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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용 Feb 01. 2020

몸 만드는 것의 예술

근력 운동

얼마 전 아내와 딸과 함께 간 미술관에서 본 미술관에 의자를 예술품으로 만들어 놓아 전시하는 공간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허리가 편해지는, 앉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내 척추에 꼭 맞을 의자를 기대하고 들어갔지만 전시관 안에는 의자로는 영 못써먹을 것들만 가득했다. 의자라고 하기엔 너무 크거나, 엉덩이 구조에 맞지 않거나, 너무 작거나, 흔적만 남은 등받이들을 보니 허리가 금세 불편해졌다. 게다가 앉지 말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어 앉을 수도 없었다. 3층 구석에 유일하게 앉을 수 있던 작은 의자가 나에게는 가장 의자 다웠고 편했다.  사람이 앉을자리를 제공한다는 의자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덩그러니 누군가의 시선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저 의자는 행복할까? 예술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의자의 모습이 저렇게 변해버렸나? 


 생각해 보면 어느새 그 본질의 한계를 넘어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주위에 너무도 많다. 옷은 단순히 추위를 막고 몸을 보호하는 수단이 아닌 지위와 자신의 부, 개성, 아름다움을 부각하는 물건이 되었다. 자동차도 단순한 운송 수단을 넘어 소유자의 부와 지위를 나타내는 존재가 되었다. 많은 기업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이나 서비스에 단순한 사용성을 넘어 사용자에게 의미를 부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단순한 운동화가 아닌 도전, 열정이란 의미를 고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나이키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놀랄 것이다. IT 기업들은 혁신성, 기술, 인문적 정신을 부여하려 노력한다. 우리는 단순히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닌 제품이 가진 이상과 의미를 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파트 헬스장에 가끔씩 가면 항상 보이는 얼굴들이 보인다. 60세 언저리의 열심히 운동하는 할아버지, 일은 하고 있는 건지 걱정되는 30대 청년, 에어 팟을 끼고 열심히 땀 흘리는 20대 남자 들은 이미 좋은 근육을 가졌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중량 운동을 하고 있다. 프리웨이트 존을 꽉 쥐고 있는 세 남자 때문에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주눅이 들기도 하지만 무엇 때문에 저들이 저렇게 땀 흘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운동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곁눈질로 살피기 위해서라도 프리웨이트 존 주위를 배회한다. 


 처음에 합리주의 정신으로 뭉친 나 같은 사람으로선 그들의 마음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 근육이라는 것은 본디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더 많은 근육은 에너지 소비량을 늘리고 관절 운동의 일부 제한을 일으킬 수 있고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시간이 많다. 사실 현대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많은 근육은 전혀 필요 없다. 사실 보디빌더나 트레이너, 운동선수가 아닌 이상 적당한 근육량이면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저들은 어찌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일에 저렇게 고통을 받으며 몰두하고 있는가? 그것이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내 첫인상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본질적으로 필요해서 하는 것보다 원해서 하는 것에 더 많은 의미를 두는 것 같다. 필요해서 먹는 오늘의 저녁보다 원해서 먹는 특급 호텔의 저녁 식사는 같은 영양섭취의 행위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필요에 의해 자동차를 사는 것보다 욕구에 의해 사는 두 번째 외제차가 더 큰 만족을 준다. 인간에게 필요란 것은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필요를 넘어선 다른 의미에 보다 집중하는 것 같다. 앞서 말했던 예술의 영역에서 흔히 예술품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은 어느새 본인이 처음 가지고 있던 마지막 그림자 정도만 남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얼기설기 철사로 만들어진 커다란 그릇은 그릇의 역할은 전혀 해낼 수 없지만 예술품이다. 그리고 그 커다란 그릇을 사기 위해선 일반 그릇 보다 수 백배 이상 비싼 값이 든다. 작동이 잘 되는 최신 컴퓨터 보다 부서져서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처참한 상태의 컴퓨터가 보다 예술적이다. 그리고 망가진 컴퓨터 앞에서 인간은 한참이나 서서 무언가 골똘히 고민한다. 


 보디빌딩이라고 하는 것 역시 예술과 맞닿아 있다. 보디빌더들은 자신의 근육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 근육의 의미를 던져버린다. 그들에게 근육이란 동물이 운동하기 위해 필요한 몸의 조직이 아니다. 관절과 관절을 이어 에너지를 소모해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기능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근육은 아름다움에 닿기 위해 필요한 재료다. 보디빌더들은 근육이라는 재료를 키워내 가장 아름다운 작품, 그들의 육체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조각가는 대리석을 바깥에서부터 깎아 내지만 그들은 그들은 근육에서 안에서부터 키워나간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모든 이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보디빌딩의 과정은 고난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체지방을 5% 미만으로 줄이기 위해 곡기를 끊고 수련하는 모습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떨어지는 폭포물에서 고통을 참는 도인과 비슷한 면이 있고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스스로 극한의 상태로 밀어 넣는 예술가의 절박함과도 닿아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고통의 시간을 강요하지 않았다. 보디빌더들은 그들 스스로 그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를 선택한다. 


 내가 오늘부터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에게 보내는 내 나름의 경의의 표현이다. 자신이란 육체를 예술로 만들어 가려하고 있지만 우리 몸의 구조와 근육의 생리에 대해선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재활의학과 의사로서 많은 보디빌더들과 오늘도 체육관에서 자신의 몸을 조각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작은 조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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