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윌리엄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대해 감상을 말할때 나는 최대한 냉소를 자제하려고 하지만, 이미 제목에서부터 실패한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란, 백인 남성의 ego trip(자아찾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을 뜻한다.
이런 내러티브는 위대한 것으로 칭송받고 유명세를 아무리 타도, 내가 직접 관람하거나 읽었을 때 그 위대함의 한 조각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렵다. 비슷하게 영화 <버드맨>이 있다.
단순히 화자가 백인 남성이란 것만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작금의 무수히 많은 고전의 기준을 만든 백인 남성 화자들의 작품을 읽으며 내가 모두 같은 시니컬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왜 유독 <버드맨>과 <달과 6펜스>는 나한테 "내가 여기서 무엇을 느껴야 하지?"란 의문을 남겼을까?
내가 스트릭랜드나 버드맨 류의 남성 화자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독후감을 써내려가다 불현듯 깨달았다. 그들이 결핍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에 나는 공감이 안 된다. <달과 6펜스> 속 스트릭랜드에겐 결핍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그냥 작금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존심만이 보인다. 런던에 있는 증권 거래인인 자신에게, 파리에 있는 짧은 경력의 화가인 자신에게, 스트릭랜드는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진정한 예술가는 이런 것이 아니야' 정도의 괴로움을 느꼈으려나? 에고의 팽창은 결핍과 다르다.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정체화 하려면 자의식도 필수인가, 싶기는 하지만... 결핍이 드러나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대중에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에고와 결핍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좀 더 찬찬히 생각해서 트레바리 모임 시간에 말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
20대때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도장깨기를 하겠단 마음으로, 익숙한 제목들부터 무작위로 책을 읽어나가고 있을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처음엔 고갱을 컨셉으로 한 남자가 타히티로 가서 예술 세계를 펼치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웬 성격 나쁜 남자가 런던과 파리에서 너무 오랫동안 살아서 좀 놀랐다. 타히티 이야기가 훨씬 많이 나올줄 알았는데... 갑자기 런던에 가족을 버려두고 파리로 날아가 소위 '예술가적 삶'을 살다가 그것도 만족하지 못해 타히티로 떠나는 스트릭랜드를 통해 나는 작가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는지 두 번째 읽어 나가는 중인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냥 서머싯 몸은, 이 책을 쓸 당시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도덕적이고 가치있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방식을 완전히 파괴하고 동시에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 가상의 인물을 창조해 이런 삶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보려고, 그런 반항적 마음으로 출판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작품이 문학 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부분이 바로 그 메타적 맥락인 것 같다. 굳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비교를 들자면 당시의 '컴백홈' 혹은 '전사의 후예' 같은 노래가 아니었을까...?
어차피 명작이 명작으로 인정받는 데에 굳이 극동 아시아에 사는 비영어권 여성 화자의 동의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에 있었고, 나는 그것을 공급받아 읽어보았을 뿐이다. 얼마 전 소셜 미디어에서 본 익명 화자의 인용인데 "'글쿤' ->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할 생각도 없을 때 쓰는 말" 이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몸의 작품 중에는 <인생의 베일>이 훨씬 재밌었고 나오미 왓츠와 에드워드 노튼이 주연한 영화 버전 <페인티드 베일>도 감동적으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