게 이별을 통보할 것입니다. 저는 결국 또 다시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저 자신의 중심을 잃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의 달콤함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사명도 약속도 모두 던져버리고 싶게 만듭니다. 만약 당신이 일말의 손길을 베푸는 대신 모든 걸 버리라고 한다면 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그저 사랑에 빠진 평범한 소녀로, 아니 가출 소녀로 전락하겠죠. 그래서 전 제 마지막 이성과 의지와 향상심을 짜내어 결심했습니다. 제 멋대로 마음을 전하고, 제 멋대로 사라지겠습니다. 만약… 만약 당신이 나를 기어이 찾아낸다면, 제 모든 걸 당신에게 바치며 살겠습니다. 당신에게는 저를 감당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18


비가 오는 일요일 밤 9시의 도로는 나름대로 차가 다니고 있었다. 이재는 창문에 머리를 괸 채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지는 걸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두영은 옆에서 말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택시 기사는 이따금 뒷좌석을 힐끔힐끔 보며 두 사람의 관계를 궁금해 했다.

“너무 무리를 시켰어. 좀 더 빨리 인력을 보강했어야 했는데.”

먼저 말을 꺼낸 건 이재였다. 두영은 휴대폰 화면만 끄고는 그대로 앞을 보며 대꾸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그나마 지금 쓰러져서 다행이라고. 더 피로가 축적됐으면 훨씬 예후가 안 좋았을 수도 있어요.”

“쓰러진 게 다행이라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못 한 걸 후회하면 끝이 없으니까요. 이미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고, 불가항력적인 부분도 있었고. 계속 자책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힐까봐 하는 얘기예요.”

핀잔을 주는 이재에게 두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재는 쓴웃음을 지었다. 연하인데도 두영은 늘 이렇게 여유롭고 어른스러웠다. 그러니 다혈질에 왈가닥 땅꼬마인 자신은 전혀 눈에 차지 않을 거라 여기고 진작 기대를 접었었다.

“당사자한테 그 워딩 그대로 들려주면 볼만하겠네.”

“에이, 그 친구가 이재 씨처럼 유치한 것도 아니고.”

“죽을래?”

그저 편하니까 거리낌 없이 장난치는 거고, 자신은 그걸 받아치면서, 그러한 감정의 교환이 일종의 자신만의 특권이라 여기며 위안을 삼아 왔다. 만약 자신을 여자가 아닌 일종의 장난감으로 취급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아예 처음부터 분명하게 선이 그어진 다른 여자들보단 낫다는 피폐한 자기합리화까지 하기 직전이었다.

“그 유치한 매니저를 믿고 다들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으니까, 너무 자학하지 말라고요. 관리자가 여유를 보이지 않으면 실무자가 어떻게 믿고 따르겠어요?”

“…”

이거다. 장난이나 치다가도 얼핏 보이는 다정함. 이것이 오히려 이재를 번민하게 하고,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다시 장난을 치며 다가오면 내심 변화 없이 안정적인 소통 활동에 안심하면서도 동시에 얄팍한 기대가 무너지며 익숙한 좌절이 축적되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거리 위에서 자신을 밀어붙이던 두영은 더 이상 그런 안정적이고 편한 연하의 장난꾸러기가 아니었다. 큰 뜻을 품고 어린 나이에 뛰어난 재능에 무지막지한 노력까지 더해 온, 직인으로서의 관록이 뒷받침된 대담함을 두른 ‘남자’였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는 숫기 없는 여자 한둘쯤은 순식간에 포로로 만들어버릴, 강한 수컷 말이다.

가게에서부터 이재는 두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이따금 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왔느냐고, 잘못 들은 게 아니냐고. 거기엔 둘 다 좋아했다는 희박한 가능성을 바라는 마음보단 사실 장난이었거나 잘못 들은 것임을 확인하고 언제나처럼 안심하고 좌절하는 일상으로 복귀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아까 사장님하고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했어?”

그러나 역시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두영아.” 이재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두영은 굳은 얼굴로 이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재가 수줍음에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 할 때였다. 두영이 이재의 손을 덥석 쥐었다.

이재가 심장이 터지려는 걸 애써 숨기고 있는 사이 두영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져 두영의 목소리가 마치 물속에서 웅웅거리며 들리는 것 같았다.

“저 이번 달까지 일하고 프랑스로 공부하러 가요.”

물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머리랑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싸늘한 냉기가 이성을 냉각시킨다. 이재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사장님 동문 중에 파리에서 미쉐린 레드가이드 별 세 개를 받은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사람이 있어요. 거기 수습 조리사 자리가 얼마 전에 비었는데, 사장님이 이번 달을 기한으로 킵해놓고 저에게 제안하셨어요.”

이재의 차가운 머리는 선고하고 있었다. ‘이제 두영을 볼 수 없다’고.

“제대로 배우고 오려면 얼마나 걸릴지 몰라요. 당장 프랑스어부터 얼마 전부터 알음알음 독학하고 있지만 거기서 직접 배우는 건 또 다를 거고, 물과 풍토가 다르니 재료 손질부터 새로 배우게 될 거에요.”

바라보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달래 오던 일상도 이젠 없다.

“그래도 갈 거예요. 가서 많이 배우고 겪어서, 언젠가 제 이름만 들어도 음식을 기대하게 하는 셰프가 될 거예요.”

두영은 떠나려고 한다.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 않았던가. 이런 평범한 경양식집에서 언제까지고 있을 녀석이 아니란 걸. 얼마든지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본인의 의지도 확고하다는 걸.

그렇다면 연장자로서, 두영을 좋아하고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해 줄 말은 정해져 있다.

“좀 더 빨리 알려주고 싶었는데, 고민하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말하게 돼서 미안해요. …이재 씨, 저는…!”

‘…싫어.’

“이야, 대단한데! 역시 허두영이야!”

어른이 된다는 건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을 구분하는 것을 포함한다. 후자를 전자로 자연스럽게 보이게 할수록 더더욱 여기서 말하는 어른에 가까워진다.

‘…가지 마.’

“그럼 나중에는 미슐랭 3스타가 내 밑에서 일했다고 자랑해도 되는 거야?”

두영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계속 입을 우물거렸다. 이재는 필사적으로 말을 계속하며 그를 막았다. 이제 떠날 사람에게 어떤 여지도 남겨두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이 자리에서 그의 말을 듣고 평정심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  

택시가 병원에 도착하자 이재는 “계산하고 와! 나중에 보내 줄게!” 란 말과 함께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차에서 내려 뛰어갔다. 병원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이재가 지나간 로비에, 복도에 눈물방울이 흩날렸다. 병원에서 뛰지 말라고 소리치며 쫓아오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이재는 우뚝 섰다. 조용히, 그러나 어른 행세를 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이재는 중얼거렸다.

“…정말 좋아해. 두영아.”     




일요일 저녁의 중환자실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모든 환자들이 예외 없이 산소 호흡기를 비롯한 각종 생명 유지 장치를 달고 있었고, 거기서 나는 규칙적인 신호음이 소리의 전부였다. 방진복을 입은 두어 명의 간호사가 조용히 걸어 다니며 차트를 작성하거나 의국과 통화하는 것 외에는 움직이는 것의 기척이 없었다. 여사장과 우주는 AP 가운과 마스크를 낀 채 미래를 지켜보고 있었다.

급성 폐렴이었다. 종종 고열과 오한을 호소했다는 여사장의 말과 엑스레이 및 CT 촬영을 통해 의사가 내린 진단이었다. 도대체 고열 때문에 혼절할 때까지 병원 한 번 데려오지 않는 게 말이 되냐는 의사의 꾸지람을 여사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들었다.

미래의 상태는 여느 급성 폐렴 환자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반 혼수상태에 접어들었고 석션을 할 때마다 검붉은 가래가 욱씬하고 뽑혀 나왔다. 의사는 별 고민도 없이 중환자실 전동을 지시했다.

근무를 끝내고 서둘러 온 이재와 두영은 미래의 손을 어루만지고 이마를 쓸어주다가 우주를 격려하고는 귀가했다. 시계가 어느새 오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간호사가 다가와서는 더 이상 면회가 힘들다고 말했다. “그럼 바깥에 대기실에 잠시만 앉아 있다 가게 해주세요.” 라는 우주의 말에 간호사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여사장은 자신을 미래의 보호자로 등록하고는 건강보험가입 확인이 안 되어 공제가 안 된 미래의 입원비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치렀다. 저런 게 어른이구나, 책임을 지는 거구나 생각하며 우주는 숙연해졌다.


“그럼 난 먼저 가 볼게요. 우주 군도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병원 입구를 나서며 여사장은 우주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우주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사장이 택시를 타고 가자 우주는 다시 대기실에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지금 미래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서 쉬게 하거나 병원을 데려갈 걸, 비 오는 서울 한복판을 걸어 다니게 하지 말 걸 하는 후회는 이제 와서 의미가 없었다. 미래가 그것을 완강히 바랐으니 우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그래. 엄마는 부엌 불 켜놓고 먼저 잘게.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통화를 끝낸 미주는 휴대폰을 쥔 채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집 안은 쌀쌀함과 우울함이 지배하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두 사람분의 식사가 손도 안 댄 채 랩에 싸여 있었다.

일도와 우주에게 연이어 걸려 온 전화 내용은 마치 작위적인 각본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소설가의 꿈을 품고 가출한 소녀가 동경하는 작가의 아들을 좋아하게 되고, 평범한 소녀의 연심과 글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쓰러지다니…. 십대들이 읽는 편의주의적인 인터넷 소설도 이렇게 쓰면 욕을 먹을 것이다.

엄마는 아들의 연인에게 일종의 연적과 같은 감정을 품는다고 한다. 그러나 미주는 미래를 처음 봤을 때, 그러니까 우주와 키스를 하고 있는 걸 봤을 때 흡사 어릴 적 은비를 보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우주를 빼앗겼다는 기분보다는 과거의 은비가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기분에 반가움이 일었다.

그러나 미래가 걸어가려는 길은 오히려 은비보다는 자신과 가까웠다. 세상과 맞서 그저 펜 하나로 대적하려는, 작가 말고는 다른 걸 염두에 두지도 않는…. 차이가 있다면 자신은 우주를 키우며 펜을 사수했지만 미래는 우주에게서 도망쳐서 펜을 사수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딱히 자신이 좋은 엄마였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십대의 자신이 할 수 있던, 번듯하진 않아도 안정적인 직업들 대신 대박 아니면 쪽박의 대표 직군인 전업 작가를 선택했고, 운 좋게 성공하고는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했다. 운동회 같은 우주의 큰 행사엔 참석했지만 김밥 한 줄 직접 싸준 적 없었다. 우주가 중학생이 된 이후로는 일 년에 같이 밥상에 앉는 횟수가 손가락으로 셀 정도가 되었다.

소박한 일상과 창작자의 소명 중 어느 쪽이 중요한지 객관적인 해답은 없다. 세상에는 그것들을 훌륭히 양립하며 사는 부모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저 미주는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와서 전자에 미흡했던 걸 후회하진 않는다. 그저 일어난 결과를 받아들이고, 속죄하는 심정 반, 증보하는 심정 반으로 하루하루를 지낼 뿐이다. 그렇기에 미래가, 그리고 우주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길 미주는 바랬다.

창밖에서 참새가 톡톡 하고 부리로 창문을 두드렸다. 미주는 창을 열어 참새를 맞아들였다. 참새는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개를 비틀어 물기를 떨궜다. 미주가 손을 내밀자 참새는 순순히 올라탔다.

“…그 아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지켜봐 주는 게 우리 일이겠지? 일도야…”

미주는 눈을 살며시 감고 참새에게 얼굴을 대었다. 기분 탓인지 참새가 날개를 펴서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마치 잊고 있었던 따스한 품을 상기시키듯.       



19     


저녁 7시 10분 전의 제나두워크스 1층 커피숍은 빈자리 없이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캐주얼하고 편한 복장이었고 간간히 코스튬 플레이를 방불케 하는 튀는 복장도 있었다. 테이블마다 치킨을 비롯한 파티 음식이 놓여 있었고 모든 사람의 앞에는 맥주잔이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도란도란 조용한 말소리가 들렸지만 다소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들이 알게 모르게 신경 쓰고 있는 단상 앞의 테이블엔 하난과 제나두워크스의 사장과 부사장 그리고 유통사 사장이 양복 차림에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하난은 세 사람에게 연이은 질문을 받으며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옆의 테이블에는 미수와 은비 그리고 세빈이 앉아 있었다. 미수는 예의 노출도가 강한 복장을 한 채 은비와 하난을 보며 히죽거리고 있었고, 은비는 태블릿을 켜서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하면서도 종종 미수와 눈을 마주쳤다.

7시가 되자 세빈은 일어나 하난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난은 “시간이 돼서 잠시 실례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세빈을 따라 단상 위로 올라갔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세빈이 마이크를 들었다.

“여러분. 금일 19시를 기하여 제나두워크스 신작 『버스터 걸즈』가 무사히 스팀에 업로드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를 기념하여 사장님께서 제작진 일동에게 축하 자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간사를 맡은 저는 이번 작품에서 메인 디자인을 맡은 아트3팀 선임 하세빈입니다. 서설이 길어지기 전에 우선 다 같이 건배부터 할게요!”

“건배!”

테이블별로 앉은 사원들이 일제히 잔을 들었다. 여기저기서 잔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세빈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신작의 총감독인 신하난 PD님을 모셔 보겠습니다.”

세빈은 마이크를 하난에게 넘기고 자리에 가 앉았다. 하난은 마이크를 받아 단상 한가운데 섰다.

“신하난입니다.”

하난이 꾸벅 목례하자 박수가 일제히 쏟아졌다. 은비 역시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가 사그라지자 하난은 입을 열었다.

“이번 작품이 총감독으로서는 세 번째 게임입니다만, 여러 가지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다보니 처음 맡은 게임보다 오히려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우수한 동료들 덕분에 어떻게든 만족할 만한 게임을 만들 수 있어…”

미수는 하난의 말을 경청하는 은비의 손을 툭툭 쳤다. 몸을 단상 쪽으로 돌리고 있던 은비가 고개만 돌려서 반응했다.

“재미없어…”

미수는 턱을 아래로 쭉 빼며 웃긴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세빈이 풋 하고 웃었다. 은비는 한심하다는 눈빛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세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미수를 보며 속삭였다.

“작가님, 멘트는 잘 준비하셨나요?”

“멘트요? 무슨 멘트?”

“사장님들 축사하기 전에 작가님이 이번 작품에 대한 소회를 말하기로 했잖아요. PD님이 저한테 그렇게 말했는데.”

어리둥절해 하는 미수를 돌아보지도 않고 은비는 태연하게 “아~ 전달하는 거 깜빡했다. 언니, 미안~” 하고 놀리듯이 말했다. 미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단상에서 하난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원작 『별과 바다의 전쟁』을 집필하신 태미수 작가님을 박수와 함께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당했다!’

미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은비는 등을 돌린 채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세빈은 “어쩐지… 그래서 복장이…” 하며 마음대로 납득하고 있었다. 하난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누가 주모자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미수는 의연한 얼굴로 단상에 올랐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 원작자였어?” “와… 섹시하다.” “회사 생활 안 해봤나… 저게 뭐야…” 바로 앞의 중역 세 사람은 미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여전히 웃음을 참고 있는 하난에게서 마이크를 받았다.

“태미수입니다. 오늘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하난보다는 박수 소리가 다소 작았다. 미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마이크를 입에 가져갔다.

“『별과 바다의 전쟁』은 제가 중학생 때 처음으로 쓴 장편 소설입니다. 그 뒤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지만 삼 년 전까지는 한 번도 출판 시도를 해 본 적도, 인터넷에 올린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신하난 PD에게 의뢰 메일을 받았을 땐 정말로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소설이 그렇게 인기가 있다고 실감하지 못했거든요.”

어느새 청중은 다시 경청 모드로 돌아가 있었다.

“이번에 저의 소설이 게임으로 만들어지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나눈 시간은 게임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는 거나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개런티 반납하세요!”

두 테이블 건너 앉은 빈우가 외치는 말에 청중들은 자지러졌다. 하난은 찌릿 하고 빈우를 노려보면서 앞에 앉은 중역들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그들도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미수 역시 웃음을 간신히 참고 말을 이었다.

“충고 감사합니다, 고 감독님. …저는 삼 년 전까지 파주의 한 출판사에 다녔습니다. 책이 좋아서 간 게 아니고, 동생이 입사 지원을 해 줘서 면접 보고 들어갔습니다.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고, 그다지 좋은 기억도 없었어요. 그저 직장이니까 다녔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 별 문제 없이 협업을 할 수 있었어요.”

개인사 이야기가 나오자 은비는 미수가 말실수라도 할까봐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미수는 차분하게 말을 계속했다.

“지금은 제 직업을 작가라고 말하는 데 아무 망설임도 위화감도 없습니다. 하지만 훨씬 전부터 동생은 늘 말해줬어요. ‘언니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그저 혼자 소설을 쓰고 그걸 읽는 것으로 만족했던 제 손을 잡고 늘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보여주고 싶었어요. 창작자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동료가 된 사실을 말이에요.”

하난을 시작으로 다시금 자리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수 소리가 사그라지자 세빈이 미수와 눈을 맞추며 손목을 검지와 중지로 탁탁 쳤다. 미수는 눈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PD님 덕분에 저도 한동안 이 일에 더 매달려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저를 외부의 원작자라기보단 같이 월급 받는 사축이라 여기고 친근하게 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미수의 인사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카페 안을 가득 메웠다. 세빈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은비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짚었다. 하난은 “사축이라는 게 뭐지요?” 하는 사장의 물음에 진땀을 뺐다. 미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갔다.     




“정말 방심을 못하겠네요. 회사에 출입 금지를 시켜야 하나.”

하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은비는 맞은편에 앉으며 캔 커피를 책상에 놓았다.

“전 슬슬 익숙해졌어요. 결국은 시간과 인내심의 문제니까요.”

“…역시 유 감독님은 터프하군요.”

하난은 씁쓸하게 웃으며 캔을 땄다. 경쾌한 금속음이 두 사람만 있는 사무실에 울렸다. 파티가 끝나고 하난은 은비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은비는 작업실에 남아 악상을 구상하고 싶다며 사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미수가 “그럼 오빠한테 피아노 좀 들려주면 되겠네! 난 세빈 씨랑 한 잔 걸치고 들어갈게.” 하며 하난의 등을 떠밀고는 세빈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전 터프한 게 아니에요. 언니에 비하면.”

은비는 캔을 만지작거리며 커피의 온기를 탐했다. 그날 밤, 자신의 품에 안겨 울던 미수의 모습이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혼자가 되고도 좌절하지 않고 미수는 꿋꿋하게 웃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을 홀로 내버려둔 동생을 그리워하면서도 멈춰서 있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삶을 비관하며 집에서 웅크리고 있지 않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들어 도전하고 있다.

자신은 어떤가. 원래부터 사람과의 관계에 소극적인 은비는 일찌감치 음악의 세계에서 자신의 일련의 정념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왔다. 우주와 이별한 뒤에는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동료들과 부하들이 자신을 두고 뭐라 하든 정장이라는 갑옷을 걸친 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난과 미수처럼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에게만 이따금 무장해제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하난은 캔에 입을 댄 채 짐짓 은비를 바라보고는 이윽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회사 생활이라는 건 대체로 창작자와는 상극이죠.”

은비는 하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난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했다.

“물론 규칙적인 생활 패턴과 정기적인 수입은 지속적인 창작 활동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회사의 좋은 점은 그를 뒷받침해준다는 거고요. 하지만 게임을 만든다는 건 늘 사내외적인 협업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거기서 비롯되는 인간관계의 스트레스는 창작자처럼 대부분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겐 훨씬 치명적이고요.”

“…”

“…그래서 전 유 감독님이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게 어떨까 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은비의 눈이 커졌다. 하난의 말은 진지하면서도 단호했다.

“단순히 감독님이 회사 생활을 못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재능과 영감이 타고난 사람들은 누가 보지 않으면 나태해지기 십상입니다. 한때 잘 나갔다가 그렇게 도태된 사람들 숱하게 봤습니다. 하지만 감독님은 재능과 영감을 타고났으면서 더 잘 하고 싶고 더 알고 싶어서 노력하는, 제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너무 비행기 태워주시네요… 좋게 봐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요.”

은비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하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했다.

“게임을 만드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재능에 좌지우지되는 게 작곡입니다. 사운드2팀에서 그걸 도맡아 하고 있는 건 감독님 혼자고요. 의미 없이 띄워주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기획자 입장에서 냉정하게 평가한 겁니다.”

은비는 수줍은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장 감독 이래 회사 사람이 이렇게나 자신을 높이 평가해 주는 건 오랜만이었다.

“유 감독님 나이에 기업체 풀프라이스 게임 악곡을 두 타이틀이나 맡고 학생 시절 쓴 곡들의 수상 이력까지 있는 사람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엔 없어요. 혹시라도 일감 안 들어올 까봐 걱정되면 저도 영업할게요. 당장 태 작가님 차기작도 있고요. 오히려 유 감독님이 안 맡으면 그 양반이 안 내겠다고 할 거에요. 그러니까…”

“죄송해요, PD님.”

은비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제동을 걸었다. 하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은비는 입을 열었다.

“전 지금 위치에 만족해요. 급여도 업계 평균보단 높고, 제 개인 작업실도 있는걸요. 입사할 때야 사람 없어서 일에 치여 살았지만 그 덕분에 제 재량껏 일할 수 있었고 부서장까지 됐고요. …이 정도로 궁합이 잘 맞는 회사도 드물어요.”

하난은 은비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는 애꿎은 캔커피를 노려보다가 살짝 우그러질 듯 세게 쥐어들고 벌컥벌컥 하고 단숨에 마셨다. 이윽고 후우 하고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궁합이 잘 맞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요. …다 마셨으면 이만 작업실로 갈까요. 리퀘스트 받을게요.”

은비는 따지 않은 캔을 책상 한구석에 밀어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짐짓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난은 잠시 가만히 은비를 바라보더니 가늘게 탄식을 흘리며 일어났다.

“아뇨, 피곤하기도 하고 전 이만 들어갈게요. 할 얘긴 다 했으니까요.”      


작업실에 들어온 은비는 곧바로 정장을 벗고는 의자에 걸쳐 놓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늘 깔려 있는 매트 위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는 곧바로 신디사이저 앞에 앉으며, 은비는 방금 전 하난의 납득하지 않는 태도를 떠올렸다.

적어도 자신이 말한 것 중에 거짓말은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하난은 그런 걸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난이 구태여 직설적으로 거론하지 않은 애로 사항, 그러나 제삼자가 서설만 들어도 간파할 수 있는 사항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부서원들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잘 알고 있다. 은비 역시 굳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형식적으로 업무를 부여하고, 자신은 근무 시간의 3할은 책상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7할은 개인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일하는 모습들을 둘러보는 일도, 같이 다과를 들며 사담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부서원들이 은비를 마주하는 시간은 출퇴근할 때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개발이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도 부서원들이 정시에 퇴근하는 한편 은비는 혼자 곡을 만들고, 믹싱 및 커팅을 하고, 회사 서버에서 더미 파일에 돌려 보고, 막차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강이 나빠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럼에도 은비는 그저 ‘운동을 열심히 해서 버틸 체력을 기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어쨌든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걸 제외하면 일은 차질 없이 굴러갔고, 주변에서도 딱히 문제 삼지는 않았다. 단 한 사람을 빼고.     

──그런 건 팀원들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해요! 그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거 하나 못 처리합니까!     

늘 냉정 침착하고 사려 깊은 하난이 처음으로 역정을 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동료 직장인으로서의 염려가 아니었음을 알기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은비는 손끝으로 입술을 어루만졌다. 지금도 그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난이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하난은 다시는 자신에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직장 동료로서 은비를 대했다. 집에 같이 미수를 들쳐 업고 왔을 때도, 바로 방금 전에도 하난은 볼일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 그런 사람이기에 의지해 왔건만, 정작 자신은 그가 의지할 버팀목이 되어 주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사람이니 프리랜서로 독립하면 도와주겠다고 한 것 역시 어디까지나 동료 개발자로서의 호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고, 은비가 결심만 하면 물심양면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이성적 호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순 없다. 그의 마음을 알아버린 이상 더더욱 순순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은비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에는 기적을 가능케 한 사랑이, 숭고한 희생과 저주가 깃들어 있었다. 현재의 자신은 혼자 노력해서 지켜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알기에 의지할지언정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방으로든, 아빠에게든, 하난에게든 말이다.

‘절대로, 도망치지 않아…!’

은비의 손이 신디사이저 건반 위로 매끄럽게 춤추기 시작했다. 소중한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소중한 마음이 지켜 준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서.     



     

“공기가 왜 이렇게 답답하냐. 환기 좀 하고 살아라.”

우주는 창문을 조용히 열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병실로 살며시 들어왔다. 오후의 햇살이 침상 옆 탁자까지 비쳐 들어왔다. 우주는 탁자 위에 담청색 꽃이 담긴 꽃병을 올려놓았다.

“이건 일도 아저씨가 주는 선물이야. 무슨 꽃인지는 잘 알지?”

봄 물망초는 여름이나 적어도 늦가을에 씨앗을 심어야 이즈음 꽃이 핀다. 메이 플라워의 대부분의 화초는 일도네 집 근처 하우스에서 재배하고 있지만 지난 가을에 물망초를 심은 기억은 없었다. 일도 역시 다른 데서 구했다고만 말하며 우주의 등을 떠밀었다.

“…오늘도 가져왔어.”

우주는 침상 옆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노트 몇 권을 꺼냈다. 일도가 그날 가져온 미래의 노트들의 일부였다. 한 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소설들이었다. 우주는 그 중 하나를 펼쳐 보였다. 글자로 빼곡하게 채운 종이 사이사이에 볼펜으로 그린 삽화가 삽입되어 있었다.

미래를 입원시킨 다음 날, 출근한 우주에게 일도는 미래의 노트들을 전부 보여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이걸 읽을 책임이 있어.”라는 말과 함께. 우주는 며칠 밤을 새며 그것들을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었다. 중세 판타지, 현대 러브코미디, SF 등 미래는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또한 어떤 이야기를 막론하고 빈틈없는 짜임새와 풍부한 배경 지식이 엿보였다.

그러나 우주의 마음을 가장 절절하게 울린 것은 미래가 써온 일기장이었다. 그것은 평소 우주를 대하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가장 직설적이고도 생생한 단어들로 우주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나잇대 여자가 관계를 위한 신체성에 쏟을 일말의 에너지조차 글을 쓰는 데 몰아넣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글에 자신의 혼을 갈아 넣다시피 한 그녀이다. 그런 그녀가 글의 형태로 남긴 가장 올곧은 담백한 마음이었다.

우주는 그날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미래의 소설에 삽화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미래의 글이 워낙 정직하고 친절하다 보니 별다른 콘티나 지시사항이 없어도 장면을 상상하는 데에 큰 애로사항이 없었다. 우주는 면회를 올 때마다 삽화를 그려 넣은 미래의 소설을 가져와 머리맡에 두었다.

“기쁘지? 좋아하는 남자의 좋아하는 그림으로 네 목숨과도 같은 글을 장식할 수 있어서.”

우주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미래를 돌아보았다. 미래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우주 앞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한 표정을 만들던 눈꺼풀도 입가도 미동조차 없었다. 산소호흡기와 심전도측정기가 연결된 디스플레이가 변함없이 뚜뚜 거릴 뿐이었다. 우주의 표정이 서서히 무너지더니 이윽고 털썩 하고 무릎을 꿇는 소리가 났다.

“…멋대로 도망쳐 놓고, 기껏 따라잡았더니 또 이렇게 도망쳐?”

고개를 푹 숙인 채 우주가 중얼거렸다. 우주 앞에서 사라진 그날 미래는 말했었다. 우주가 다시 자신을 찾아내 붙잡는다면, 스스로를 우주에게 바칠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것은 미래가 우주에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 되었다.

열도 떨어졌고 폐렴 증상도 치료됐지만 그날 이후 미래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곧 있으면 달이 바뀌건만 변함없이 미래는 누워 있을 뿐이다. 의사도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우주는 매일같이 일이 끝나면 곧바로 병원에서 미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밤늦게야 귀가하곤 했다. 일찍 들어가는 날이면 졸려 쓰러지기 전까지 삽화를 그렸다. 며칠 전부터는 숫제 출근도 하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일도와 미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우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티블리 안나의 동료들이 돌아가며 미래의 면회를 갈 때마다 우주와 마주치거나 우주의 흔적을 발견하다 보니 그들도 이 사실을 금세 알아챘다. 우주의 안색은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고 있었다. 왜 좀 더 빨리 알아채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와 잠시나마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죄책감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우주에게 티블리 안나의 사람들은 마땅히 해 줄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내일 또 따지러 올 거야. 목을 씻고 기다리라고.”

우주는 미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침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병실을 나섰다.     


로비로 내려간 우주의 눈에 들어온 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드는 두영이었다. 우주가 다가가자 두영은 반가운 얼굴로 양손으로 우주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무기력하게 고개만 까딱 하고 숙이는 우주의 손을 잡아끈 두영은 그를 택시에 태워 한 해장국집으로 데려갔다.

우주가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앞에 놓인 식사에 손도 대지 않고 있자, 두영은 직접 고기의 뼈를 발라주었다. 우주는 그를 그저 퀭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두영은 살코기가 가득한 해장국을 살짝 우주의 앞에 밀었다.

“어서 먹어요. 이 집 맛있어요. 한국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는 김에 우주 씨한테도 알려주려고 왔어요.”

두영의 말에 우주가 살짝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두영은 이어서 말했다.

“우주 씨가 통 티블리 안나에는 안 오니까 말해줄 기회가 있어야죠. 나 사흘 뒤에 프랑스로 수련하러 가요. 최소한 오 년은 있을 거예요.”

우주는 “…그렇군요.” 하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두영은 싱긋 웃고는 자기 앞의 해장국을 한 숟갈 떠서 들이켰다.

“그쪽에도 스튜 같은 요리는 얼마든지 있지만, 이런 건 내가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하거든요. 근데 그러기엔 번거롭기도 하고, 이런 맛은 좀처럼 안 나고요.”

“…”

“아, 어서 먹어요. 우주 씨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봐야 내가 데리고 온 보람이 있죠.”

두영의 재촉에 우주는 마지못해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입에 넣고 씹으니 육즙이 좍좍 터져 나왔다. 분명 맛있을 텐데 영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주는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가는 사람에게 이런 모습 보여서.”

두영은 우주가 힘겹게 내뱉은 말을 듣고 잠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짓고 살짝 우주에게 몸을 기울였다.

“본인도 알죠? 딱히 건강하게 보이지는 않는 거.”

우주는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그저 깨어나지 않는 미래에게 매달려 있는 일상이라니 그저 학대에 가까운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면 한시도 자기 자신을 용인할 수 없었다.

“늦은 만큼 보충해야한다는 생각에, 더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잖아요.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두영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우주의 마음에 날카롭게 박혔다. 그러나 이어지는 두영의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그래서 부러워요. 두 사람이.”

“…!”

두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뜸을 들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연초에 사장님이 수련 얘기를 꺼낸 날부터 단 하루도 머릿속에서 그게 떠난 날이 없어요. 충분히 고민하고 대답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미 마음은 프랑스에 가 있었죠. 이재 씨에게 진작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명분상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스스로 단정 지었지만 내심 이재 씨의 반응에 따라 프랑스행이 불투명해질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고요.”

이미 두 사람 다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음식은 안중에도 없었다. 두영은 우주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우주는 두영이 마치 스스로에게 독백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난 철저히 내 입장을 우선으로 두고 이재 씨를 대했어요.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면 그 사람에게도 이득 아니냐’ 같은 가증스런 합리화까지 하면서요. 떠날 거면 여지라도 주지 말아야 하는데, 정작 되돌릴 수 없는 타이밍에 와서야 내 마음을 들이댔어요. 가지 말라고 해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타이밍에…”

“…”

“물론 지금이라도… 하아, 아니에요.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가증스럽네요, 몸소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자, 다 식겠어요. 어서 밥이나 먹죠.”

두영은 별안간 이야기를 매듭짓고는 수저를 들었다. 우주는 두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에게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적어도 일방적으로 걱정하거나 꾸짖는 건 아니어 보였다. 우주는 생각을 그만두고자 수저를 들어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우겨넣었다.     




같은 시각 티블리 안나는 런치 타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지금 식사 중인 두 팀이 빠지면 그걸 치우기만 하면 휴식 시간이었다. 웨이트리스들 - 정확히 말하면 이재와 하린과 현지 - 도 계산대 앞에 서서 느긋하게 숨을 돌리고 있었다. 하린과 현지 사이에서 이재는 계산대 위에 털썩 하고 상반신을 기대며 앓는 소리를 했다.

“어으… 핵심 인력이 없으니까 낮부터 체력이 거의 방전되네.”

“…현지 언니 덕분에 어떻게든 해 나가고 있으니까요.”

하린의 말에 현지는 목을 뻣뻣이 세우며 “그러니까~. 제가 계약서 다시 쓰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흐흐흐.” 으스댔다. 이재는 “그래, 네가 우리 구세주다…” 하며 귀찮은 듯 넘겼다. 영 반응이 시원찮아 이재를 내려다 본 현지는 메론 두 개가 계산대 위에 모양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현지는 메론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그럼 저 이거 반만 나눠 주세요.”

이재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조용히, 그러나 있는 힘껏 팔꿈치로 현지의 옆구리를 찍었다. 현지가 고통에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듯 입가가 일그러지자 이재는 옆을 보지도 않고 짧고 굵게 내뱉었다. “정숙.” 현지는 그에 압도되어 그저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오만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린은 현지를 신경 쓰지도 않고 이재에게 말했다.

“…이대로 괜찮으세요?”

이재는 물끄러미 하린을 쳐다보았다. “뭐가?”

“…같이 오래 고생하셨잖아요. 아직 미련이 있으시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어제 제대로 송별회까지 치러 줬잖아!”

이재는 아예 하린에게 몸을 돌리고 정색하듯 말했다. 하린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전 제 선배 얘기한 건데요.”

이재는 또 이 녀석에게 넘어갔단 생각에 부끄러움과 분노가 뒤섞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식사를 거의 마친 손님들이 이쪽을 힐끗힐끗 보고 있는 걸 깨닫고는 가까스로 심호흡을 하며 표정 관리를 한 이재는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말했다.

“걘 할 만큼, 아니, 차고 넘치게 해줬어. 지금은 그동안 못 쉰 거랑 앞으로 쉴 거까지 한꺼번에 몰아서 쓰고 있을 뿐이라고. 녀석은 반드시 깨어날 거야. 그리고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그럴 수 있게 이곳을 지키는 게 내 일이야.”

하린은 후훗 하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재는 가끔씩 하린이 이런 미소를 보일 때마다 묘하게 약이 올랐다.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덩치 큰 강아지 같다고? 이건 뱃속에 구렁이가 세 마리는 들어 있는 불여시다. 처음 그런 말을 한 놈에게 진지하게 따져야 할 판이다.

‘뭐, 이젠 여기로 안 오지만.’

이재는 살짝 침울해졌다. 미래가 입원한 날 이후, 이재와 두영은 겉으로는 다시 예전처럼 지냈다. 아무도 그날 빗속에서 있던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곧 두영이 출국하는 걸 상기할 만한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을 예전과 다름없이 한다고 티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두영이나 이재나 혼자 있을 때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주방과 홀의 직원 대부분이 보았을 정도니 말이다.

두영이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리를 좋아한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동료이자 손윗사람으로서 쓸데없는 고민을 안겨주기보단 끝까지 웃는 얼굴로 미래를 축복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재는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을 애써 기특하게 여겼다.

“…좀 더 솔직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게. 걔도 참 솔직하게 힘들다고 어리광 부리고 투정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 내가 부족해서 그래.”

하린의 말에 이재는 대수롭지 않게 선수를 쳤다. 그러나 하린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매니저님 말이에요.”

이재가 놀라 쳐다보자 이번에는 아예 손으로 입만 절반쯤 가린 채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재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하린이 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사랑에 고뇌하는 순정 로리는 내버려두고 테이블 치우러 갈까요?”

“그러게요, 저였으면 고뇌 같은 거 없이 쇄골 아래 로켓 두 개로 구워삶았을 텐데, 참 어려운 길을 자청하시네요.”

하린과 현지는 이재를 놀리며 도망치다시피 계산대를 나왔다. 이재는 약이 올라 둘을 쫓아가려다가 삼삼오오 지갑을 들고 계산대로 오며 훈훈한 미소를 짓는 손님들을 보고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계산을 치르는 틈틈이 하린과 현지를 보는 손님들을 보며 이재는 문득 깨달았다. 나름대로 스스로 감정 표현은 풍부하다고 여겨 왔지만, 마지막으로 정말 속 편하게 웃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십 대 초반부터 매니저로서 늘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살다 보니 어느새 점점 자신도 모르게 솔직하게 웃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하린과 현지는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우주에게 거침없이 들이대고,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고, 하고 싶은 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기는 주변과 공명하여 플러스든 마이너스든 감정을 전염시킨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거울의 상으로써 서로를 욕망한다고.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욕망을 억눌러 두면 현실에서 변질되어 발현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때로는 건전하게 욕망을 해소하는 게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건전함의 기준은 사회 권력이나 문화 권력이나 집단 윤리 따위가 아니다. 이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만큼은 혼내지 말도록 할까…’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이재는 문을 나서는 손님들을 배웅하며, 살며시 웃음을 띠었다.      



20     


창문 너머로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바깥의 전신주에는 참새 몇 마리가 앉아 짹짹거리고 있었다. 오랜 비 끝에 찾아온 연이은 맑은 날씨는 우울함에 찌든 마음까지도 뽀송하게 말려 줄 것 같았다. 우주의 집 앞 돌계단 사이사이에 고인 미처 마르지 않은 물기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부리로 창가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우주는 몸을 움찔거렸다. 눈을 살짝 뜨자 몇 주 째 커튼을 걷은 채 방치한 유리창으로 여과 없이 들어온 정오의 직사광선이 눈꺼풀 사이로 뚫고 들어왔다. 우주는 얼굴을 찡그리며 조금씩 잠에서 깨었다. 책상 위에는 밤새 그린 그림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문 밖에서는 구수한 음식 냄새가 퍼져 오고 있었다. 미주는 요즘 들어 쉬거나 저녁에 출근하는 일이 많아졌다. 꽃집을 안 다니게 된 우주로서는 해가 중천에 뜰 즈음 일어나면 높은 확률로 미주와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못 본 체 하고 간밤에 그린 그림을 들고 현관에서 나갈 채비를 하면 미주는 늘 “밥은 먹고 가렴.”이라 불러 세웠고, 우주는 “생각이 없어서요.” 하며 바삐 문을 열고 도망치다시피 나갔다.

우주가 몰래 샤워를 하러 방문을 살짝 열자 본 것은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미주였다. 오늘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우주는 미주의 눈을 피하며 조용히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미주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어났니.”

우주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 찰나, 미주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씻고 식탁에 앉으렴. 알겠지?”

우주는 잠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주는 문이 닫히고도 한동안 서서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식탁에 마주앉은 미주와 우주는 말없이 수저를 들었다. 우주가 수저를 든 채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자 미주는 직접 우주의 밥에 반찬을 얹어 주었다. 우주는 마지못해 깨작깨작 밥을 먹기 시작했다. 미주는 자신의 밥에는 손도 대지 않고 턱을 괴고 가만히 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먹는 둥 마는 둥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주가 흘끗 미주를 쳐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우주는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우주가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미주는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우주를 쳐다볼 뿐이었다. 우주는 살짝 의아해 하면서도 “잘 먹었습니다.”는 인사를 남기고는 집을 나서려 했다.

미주는 서둘러 일어나서는 우주를 멈춰 세웠다. 며칠째 똑같은 옷의 주름을 펴 주고는 먼지와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어 주었다. 그리고는 우주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주는 좁은 현관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아들을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로 떠날 사람을 배웅하듯, 미주는 슬픈 얼굴로 말없이 우주의 온기를, 체취를, 목소리를 자신의 안에 새기고 있었다.     




목욕을 마친 두영은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며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방을 정리하는 데 예상 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가게를 나온 뒤에 이삼일 정도 설렁설렁 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일수는 맞았지만, 낮에는 월세 계약을 해지한다든지 각종 자동이체를 취소한다든지 친분이 있는 곳을 찾아 인사를 드린다든지 하느라 저녁에밖에 방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께와 어제 각각 네 시간씩밖에 못 자서 꽤 피로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의 짐을 본가로 보내고 난 방은 내일 공항에 들고 갈 캐리어 두 개를 빼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홀로 입주했을 때부터 있던 책상과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영은 가만히 책상을 쓸어보았다. 요리 공부와 검정고시 공부를 병행하던 시절 두영은 여기서 공부를 하다가 숱하게 코피를 흘렸었다. 이십 대 초반에게 좋은 추억이 되기엔 아직 얼마 안 된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기였다.

오 년 하고도 4개월 전, 요리에 매진하고자 고등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두영에게 부친은 지금의 방을 구해 주고 반 년 치 월세에 해당하는 돈을 건네며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돌아와도 네 방은 없으니 이제 네 몸은 스스로 건사해라.”라 잘라 말했다.

두영은 그날부터 낮에는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주방 보조 일을 하고, 밤에는 레시피를 연구하고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용돈 개념으로 받는 얼마 안 되는 돈을 쪼개어 제일 싼 교재와 강의를 구매하여 몇 번이고 되새기듯 공부했다. 주방에서 일하다보니 끼니 걱정을 할 일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굳이 검정고시를 치른 건 온전히 어린 두영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공부하기 싫어서 요리 같은 거나 한다”는 취급을 받기 싫은 데 따른 일말의 고집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를 높게 산 여사장 덕분에 유학 기회까지 얻었으니 잘 된 일이었다.

분명 잘 된 일이었을 터였다. 여기서 쌓은 것들을 대부분 내려놓아야 한다는 리스크는 있지만, 그건 이미 집을 나올 때 겪어 본 과정이다. 손에 쥔 것들을 풀어놓지 않으면 잡을 수 없는 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안 그래, 지이재?”

이제 와서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든 바뀌는 건 없다. 자신은 무책임하게 마음을 밝히고 무책임하게 떠난다. 그것이야말로 두영이 이곳에 남겨 놓는 가장 큰 미련이자 헐이었다.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사색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현실로 돌아온 두영이 시계를 보니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남의 집 문을 요란하게 두드릴 사람은 자기가 아는 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두영은 현관문에 달린 렌즈로 밖을 들여다보았다. 파란색 오프숄더 프릴 드레스에 세트로 된 머리 장식을 한 이재가 서 있었다. 두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옷이었다. 이재의 집에서 도망치다시피 나와서는, 쫓아온 이재를 몰아붙이다시피 하며 키스한 그날, 이재에게 선물했던 옷이었다. 그날 두영은 빗속에서 이재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내가 선물한 옷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난다면, 당장 전부 벗겨버리고 그 사정없이 큰 가슴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샅샅이 유린하려는 나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은데,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성의 끈이 끊어진 채 내뱉었던 그녀를 향한 가장 적나라한 본심이 7cm 두께의 문 너머에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두영이 망설이는 사이 또 다시 쾅쾅쾅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양 뺨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두영은 태연함을 가장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잠금장치를 걸치고 문을 열자 이재가 치킨과 맥주가 든 비닐봉지를 들어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두영은 한숨을 쉬었다.

“누가 이 시간에 그렇게 몰상식하게 문을 두드려요? 옆집에서 신고 들어와요.”

“뭔 상관이야~ 내일이면 한국 뜰 녀석이…”

“저 귀국하면 다시 여기로 들어올 거거든요? 집주인한테 개판 치고 떠난 놈으로 인식되어 봐요, 방 있어도 안 주지.”

“됐고! 손님 밖에 세워 놓지 말~고! 빨리 열기나 하지~?”

두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풀었다. 곧바로 이재가 문을 벌컥 열고는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며 들어왔다. 두영은 앞을 지나가는 이재에게서 풍기는 양주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이재는 봉지를 두영에게 건네고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러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임마~ 떠났으면~ 그걸로 끝이지~! 너 이 방에 침 발라 놨어~?”

이재는 벌건 얼굴로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두영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맥주 뚜껑을 따 유리잔에 부었다. “이재 씨는 마시지 마요. 보아하니 이미 머리 꼭대기까지 취기가 올랐는데.” 두영은 의자에 앉아 잔을 홀짝거렸다.

“잔말 말고 나도 한 잔 내놔~! 말 안 들으면! 돌아와도 네 자리 없어~”

꼬장을 부리는 이재의 혀는 꼬부라져 있었지만 게슴츠레 뜬 눈의 안광은 빛나고 있었다. 그를 눈치 챈 두영은 잔을 소리 나게 책상에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짐짓 엄하게 했다.

“안 돼요! 괜히 실수를 가장해서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제정신으로 배웅해줘요! 그러지 못하겠다면 택시 부를 테니까 나가요!”

“…쳇, 마지막이라고 폼 잡기는…”

“…여보세요, △△콜이죠? 여기 주소가요…”

“안 먹을게, 안 먹을 테니까!”

 다급히 손사래를 치는 이재를 보며 두영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죄송합니다, 좀 있다 다시 걸게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평소 두영이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칠 때마다 이재가 철권제재를 하는 것에 비하면 지극히 낮은 빈도지만, 이재가 이따금 판단력을 잃고 폭주하려 할 때 두영은 이런 식으로 정색을 하며 제동을 걸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재는 예외 없이 두영에게 꼼짝을 못했다.

이재는 여차 할 때마다 자신을 압도하는 두영의 카리스마에 짝사랑을 하는 평범한 소녀로 돌아간 듯 두근거리면서도, 그 너머의 본심을 알 수 없어 전전긍긍했고, 이윽고 늘 하던 자기비하에 빠져 침울해했다. 두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비례해서 커지는 야속함과 자격지심은 지금에 이르러선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네가 미운 거야, 허두영. 오늘이야말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거야.’

닭날개를 우물거리는 두영을 바라보며 이재는 집을 나서며 한 각오를 되새겼다.


“…그럼 ‘나는 한국에 여자친구가 있습니다’는 뭔데?”

“아니, 프랑스 가서 그런 말 할 일이 어디 있어요?”

이재는 휴대폰에 번역 어플을 띄워놓은 채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맥주병은 어느새 전부 비워져 있었다. 삼십 분 전, 이재의 “프랑스어는 좀 공부했어?”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즉석 테스트는 이미 출제자의 폭주로 산으로 가고 있었다.

“야, 세상에 ‘절대’란 없는 거야! 거기 가서 입 닫고 요리만 할 것도 아니잖아? 자, 대답!”

이재의 닦달에 두영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머릿속에서 천천히 문장을 만들어 냈다.

“J... J'ai... une... pe- petite amie.. en Corée...”

-J'ai une petite amie en Corée.

이재가 터치 화면을 누르자 무미건조한 TTS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재는 호오 하고 작게 탄성을 냈다. 두영은 가뜩이나 피곤한데 술 마시고 머리까지 쥐어짜자니 죽을 맛이었다.

“애초에 굳이 없는 여자친구를 지어낼 필요가 없잖아요? 입 닫고 요리만 할 것도 아닌데.”

“너 제정신이야? 그럼 네가 거기서 입 닫고 요리하는 거 말고 한눈 팔 여유가 있을 것 같아?”

“…취한 거예요, 바보예요?”

두영은 일 분도 안 되어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하는 이재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이재는 “에에~ 무슈 허? 꼬레에 요좌췬구가 있숴여~? 요귀숴는 요뤼 공부가 요좌췬구예여~”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두영의 긴장은 이미 싹 풀려 있었다. 몇 주 동안 어색했던 두 사람의 사이가 간신히 회복된 느낌이 들었다. 이 밤이 지나면 오랫동안 이 얼굴을 볼 수 없다. 어쩌면 영영 못 볼 지도 모른다. 문자나 SNS로 연락을 주고받아도 서로 다른 환경과 처지에서 점점 엇갈리고 멀어질 것이다. 그것이 전형적인 현대 사회의 관계 단절의 과정이다.

‘언젠가 헤어질 줄 알았으니 처음부터 깊은 관계가 안 된 게 다행이다’는 말을 다분히 회피적이고 몰인정하다고 비난할지언정, 각자가 삶에서 짊어진 게 모두 다른 이상 전통적인 사교 방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도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두영은 헤어짐에 대해 끝까지 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재에게 부담을 떠넘겼고, 그녀를 흔들리게 했고, 그럼에도 결국 먼저 손을 내민 것도 그녀였다.

“…지금까지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이재 씨.”

두영이 덤덤하게 내뱉은 말에 이재는 별안간 고개를 푹 숙이며 조용해졌다. 드레스를 움켜쥔 두 주먹을 내려다보는 이재의 눈동자에는 결심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말로만?”

이재의 중얼거림이 너무 작아 미처 듣지 못한 두영이 머리를 살짝 내밀며 물었다. “뭐라고요?” 이재는 두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나한텐 증거가 필요해. 보다 강렬한 증거가.”

“허허, 이재 씨도 여자다 이거죠? 좋아요! 가방이든 옷이든 프랑스 현지에서 직접 공수해서 보내 줄게요!”

“…그럴 필요 없어. 지금 줄 수 있는 거니까.”

말을 마치고는 이재는 비틀거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두영은 이 이상 이재를 여기 두면 그녀가 자기 발로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 두영 자신 역시 자제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두영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갈 거죠? 그럼 택시 부를게요, 잠깐만─”

“…거짓말이 아니면 되잖아?”

이재는 작고도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벽에 걸어놓은 코트에 손을 뻗던 두영은 순간 멈춰 섰다. 이재는 두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단 하룻밤이라도 사귄다면, 거짓말은 아니야.”

이재는 두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상체를 조이는 리본을 하나둘 풀었다. 이윽고 손을 뒤로 가져가 지퍼를 내리자 드레스는 별 저항 없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풍만하고 새하얀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신체 중 유일하게 나이에 맞는, 아니 그 이상의 파괴력을 탑재한 휘어질 듯 여문 저울추를 잘 봐 줘야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몸집과 굴곡이 지탱하고 있었다.

티블리 안나의 딱 붙는 제복 너머로 늘 위용을 과시하는 배덕적인 몸매의 실체를 직접 본 두영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재는 가슴을 가리고 싶은 걸 애써 참듯 배꼽 위에 모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영을 바라보는 눈은 너무 힘을 주어 충혈될 지경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재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가 이래 봤자 민폐겠지. 별 볼일 없는 초라한 몸뚱이라 미안해. 하룻밤만 참아 줘.”

“이재 씨…”

“나도 너 딱히 안 좋아하니까 쓸데없는 생각 마. 정말 좋아했다면 네 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못 가게 했을 테니까. …네가 내일 기어이 떠나는 것처럼 말이야.”

“…윽!”

아픈 곳을 찔린 두영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변명할 수 있을까? 반박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을 벼르고 별러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까지 밀어붙여오는 눈앞의 사람에게. 오랜 짝사랑이면서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상처를 준 사람에게.

“…걱정 마. 네 앞길에 걸림돌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이 밤이 지나고 나를 무시할 만큼 넌 배짱이 두둑하지 못하니까, 내가 너를 철저히 무시할 거야.”

“…!”

저벅… 저벅… 이재는 한 발짝씩 두영에게 다가갔다. 두영은 몸이 굳어버린 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과는 입장이 정반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두 사람이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자 추억.”

이재는 그대로 두영에게 몸을 밀착시키고는 두 팔로 머리를 끌어안았다. 살 냄새와 부드러운 압박감에 두영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뇌에 산소가 떨어진 듯 머리가 멍해지는 한편 하복부에 피가 쏠려 거세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눈앞에서 촉촉한 입술이 열리고는 결정타를 가했다.

“단 하룻밤의 연인으로서의 추억. 나는 그것만 있으면 돼.”

두영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이재의 입술이 포개졌다. 저돌적인 입맞춤의 이면에는 삼 년간의 짝사랑이 수줍게 숨어 있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짝사랑을 종결하는 서글픔과 함께.     




면회 제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 병동은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복도에는 라운딩을 도는 간호사를 제외하면 돌아다니는 환자가 없고, 한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실은 불이 꺼져 있다. 몇 주 전까지는 모든 병실의 불이 꺼져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이 켜진 유일한 병실에는 간호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면회객과 환자가 있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늘 어두운 표정의 청년과 입원 이래 줄곧 혼수상태인 소녀. 매일 면회를 오느라 얼굴이 익다 보니 간호사들도 우주에게 아는 체를 하곤 했다. 우주는 별 반응 없이 방문 명부를 작성하고는 미래의 병실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삶의 욕망의 이면에는 늘 죽음의 욕망이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죽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생의 의지의 반증이다. 삶을 통해서든, 죽음을 통해서든,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의 방향을 선택할 운명을 부여받고 말았다.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두 욕망은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엮여 지금의 인간을 이룩해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그가 죽든 살든 어떤 식으로든 인간 속에 편입되어 제 역할을 할 것이다….”


우주는 미래의 머리맡에 앉아 두꺼운 양장본을 읽어 주고 있었다. 작가 시절 미주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장편 소설 『종말의 연옥』의 마지막 장이었다. 아무리 의식이 멀어져 있어도 청각만큼은 작동한다고 한다. 인사를 트게 된 어떤 간호사가 귀띔해 준 것이었다. 그래서 우주는 미래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미주의 소설을 읽어 주기로 했다. 아무리 습도 관리가 되어 있어도 반나절 가까이 소리 내어 읽고 있자니 목이 칼칼했다.

“‘…그 마지막 미소는 분명히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고. 끝.’ 어휴, 힘들었다.”

우주는 마지막 장을 덮고는 부리나케 옆에 있던 생수를 들이부었다. 평소에 발화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쉽게 도전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미래에게 닿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매달렸기에 완독을 할 수 있었다.

미래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몇 주 동안 매일같이 면회를 온 우주를 맞이한 건 시간이 멈춰 버린 병실에 누워 있는 미래의 차가운 손이었다. 우주가 아무리 손발을 주물러도,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반응은 일절 없었다.

갑자기 병실 형광등이 꺼지더니 노란 수면등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잠시 후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주가 잠자코 있자 “실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문이 열리고 차트를 든 앳된 얼굴의 간호사가 들어왔다. 라운딩을 왔다는 건 면회 제한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우주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목례했다.

“보호자 분, 이제 가실 시간이에요.”

간호사의 말에 우주는 주섬주섬 가지고 온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세요. 제가 당직이니까…, …그리고,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간호사는 차트에 얹어 온 종이컵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 이내 유자차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우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두영이 지적했듯 주변에서 볼 때 오히려 걱정의 대상은 우주일 것이다. 미주도, 일도도, 티블리 안나의 사람들도 그저 우주를 배려해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터이다. 그들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우주를 움직이는 동인은 죄책감과 자기 학대가 아니었다.

우주를 지탱하는 것은 오직 하나, 미래가 반드시 다시 일어날 거란 믿음이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건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를 끌어안고 ‘잡았다’라 외칠 것이다. 그리고 도망친 데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것이다.

우주는 침대로 몸을 기울여 왼손으로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른팔로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그러니까 꼼짝 말고 기다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널 찾아낼 테니까.”     




끝없이 펼쳐진 대지. 높낮이도 끊어짐도 없는 그저 평면의 연장. 하늘은 빛도 어둠도 없이 그저 균일적인 대기의 연장으로서 있을 뿐이다. 대지와 그를 둘러싼 대기는 단색이다. 그를 구분할 수 있는 건 군데군데 핀 꽃과 여기저기 흩어진 그림 덕분이리라.

나는 그곳에 존재한다. 내가 존재임을 인지한다는 사실, 그것만이 내 존재의 유일한 근거다. 한때는 육신도 있었고 영혼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저 ‘나’라는 개념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하나의 대상을 간절히 지향한다. 거기엔 어떤 실체의 연장도 없지만 나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다. 내가 지향하는 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녀에게 전달되며, 그녀는 결코 응답을 유예하지 않는다.

나의 세계에서 그녀가 존재한다. 존재했으며, 존재할 것이다. 그녀는 신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움직인다. 주변은 형형색색의 구조물과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이 어디까지나 연장된다. 그녀의 몸집의 몇 배는 되는 책들이 바닥에도 하늘에도 펼쳐져 있다. 책의 내용은 모종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겠지만 알 수 없다.

그녀가 걸어가다가 멈춘다. 무수한 원고지들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가운데 한 명의 소녀가 감은 눈으로 바닥에 십자 모양으로 누워 있다. 네 자루의 펜이 양손과 양발을 관통해 땅에 박혀 있다.

나는 소망한다. 그녀는 가만히 있다. 나는 명령한다. 그녀가 입술을 깨문다. 나는 부탁한다. 나의 모든 존재가 단 한 가지 목표를 지향한다. 그녀가 눈을 감는다. 영겁인지 찰나일지 모를 간격이 있고, 그녀가 눈을 뜬다.

소녀를 둘러싼 원고지가 땅으로 떨어진다. 네 자루의 펜이 소멸한다. 소녀의 눈이 떠진다.     




동이 트기 전의 하늘은 파랑색과 시안색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창밖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책을 읽던 일도는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 창문에 손을 대자 간밤의 한기가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여 멍한 일도의 정신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각성을 일으켰다.

일도는 두어 번 양손으로 뺨을 두들기고는 욕실로 가 세수를 했다. 거울에 비친 초췌한 중년의 얼굴을 보며 일도는 자신이 할 일을 다시금 상기했다.

“선배,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조용히 내뱉은 혼잣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욕실에서 나온 일도는 지체 없이 현관문 앞에 걸어 둔 잠바를 걸치고 포터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열어 어딘가에 전화를 해 신호를 딱 한번 울리고는 곧바로 닫았다.

바깥에 나오자 여름에 접어들기 전 싸늘한 새벽 공기가 온몸을 엄습했다. 일도는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는 은비가 깨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았다.     



21     


캄캄한 복도에 불이 일제히 켜졌다. 세수를 마친 간호사가 여전히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스테이션 밖으로 나왔다. “교대 시간 한 시간 전이야. 이제 무조건 깨워서 보내야 돼.” 청소를 하던 동료 간호사가 말했다. 취침을 하러 들어가기 전 접수대 옆에 세워 두었던 의료용 카트를 잡아끌며 간호사는 아침 처치 루틴과 별개로 간밤에 환자 옆에서 잠든 보호자를 내버려 둔 병실을 떠올렸다.

간밤에 라운딩을 끝내고 삼십 분 가량이 지났는데도 우주가 나오지 않자 간호사는 병실로 가 상태를 확인했다. 우주는 미래를 끌어안다시피 손을 올린 채 침대 옆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말을 걸어도, 어깨를 흔들어도 우주는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던 우주의 안색을 떠올린 간호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료를 불러 바이탈 사인을 체크했지만 혈압도 맥박도 체온도 호흡도 산소포화도도 정상 수치였다.

단순히 지쳐서 깊이 잠든 것으로 간주하고는 간호사는 매 시간 라운딩을 보며 우주가 깼나 확인하고, 아침 교대 시간 전에는 깨워서 보내기로 동료와 합의했다. 카트를 밀고 복도로 향하는 간호사의 팔을 잡고는 동료 간호사가 말했다.

“처치는 내가 먼저 돌고 있을 테니까 넌 거기부터 빨리 깨워서 내보내.”

동료 간호사는 카트를 밀고 지나가면서 살짝 고개를 돌려 윙크했다. 순간 말문이 막힌 간호사는 “아, 아니, 그, 그런 거 아냐…!” 하며 더듬거리다가 이내 체념하고는 입가의 웃음을 감추며 미래의 병실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간호사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몇 주 동안 단 한 번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던 미래가 몸을 일으킨 채 우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우주를 바라보는 미래의 얼굴은 마리아 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자애로웠다. 처음으로 보는 눈동자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미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간호사는 놀란 와중에도 간신히 한 가닥 정신을 부여잡고 환자의 인지를 확인했다.

“화…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태미래요.”

“여, 여기… 어딘지 아세요?”

“병원 같은데요.”

“그, 그럼 오시기 전에 상황은 기억나세요?”

“…모르겠어요.”

간호사는 감격한 나머지 입을 가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원인도 모른 채 줄곧 의식불명이던 환자였다. 주치의를 위시한 의료진들은 언급만 안 했을 뿐 소생의 가능성을 놓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런 환자가 별다른 징후 없이 하룻밤 만에 깨어나서 온전한 정신으로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바로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릴게요!”

간호사가 문 너머로 뛰어가는 것을 미래는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고 나니 전혀 모르는 곳에 환자복을 입고 산소호흡기까지 끼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적잖이 놀랐었다. 그러나 자신을 붙들고 잠든 우주와 그의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미주의 책을 발견하고는 서서히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소설에 우주가 그린 수많은 삽화를 본 미래는 곧바로 자신이 하루 이틀 잠들어 있던 게 아니란 사실과 우주가 줄곧 옆에서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방적으로 다가간 주제에 일방적으로 도망친 자신을, 아무런 기약 없이, 묵묵히 그림을 그리며…

미래는 보육원에서 자주 원장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가 떠올랐다. 숱한 전설과 동화에 비슷하게 나오는, 용을 무찌르고 저주 받은 탑에 외로이 갇힌 공주를 구해내는 용사의 이야기. 그러나 그것은 전설 속에서만 일어나진 않는다. 공주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녀가 되어 독설과 아집을 뿜어대는 용과 숱한 격률과 방어기제로 이루어진 탑을 만들어내고는 가장 날것의 말과 마음을 숨겨버렸다. 거기에 다다를 수 있는 건 계산이나 타협과는 거리가 먼 순수하면서도 한결같은 마음뿐이다.

피가 섞인 부모나 형제가 아닌 타인에게서 그런 마음을 받는다는 건 참으로 희박하고 또 고귀한 일이다. 그러나 이십 년도 안 되는 미래의 인생에서 그런 마음을 오롯이 준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타인들이었다.

“…일어나서 얼굴 좀 보여 줘, 잠자는 용사님.”

미래는 부드럽게 우주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윽고 우주의 몸이 움찔 하고 움직였다. “으으음…” 가벼운 듯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며 우주는 고개를 들고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눈앞에는 미래의 웃는 얼굴이 있었다.

“여긴… 어디죠?”

우주는 잠에서 덜 깬 듯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미래는 쿡쿡 하고 웃었다.

“뭐야, 아직도 꿈속이야? 정신 차려. 여기 병원이잖아, 척 보면 몰라?”

“병원… 아니, 왜 제가 병원에 있는 거죠…”

우주가 중얼거렸다. 미래는 우주가 귀여워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일부러 자길 놀리려 들지 않아도, 1할의 진지함을 가리고 있는 9할의 맹함이야말로 평소 우주의 매력이건만.

“이거 왜 이래? 찬 바닥에서 하룻밤 잤다고 바보가 된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 초 절정 천재 미소녀의 이름은 기억하겠지?”

미래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의 양 볼을 찌르며 귀여운 척을 했다. 이제 우주가 “오이냉국으로 세수나 하고 와라” 식으로 태클만 걸어 주면 재회 아닌 재회의 어색함은 거의 다 해소될 터이다.

우주는 멍한─그보단 투명한─눈으로 그런 미래를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미래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슬슬 장난이 재미없어지려 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이어졌다. 마침내 그를 깨고자 미래가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친 건 우주였다.

“…혹시, 저를 아세요?”

미래는 입을 벌린 채 점점 시야가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머리에서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주는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분이세요?”

“강우주!!!!!!”

미래는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우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우주는 동그랗게 눈을 뜬 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미래의 얼굴은 공포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장난치지 마! 이렇게 복수하는 거야? 이제 속이 시원해? 너한테서 도망치려 한 대가로 이렇게 끔찍한 짓을 하는 거야?”

미래의 기백에 겁에 질린 우주는 주저앉은 채로 침대에서 허둥지둥 몸을 뗐다. 미래는 우주를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대로 끌려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설 힘을 잃은 하체가 그대로 쿵 하며 바닥에 부딪혔다. “으윽!” 묵직한 통증에 미래의 입에서 굵고 짧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아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집어치워!!! 그런 말투 집어치우라고!!!”

우주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미래는 소리를 빽 질렀다. 미래는 우주가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이 꿈도 꾸기 싫은 최악의 가정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임을 깨닫고 있었다. 거꾸로 자기 자신은 이성을 잃기 직전임을, 손톱이 파고들 듯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이 실려 있음을 미래는 의식하지 못했다.

“말해! 장난이었다고! 이젠 놓치지 않겠다고! 태미래는 강우주의 것이라고 말해!!!”

“…저, 태… 미래 씨? 일단 진정하고 침대에 좀 누우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우주는 어깨를 잡힌 채 그대로 미래의 겨드랑이 밑에 팔을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일어나려고 했다…

“…어?”

허리에서 준 힘이 허벅지 아래에서 멎었다. 미래를 부축하려던 우주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일어날 수 없었다. 우주의 눈동자가 떨렸다.

“…어, 왜… 이러지… 쥐가 났나…?”

몇 번을 시도해도 우주의 무릎은 하반신을 일으킬 수 없었다. 우주의 표정이 점점 사색이 되었다. 그를 지켜보는 미래의 눈은 어느새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었다.

“강우주… 너 설마…”

이럴 리 없다.

이런 재회는 말도 안 된다.

이런 싸구려 비극을 상영해 줄 극장 따위, 있을 리 없다.

“…어라, …진짜 이상하네, …하하… 왜…”

우주의 눈은 어느새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공황에 빠진 채 우주는 연거푸 일어서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주저앉을 뿐이었다. 연이어 눈앞에서 벌어진 잔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부정하려는 듯 미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우주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일어나!!!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날 업었던 그 다리로 일어나란 말이야!!! 일어나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우주는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창백한 얼굴로, 눈앞에서 이성을 잃은 채 오열하는 미래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문을 박차고 일도와 여사장이 의사와 간호사들과 여러 명의 남자 직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일도는 남직원 두 명의 도움을 받아 우주를 부축하며 나갔다. 다른 의료진들은 고래고래 악을 쓰며 몸부림치는 미래를 침대에 눕히고는 강박끈으로 팔다리를 묶고 주사를 놓았다. 여사장이 부드러우면서도 다급한 목소리로 달래며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 산소호흡기와 혈압계가 채워지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미래의 의식은 점점 멀어져 갔다…     




- 탑승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07시 30분에 파리로 가는 대한항공 KE901편은 지금 231번 탑승구에서 탑승을 시작합니다. 탑승 마감시간은 출발 5분 전입니다…

라운지 의자에 앉아 있던 두영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회화책을 덮었다. 몸을 일으키자 다리와 허리에 찌뿌듯함이 밀려왔다. 역시 세 시간 남짓의 쪽잠으로 나흘간의 피로를 온전히 푸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열네 시간 반의 비행이 끝나면 미리 짐을 보내 둔 아파트로 곧장 들어간다. ‘곧장’이라고 해도 샤를드골 국제공항에서 발드마른 주와 인접한 파리 외곽까지 가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밤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 새도 없이 침대에 누우면 한국 시간으로 이른 아침이 되니 온전히 잠을 들 수도 없을 것이다. 오전에 일어나 관공서에서 전입신고를 마치고 나면 시차적응을 할 새도 없이 곧바로 레스토랑에서 견습 생활이 시작된다.

어지간히 둔감한 사람이 아닌 이상 장시간 비행 중 이코노미 좌석에서 제대로 수면을 취하는 건 무리니 사실상 지난밤까지가 온전히 쉴 수 있는 마지막 여유였던 셈이다. 그러나 지난밤엔 맥주까지 마셨는데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영은 입술을 매만지며 간밤에 처음 닿은 이재의 입술을 떠올렸다. 품에 쏙 들어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이재의 몸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 이재의 눈물을 떠올렸다.     




두영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는 이재의 어깨를 잡고 떼어냈다. 이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두영의 머리를 잡아당겨 다시금 키스를 시도했다. 그러나 힘의 차이가 명백한 이상 이재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두영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 수는 없었다.

“이재 씨, 그만해요! 이건 정말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내가 질척거리지 않겠다고 하잖아! 오늘 밤으로 끝나는 관계라고 하잖아!”

“난 싫어요! 나하고 이재 씨 인연이 결코 이런 식으로 소모될만한 건 아니잖아요!”

아득바득 달려들던 이재는 두영의 외침에 순간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두영은 살짝 안도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이재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이재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방울이 비죽비죽 새어나왔다.

“…네가 생각하는 우리의 인연이 뭔데?”

이재의 목소리는 목이 메어 잠긴 데다 콧물로 막힌 코 때문에 비음이 심하게 났다.

“말해 봐, 뭐냐고!”

이재의 닦달에 두영은 흠칫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어렵게, 어렵게 두영은 입을 떼었다.

“…그야, 좋은 동료고… 좋은… 친구죠…”

“…놀고 자빠졌네.”

이재는 두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통의 직장 내 인간관계보다 살짝 친근한, 악우 같은 이성 친구? 결코 그 이상 가까워지는 걸 용납하지 않고, 이별의 순간엔 쿨하게 인사를 나누고 한동안 그리워하다가 어느새 서로 잊어버리는, 그런 인연? 야, 그렇다면 너 단단히 착각한 거야.”

“…”

“적어도 난 단 한 번도 너 친구라 생각한 적 없어.”

“…!”

두영은 순간 숨이 멎었다. 이재는 계속해서 말했다.

“넌 바보 머저리야. 배려하는 시늉을 하면 독선을 감출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지. 그런 놈이 스스로 깨닫게 하려면 더 바보 머저리같이 구는 게 제일 빠르거든.”

이재가 쏘아붙이는 말을 두영은 괴로운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껏 이재에게 대해온 태도는 딱 그 정도였으니까.

꿈을 이루기 위해 어린 나이에 독립해서 앞만 보고 걸어온 두영이기에 누구보다 자신에게 냉정하고 엄격했고, 무리 없이 자신의 길에서 성과를 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기에 자신을 숨기는 노련함만큼은 미숙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두영과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의 냉정함과 엄격함에 영향을 받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보다 두영을 지켜보며 응원하던 이재는 동시에 끊임없이 스스로가 두영의 옆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고뇌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가뜩이나 자존감이 낮은 이재에게 아득한 자격지심으로 돌아왔다.

“…이재 씨, 다 내 잘못이에요. …다 내가 어설퍼서, 어른스럽지 못해서 이렇게 됐어요.”

이재는 팔짱을 끼고 두영을 노려보았다. 두영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민망함에 결국 다시 고개를 들어 이재의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전화로든 편지로든 이야기할게요. 지금은 우리 둘 다 이성적으로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것만은 지금 말할게요.”

“…”

“같이 갈 수 있냐고 묻고 싶었어요. 몇 십 번이고, 몇 백 번이고.”

두영은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이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이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정작 묻진 않은 주제에.”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두영의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이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아, 됐어. 오늘은 그냥 내가 술 취해서 어른답지 못하게 군거야. 마지막에 추한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 잘 자고, 잘 가고, 억지로 연락 안 해도 돼. 힘내라.”

이재는 뒤돌아서 옷을 대충 추슬러 입으며 억지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는 두영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현관으로 나갔다. 여전히 제자리에 굳어 있는 두영을 뒤로 한 채 이재는 현관에 서서 중얼거렸다.

“…아, 나도 프랑스어 아는 거 하나 있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두영은 이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살짝 고개를 돌린 이재의 눈가에는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Je t'aime.”     



 

‘…결국 마지막까지 이재 씨에게 응석을 부렸네.’

두영은 뒷목을 몇 번 주물렀다. 헤어지지 않을 방법은 있었다. 자신이 프랑스행을 포기하거나, 이재가 프랑스로 같이 가면 된다. 그러나 요리의 길에 목숨을 건 두영에게 전자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길이었고, 무엇보다도 이재가 죄책감에 짓눌릴 것이다. 그렇게 관계를 진전시켜봤자 둘 다 마음 속 응어리를 내내 안고 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재가 프랑스로 같이 가는 선택지가 애로 사항이 없지도 않다. 총주방장과 더불어 이재는 1호점 개점부터 여사장과 함께 일한 티블리 안나의 개국공신이다. 삼 년 남짓인 두영의 커리어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런 사람이 순전히 두영을 위해 자신의 직장과 인간관계를 내려놓고 이역만리 타향으로 따라간다고 한들, 레스토랑 견습생이자 취업비자 체류자에 불과한 두영이 해줄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곁에 있어 달라’고 한 번이라도 말했으면 이재는 늦든 빠르든 기꺼이 두영과 동행했을 것이다. 힘없고 뒷배 없는 동양인 신분으로 날것의 인종차별에 시달리며 허드렛일을 전전하는 한이 있어도 두영의 옆을 지켰을 것이다. 자존심 강한 두영에게 그것은 쉽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자기완결한 시점에서 나는 미숙한 거였어.’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이 알 수 있는 형태로 내보여야 했다.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의논을 해야 했다.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어떤 결과가 된다 해도 정말 소중하다면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말아야 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재에게 거부당할까봐 두려운 마음을, 이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감추고 스스로를 기만했다. 그러한 자기기만으로 이루어진 독선의 끝에, 결국 상처받은 건 이재였다.

-Je t'aime.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영은 이재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이재는 그런 자신에게 환멸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어른으로서 대응했다. 기꺼이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등을 밀어주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나아가는 것뿐이다.

‘…다시 만날 때는, 서로를 이끌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있길.’

탑승구를 향해 캐리어를 끌며 두영은 굳게 다짐했다.     



     

병실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미래의 시선 끝에는 아까 들어와서 인사하고는 내내 말없이 서 있는 여사장과 일도가 있었다.

여사장이 들어올 땐 반가움에 차 있던 미래의 얼굴은 뒤따라 들어오는 일도를 보는 순간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찼다. 극적인 표정 변화에 여사장은 놀라는 반면 일도는 그저 담담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우선은 푹 쉬렴. 서둘러 복귀할 필요 하나도 없어. 알겠지?”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여사장의 말에 미소와 함께 화답한 미래는 곧바로 험악한 시선으로 돌아와 일도를 쏘아보았다. 여사장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미래의 적의로 가득 찬 모습에 긴장했다. 일도는 자리에 서서 묵묵히 그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럼 난 뭐라도 사갖고 올게요.”

여사장은 두 사람과 눈을 맞추며 뒷걸음질 치듯 병실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만 남은 병실은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윽고 미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아니, 어디서부터 당신이 관여한 거죠?”

“…”

“…내가 물어보는 것만 답하기로 한 건가요, 아니면 말할 내용이 정리가 덜 된 건가요?”

일도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떴다. 그리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어디까지 깨달았지요?”

“적어도, 당신이 오늘 일어날 일을 오래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게.”

미래의 말투는 시종일관 살기등등했다. 간호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은 몇 주 동안 기척도 기약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이 오늘 아침에 깨어난 것과 거의 동시에 여사장과 일도가 나타났다. 억지로 눕혀져 주사를 맞기 직전 본 우주를 부축해 나가는 일도의 모습,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우주의 신변을 확보하는 그 모습은 그건 명백히 우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둔 것이었다.

“…알고 있었던 거죠? 우주 씨에게 문제가 생길 거라고.”

“…”

일도는 제자리에 서서 침통한 얼굴을 했다. 미래의 언성이 높아졌다.

“들었어요. 그 동안 우주 씨가 출근도 안 하고 계속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고. 그 과정에서 어딘가 건강이 나빠진 거죠? 그래서 기억을 잃고, 다리도 망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난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어른이라면! 그렇게 자신을 망가뜨려서까지 병원 문턱을 드나들고 있으면! 왜 안 말린 거죠?”

“…”

“입이 붙은 게 아니면 말을 해 봐요! 대체 왜 지켜만 보고 있었냐고요!”

일도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말을 들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니 온 정신을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미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당장이라도 칼날이 되어 자신을 난도질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죄인으로서 질타를 받아내는 게 아님을 상기한 일도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었다.

“이보세요, 유일도 씨!”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일도가 주먹을 불끈 쥐며 지르는 외마디 말에 병실이 일순 쩌렁쩌렁 울렸다. 미래는 순간 말문이 막힌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일도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띄엄띄엄, 한 마디씩 말을 계속했다.

“…적어도, …나는, …바라지 않았어요.”

“…”

“…뭘 어디까지 알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장담하죠.”

일도는 말을 멈추고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하며 뜸을 들였다. 미래는 팔짱만은 풀지 않은 채, 그러나 비교적 누그러진 태도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 양이 오늘 눈을 뜬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의 결과는, 온전히 우주가 원한 것입니다.”

“…!”

“우주가 저렇게 됐다는 사실이야말로, 태 양이 깨어난 게 우연이 아니고, 우주의 소망에서 비롯된 필연이라는 반증입니다.”

일도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미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이탈 사인을 재러 병실로 들어오려던 간호사는 문 너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지고한 구원이 일어났고, 숭고한 희생이 일어났고, 영원한 비극이 남겨졌다. 구원과 비극의 당사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깨달을 준비가 되었다. 방아쇠를 당긴 건 일도였다. 이젠 미래의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불이 꺼진 방에서 미주는 잠든 우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창밖은 이제야 해가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노을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있었다. 며칠 간 휠체어에 탄 채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를 받다 보니 피로가 몰려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병원도 하루아침에 다리를 못 쓰게 된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미주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아마 우주의 다리는 평생 이대로일 것이다. 더 이상 두 다리로 우뚝 설 수 없을 것이다. 혼자서 집 앞 돌계단을 오르내리지도 못할 것이다. 일도와 함께 작업을 나갈 수 없는 건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우주는 자신의 다리에 대해 조금도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도 온화해져─좋게 말하면 그렇고, 미주의 시선에선 존재감이 옅어지고 자의식이 희미해져─있었다. 다만 미주가 슬퍼하는 기색을 보고는 안절부절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어머니,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해요.”

이 와중에도 우주는 스스로를 제쳐 두고 미주를 위로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휠체어 생활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앉은 채 허리를 쭉 빼고 설거지를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레를 밀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처지였던 것처럼 우주는 조금도 부의 감정을 품지 않았다.

‘자신이 미래를 위해 지금의 처지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우주는 자신을 대견해하거나 미래를 원망할까?’ 미주는 그런 의문이 애초에 의미가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당사자가 기억을 못하는 이상 우주를 대견해하거나 미래를 원망하는 건 나머지 사람들의 선택사항이다.

그리고 얄궂게도 그에 대한 답 역시 이미 정해져 있다. 제삼자의 시선에서 이 처절하리만치 불합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상황에 당사자가 아무 불평도 억울함도 호소하지 않는데 엄마라 해서 무슨 수가 있을까.

그래서 미주는 또 다시 웃기로 했다. 그저 같이 있을 수 있음에 웃기로 했다. 우주 대신 자신이 기억하고 있으니, 자신이 우주의 다리가 되어 줄 것이니 괜찮다. 이미 오래 전에 우주와의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치기로 한 마당에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

미주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내일은 오랜만에 반가운 손님이 올 것이다.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미주는 소매를 걷었다. 일도는 청소에 깐깐한 사람이다. 휠체어 동선을 짜려면 온 집안을 돌아다녀야 할 것이고, 그러다가 정리정돈이 안 되어 있거나 먼지가 쌓여 있는 걸 발견하면 신명나게 놀려댈 것이다.

‘…그런 식으로라도 웃겨 주려고 말이지.’

미주는 손목의 밴드를 풀고 걸레를 빨기 시작했다. 눈을 크게 뜨고 웃는 연습을 하면서. 우주에게도, 일도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달동네의 오르막길에 들어서자 익숙한 둔턱이 나타났다. 속도를 줄이지 않은 포터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조수석에 앉은 미래는 일도를 쳐다보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일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 끄고는 귀에 꽂아 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저기요, 창문 연다고 간접흡연 안 되는 거 아니거든요?”

“마스크 써요. 그러라고 사 준 거니까.”

일도는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미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날 일도는 여사장이 오기 전에 연락처를 건네주며, 퇴원할 때 전화를 주면 보관 중인 미래의 짐을 인계할 겸 모든 걸 이야기해주겠다고 했다. 미래는 일도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지만, 일도 말고는 진상을 들을 사람이 없었다. 그 때문에 퇴원 축하 파티를 열어주겠다는 티블리 안나의 동료들의 제안도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로비로 내려가자 일도 옆에는 여사장이 함께 있었다. 건물을 나온 일도는 포터를 가리키며 미래에게 같이 갈 곳이 있다고 했다. 미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 경악할 일은 옆에서 그걸 들은 여사장이 “그럼 맡길게요.” 하고는 자기 차를 타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차에 탄 일도는 덴탈 마스크 한 곽을 건네며 “일단은 퇴원 선물이에요.” 한 마디 하고는 곧바로 첫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운전하는 내내 일도는 느긋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담배를 빨아댔다. 세 개비 째를 다 피울 무렵 미래는 차가 익숙한 골목에 들어섰음을 눈치 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미주를 만나기 위해 숱하게 돌아다녔던 골목이니까. 그날 우주를 만나기 위해 빗속을 달린 골목이니까.

포터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올라 산기슭을 등진 단독 주택 앞에 멈춰 섰다. “내려요.” 일도는 미래의 짐이 든 가방을 메며 말했다. 미래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일도를 노려보았다.

“…여기가 어디죠?”

“우리 집이에요. 어서 내려요.”

“당신 미쳤어!? 이 변태 새끼가!”

미래는 욕지거리를 내지르고는 재빨리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차를 타고 온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며 미래는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냈다. 일도는 허둥지둥 차에서 내려 미래를 뒤쫓으며 소리쳤다.

“태미래 양, 오해하지 말고 얘기 좀 들어 봐요!”

“쫓아오지 마! 더 이상 쫓아오면 신고할 거야!”

“안 쫓아가도 신고할 거잖아요! 제발 말 좀 들으라고요! 애초에 나 그쪽 같은 머리에 똥도 안 떨어진 어린애는 취향 아니에요!”

달동네의 골목길을 내달리며 두 사람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느슨해진 마을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지랄! 헉헉, 성범죄자들이, 헉헉, 십중팔구 그런 말로, 헉헉, 피해자를, 헉헉, 안심시키는 걸, 헉헉, 모를 줄 알아?”

“헉헉, 어휴, 태미래 양! 헉헉, 나를, 헉헉, 못 믿겠으면, 헉헉, 우주랑 사장님을 믿으라고요! 헉헉, 설마 내가, 헉헉, 두 사람의, 헉헉, 믿음을, 헉헉, 배신하는 짓을, 헉헉, 하겠어요?”

한참을 도망치던 미래는 그 말을 듣고 우뚝 멈춰 섰다. 일도 역시 열 발자국 정도 거리를 둔 채 멈춰 섰다. 두 사람 다 가파르게 숨을 헐떡였지만 좀 더 빨리 호흡을 회복한 건 미래였다. 잠시 후 간신히 숨을 고른 일도가 고통스러운 듯 폐를 부여잡고 간신히 말을 꺼냈다.

“헉…, 진짜…, 헉…, 흡연자한테…, 헉…, 달리기 시키지 좀 마요…”

“…자업자득이에요. 그러게 왜 의심받을 행동을 해요?”

미래는 한심한 듯 혀를 끌끌 차며 일도를 흘겨보았다. 일도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난 어차피 태 양에게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고, 신뢰받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태 양과 우주에 대해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할 겁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니까요.”

“참으로 가증스럽고 믿음이 안 가는 말이네요. 하지만 그보다 더 괘씸한 건 그런 말을 이제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그런 말을 들으면 이런 반응을 보이고 뿌리칠까봐 사장님까지 포섭한 건가요?”

“그래요. 역시 내가 본 대로 태 양은 통찰력이 뛰어나요.”

너무나도 시원하게 인정해버리는 일도의 태도에 미래는 내심 적잖이 당황했다.

“뛰어난 통찰력은 무궁무진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자아에 대한 견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죠. 그러나 타인의 존재에 대해 열려 있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리 기를 써도 성찰에는 이르지 못해요.”

“…지금 당신을 믿지 않았다고 훈계라도 하는 건가요? 나한테 신뢰받지 못할 각오를 한 거 아니었어요?”

“일반론이에요. 태 양이 그러한 성찰에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의 부류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죠. 하지만 태 양이 듣게 될 이야기는 지금부터 같이 갈 장소가 아니면… 태 양의 확고한 이성으로는 온전히 믿기 힘든 성격의 것이에요.”

말을 마치고는 일도는 몸을 돌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미래는 영 일도를 못미더워하면서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대문을 열고 들어온 일도의 뒤를 따라 미래는 조심스럽게 집 마당에 들어왔다. 일도는 집이 아닌 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걸어가자 눈앞에 가파른 돌산이 나타났다. 일도는 멈춰 서서 미래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미래는 얼굴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일도의 옆에 섰다.

40도는 되어 보이는 경사면 가운데 지그재그로 박힌 쇠말뚝에 매인 밧줄이 딱 한 가닥 정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일도는 주머니에서 목장갑을 꺼내 미래에게 건넸다.

“지금부터 여길 올라갈 거예요. 명심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올라갈 때까지 내 손을 놓으면 안돼요. 알겠죠?”

일도의 비장하다시피 진지한 표정과 어조에 미래는 목장갑을 건네받으며 괜히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갈까요, 발밑 조심해요.”

일도는 오른손으로 밧줄을, 왼손으로 미래의 오른손을 잡고 앞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래는 발밑을 의식하면서 왼손으로, 아니 왼팔로 밧줄을 감다시피 하며 뒤따라 올라갔다. 앞에서 이끌면서도 일도는 별로 힘든 기색 없이 경사로를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까 전 잠깐 뛰었다고 숨을 몰아쉬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미래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두 팔을 전부 쓰고 있어 땀을 훔칠 수도 없었다. 바짝 긴장한 탓에 힘들다는 말도 나올 여유가 없었다.

중턱쯤 올라왔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갑자기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어찌나 심한지 일도와 맞잡은 손조차 안 보일 지경이었다. “어!?” 당황한 미래가 반사적으로 입을 떼었다. “밧줄에 집중해요, 밧줄을 의식하면서 천천히!” 일도의 차분한 충고에 미래는 정신을 차리고 계속 나아갔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발밑은 점점 딱딱한 땅이 아닌 구름을 밟는 것 같았다. 그저 뿌옇게만 보이던 시야는 오르면 오를수록 그 너머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태양빛이 분광되어 나타나는 스펙트럼의 범주에 존재하기나 할까 싶은, 온화하면서도 영롱한 광채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윽고 안개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바라 마지않던 빛이 눈앞에 들어오는 순간 두 사람은 정상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었다.

“세상에…!”

미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늘에는 해도 달도 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기는 예의 형용할 수 없는 광채를 띤 채 존재하고 있었다. 기존의 물리학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눈앞에는 꽃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온갖 종류의 꽃들이 구분 없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미래는 꽃의 향기를 맡고픈 충동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갖다 대었다.

순간 미래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계절이면 개나리가 슬슬 지고 나팔꽃 봉오리가 개화할 준비를 해야 한다. 눈앞에는 개나리와 나팔꽃과 코스모스와 동백꽃이 함께 피어 있었다. 사계절의 대표 격인 꽃들이 한 자리에, 그것도 하우스나 정원이 아닌 들판에 피어 있다는 건 이미 자연의 법칙 같은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미래가 풀썩 주저앉으며 손을 땅에 짚자 꽃 몇 송이가 손아귀에 잡혔다. 꽃을 꺾어서 눈앞에 가져오고는 미래는 “하…, 하하…” 하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담청색 물망초였다. 분명 병실 화분에 꽂혀 있던 꽃이었다. 그저 어딘가 하우스에서 재배한 품종이겠거니 했다. 지금 계절에 자연 발아가 되는 게 이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머릿속의 이상한 일들이 눈앞의 사실로 들이밀어지자 이제 미래는 단순히 기가 찰 단계를 아득히 넘어섰다.

“도대체 여긴 어디죠? 산 정상에 이런 환경이 자연적으로 조성되어 있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미래는 거의 공황 상태로 일도의 팔을 잡고 흔들며 외쳤다. 일도는 여전히 태연한 채, 미래의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더 말이 안 되는 게 있으니까 직접 봐요. 너무 놀라지 말고.”

미래는 일도가 시킨 대로 돌아보았다. 없었다. 있어야 할 산비탈이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졌다. 있는 건 그저 어디까지고 펼쳐진 꽃밭이었다. 다른 장소로 이어지는 어떤 이정표도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

세계를 언어와 논리로 구성할 수 있는 영역과 언어와 논리를 초월한 영역으로 구분한다면 이는 명백히 후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감의 영역에서 분명히 실재하는 눈앞의 세계는 부인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침묵하기도 난감했다. 아니, 감히 침묵할 수 있겠는가, 지금 그 세계에 실제로 던져진 존재자로서.

“도대체 날 어디로 데려온 거예요…!”

미래의 목소리는 몸과 마찬가지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일도는 무릎을 굽혀 미래와 눈을 맞추고는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주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고 했죠? …이곳은 녀석의 고향이에요.”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공간이요?”

미래는 연이어 충격을 받은 탓인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일도 역시 가방을 내려놓고 꽃밭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럼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걱정할 것 없어요. 이곳은 낮과 밤이 없으니까.”



────여름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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