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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mondo Oct 24. 2021

노목적지 여행

약속 없는 주말. 오랜만에 '노목적지 여행'을 하기로 했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먼저 오는 버스에 올라타 노선도를 보니 익선동이 있었다. 지금의 카페거리가 생기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익선동으로 오늘의 1차 목적지를 잡았다. 


노목적지 여행이란, 아무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터미널이나 기차역으로 가서 한 시간 거리의 도시 중 가장 빨리 떠날 수 있는 도시에 다녀오는 나만의 여행 방식이다. 목적도, 계획도 없이 떠나지만 과정 속에 목적지나 목표가 생기는 게 이 여행의 궁극적 묘미인데, 문득 버스 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그토록 하염없이 떠나고 돌아와야 했을까.


대학생 시절엔 노목적지 여행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꼭 떠나야 했는데, 그때마다 웬만해서는 너른 들판의 풍경을 내내 볼 수 있는 기차를 탔다. 당시에도 KTX는 있었지만, KTX를 탈 수는 없다. 이런 여행은 새마을호나 무궁화호가 제격이다. 떠남이라는 것은 내게 말 그대로 ‘떠난다’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으므로 오래 걸릴수록, 그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많을수록 좋았다. 

읽을 책과, 다이어리, 그리고 당시 내게 보물 1호였던 아이리버 MP3만 있으면 아쉬울 것이 없던 날들.  

막상 도착하고 한두 시간 후에 곧바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야 할 때도 많았지만, 내겐 일상에서 탈피했다는 것만으로도 답답한 마음에 산들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떠다니는 중에 가끔 친구에게서 어디냐는 연락을 받는다. 기차 안에 있다는 나의 대답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오지만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그날그날의 목적지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나는 어디를 가는지 알 수 없다. 왜 가냐는 물음에도, 왜 이런 여행을 하느냐는 질문에도 명확한 답을 구할 수가 없다. 그저 무작정 어딘가로 향하고 싶었고, 그 속에서 여러 풍경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밖에. 그렇게 나는 나의 배경들을 바꾸고 싶었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할 일이 없는 나는 생각 속에 갇힌다. 최근의 고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오래전부터 궁금했지만 아직 풀지 못한 삶의 의문점들에 도착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나와 마주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결국 그 모든 발걸음들은 나를 향한 여행이었으리라. 어릴 때부터 15분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심지어 지하철에서도 멀미를 할 만큼 약한 달팽이관의 소유자였던 나는 20대 중반을 지나면서 5시간의 고속버스 여행도, 더 심하게 흔들리는 시내버스도 꽤 오랫동안 탈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웬만한 대중교통은 모두 무리 없이 탈 수 있는데, 멀미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 나 스스로 덜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나이가 들며 삶에 초조함을 느끼게 될수록 점점 떠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굳이 어딘가로 가는 게 귀찮았고, 삶은 딱딱한 일정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일정을 제외한 시간의 빈 공간들은 다음 일정을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만 이루어졌다.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이런 여행을 통해서 느려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빠름이 강요될수록, 경쟁이 강요될수록 혼자 느슨해지고 싶었던 걸지도. 

멈추기엔 두렵고, 뛰어가기에도 불안한 세상에서 나의 속도를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때의 용기가 그리운 날들이다. 

마음이 급해질수록, 걸음이 빨라질수록 천천히 걸을 용기를 내기 위해 떠나고 싶다.

창문 밖에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과 달리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그곳으로. 


분명한 목적지 자체가 설레기보다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설렘으로 가고 싶다. 

초조함과 불안감을 내려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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