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퇴직 후,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며...
새벽 1시.
퇴근을 하며 새벽공기를 삼키듯,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나에게 중얼거리듯, 새벽별을 보며 물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이런 것이었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것인가?
새삼스러울건 없었다. 사실 1년 동안 끊임없이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이제 답변할 때가 된것 같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희망퇴직 신청서를 작성하고 팀장에게 메일로 발송했다. 희망퇴직제도 신청 마감 2일전이었다.
"어쩌려고 그래?"
마음을 터 놓고 지내는 한 동료의 진심어린 걱정이 담긴 한마디였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어쩌긴. 이제 내 진짜 인생을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 거지. 그럴려면 숨어버릴곳을 아예 없애버려야 하거든..."
몇년 전 부터 재테크 까페에 자주 들락거렸다. 그곳에는 목표금액까지 독하게 모으고 투자해서 직장을 퇴사하고 여행을 다니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이 많다. 다짐대로 목표를 달성한 사람은 많은 직장인들의 영웅이 되어 추앙받는다. 나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다.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에서 승자가 되어 당당하게 퇴직하는 꿈을 꾸었다. 닥치는데로 책을 읽었고 강의를 들었고 부동산부터 주식까지 여러투자를 했다. 하지만 쉽게 될리 없다.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스노우 볼 효과를 보려면 꽤 많은 시간을 노력하고 인내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타오르던 의지의 불꽃은 사그러 들었고, 난 그냥 그렇게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3년이 흘러 40대 중반이 되었다.
그 시기에 회사는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언론은 12년만에 실시된 회사의 사무직 희망퇴직제도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불행히도 난 그 제도의 담당자였다. 자발적 신청에 의해 일정의 위로금을 받고 퇴직하는 공식적 절차와 함께 비생산적 자원으로 분류되는 나이 지긋한 선배들을 교묘하게 압박하는 방안까지 고민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나의 미래 또한 눈치 채 버렸다. 머지 않은 시점에 나도 퇴출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미래를 수정할 수 있는 '현재'라는 자리에서 있다. 마치 현재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인 과거로 돌아와 있는 것과 같다. 불행한 미래는 지금 막아야 한다. 훌륭한 미래는 지금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는 미래를 치유할 수 있는 기술적으로 유일한 시점인 것이다.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中)
취업을 하고 17년 동안 3번의 직장을 걸쳐 쉼없이 달려왔다. 눈에 보이는 미래를 바꾸려면 바로 지금 꽤 많은 용기를 내어 행동해야 한다. 더 늦기전에 남은 인생을 스스로 그리면서 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보란듯이 재테크에 성공해서 경제적 안정이 주는 심리적 포근함을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그동안 틈틈히 해왔던 공부와 투자 경험을 통해 세상에는 기업이 조금씩 주는 월급 모이 말고도 나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막상 마음을 먹자 두려움과 함께 정체모를 에너지가 내면에서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재미없는 세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시들해 보이는 이유는, 세상이 시들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늘 거기에 그렇게 눈부시게 서 있다. (구본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中)
이렇게 거창하지 않는 모습이지만, 나의 제 2의 인생은 조용하고 분명하게 시작되었다.
막상 퇴직을 하고 세상에 나오니, 마치 아기가 막 걸음마를 배운 것 마냥 비틀거렸다. 15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짜여진 틀안에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자유가 제한되어 있을때에는 1분 1초를 알뜰살뜰 아껴가며 독서하고 공부했는데, 퇴직 후에는 역설적으로 무한한 시간의 감옥에 갇혀 일상의 무너짐을 경험하게 되었다.
거창한 목표가 중요한게 아니었다. 내 눈앞에 주어진 오늘 하루를 스스로 만족하게 살아 내는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삶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대함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은 세부적인 것 속에 존재한다. 일상의 일들이 모자이크 조각처럼 모여 한 사람의 삶을 형상화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루하루는 전체의 삶을 이루는 세부적 내용이다. 작은 개울이 모여 강으로 흐르듯이 일상이 모여 삶이 된다.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中)
명상. 독서. 글쓰기. 운동. 돈공부... 지금 이순간을 내가 원하는 삶으로 사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또한 퇴직을 하며 많은 것들과 작별을 고했다. 대기업 명함은 1인 기업으로 바뀌었고, 꽤 안정적인 연봉에서 소득 0 원부터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꼭 나쁘지만은 않다. 삶의 무기력함이 설레이는 두려움으로 변했고, 시키는 데로 일하는 수동적 노예가 배고프고 외롭지만 채찍을 든 주인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아직 무엇 하나 이룬 성과는 고사하고 가끔 표류하고 심연으로 쳐박혀 버리는 느낌마저 든다. 이러다가 숨 막혀 죽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이젠 스스로가 일어서야 한다. 구명조끼를 던져 줄 누군가는 없다.
내 진짜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