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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 여경 Sep 04. 2021

나는 남편이 집에서 놀았으면 좋겠어

공무원 퇴사하고 다시 공기업 도전한 이유#2

공기업 준비를 시작하기 전, 그리고 지금의 남편과 소개팅하기 전 솔로의 자유를 만끽하던 나는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당시 동생은 결혼을 앞두고 여러 일이 풀리지 않아 고민이 많았고 직장 일로 바쁜 동생 대신 엄마가 사주를 보러 갔다.


사주나 점에 냉소적이었던 나는, 미덥지 못한 눈길의 감시자로 따라갔다가 으레 그렇듯 얼떨결에 내 사주를 듣게 된다.



"4년 전에 관운이 있었네? 혹시 나랏밥 먹어?"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엄마를 째려보았다.




"엄마가 말했지 나 공무원 하다 관뒀다고."

"아냐 무슨. 나 억울하다 얘. 계속 같이 있었잖아. 말할 시간이 어딨어."




나는 화이트보드에 한자들과 숫자들을 늘어놓는 중년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요즘 공무원 시험 보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관운이 있다는 말은 넘겨짚으며 할 수 있다 생각했다. 당시 제대로 씻지도 않고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나온 내 모습은 누가 봐도 고시원에서 바로 튀어나온 만년 고시생 같았으니까.  


내가 놀랐던 이유는 시험에 합격했던 시기를 정확하게 맞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진짜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관뒀어? 왜 그랬대. 근데 관운이 한 번 더 들어있네. 내년엔 해봤자 안 되고….. 내후년?"


나는 황당했다.



"저 공무원 준비 안 하는데요……”


"그래? 이상하네. 아무튼 이 시기 절대 놓치면 안 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분과 나는 서로 뭔가 대화가 되지 않을 거라 무언의 확신을 나눴다. 심드렁한 나의 태도에 그분은 다시 동생 이야기로 돌아가 엄마와 대화를 나눴고, 나도 역시 괜히 따라왔다고 생각하며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가 나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던 건지 갑자기 나를 보며 말했다.



“사귀는 사람은 있어?”

“저요?”

"내년에 결혼운도 있네. 그리고 임신은……”



나는 순간 억울한 목소리를 가득 담아 볼멘소리로 외쳤다.



"어머 선생님 너무해요! 저 지금 남자 친구도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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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이 결혼 1년 만에 백수가 되었다

#2 나는 남편이 집에서 놀았으면 좋겠어

#3 정규직이 될 자신이 없어요

..

..

____________________




  

 그런 내가 이듬해에 결혼을 했고,

그다음 해가 끝나갈 겨울, 하반기 공채시험에 합격해 나랏밥을 먹게 된다.



하지만 남편이 폐업을 하기 직전만 해도 나는 다시 그 힘든 수험생으로 돌아갈 줄 전혀 몰랐다.


당시 두 번째 책의 원고를 마무리하고 있었고 새로 공모전에 낼 작품들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2년간의 스케줄은 살인적이었다.


평일 저녁엔 유튜브 촬영과 편집을 하고 새벽에는 원고를 썼다. 독서와 자기 계발 커뮤니티 스탭으로도 몇 년 간 활동 중이었다. 한동안은 주말에 강연들과 팟캐스트 녹음을 위해 왕복 세 시간 넘게 강남에 다니고 또다시 편집과 홍보활동의 연속.


평일 낮에 직장인으로 살면서 이것들을 감당하려 욕심부리다 보니 쉴 시간이 없었다. 물론 행복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몸은 내 마음을 따라오지 못했는지 결국 건강이 또 말썽을 부렸다.



그전에 몸의 여러 신호들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달리다가, 앞이 아예 안 보여 고생한 적이 있었다. 이후 한동안 영화관에 다닐 수 없고 컴퓨터나 TV도 선글라스를 낀 채 봐야 했던 나. 그래서 내게 눈은 매우 소중하다. 남편과 상의 하에 집중할 일에 좀 더 매진하기 위해 큰 마음먹고 1년 넘게 다니던 중소기업을 그만두었다.



퇴사 의사를 밝힌 지 두 달 후 후임자가 구해졌고 우리 부부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12개월간 꾸준히 돈을 모아 한 달 유럽 신혼여행을 가자는 목표를 세웠다(그땐 그 돈이 여행 대신 코로나 이후 비상자금이 될 줄 몰랐겠지만).



   



**




남편은, (가끔 돌변해서 딴 여자 같기도 하지만) 여러 분야에 도전하며 사는 아내가 보기 좋았다고 한다. 가끔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힘들어 보여도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가부장적인 집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폐업을 앞두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압박으로 인해 그는 무척이나 의기소침해 있었다. 남편은 곧장 어디든 당장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남편에게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남편이 좀 놀았으면 좋겠어.”               




그는 무슨 뚱딴지같은 큰일 날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남편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며, 그리고 이후 폐업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을 본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조급한 거 알아. 나도 그래. 근데 이럴 때는 누구나 판단이 흐려지잖아. 나는 남편이 쉬면서 좀 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보면 어떨까 해."




직원들을 두긴 했지만 사장이었기에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일주일 내내 저녁 아홉 시에 퇴근했던 남편의 삶. 아니 실은 딱히 출퇴근 시간이 없는 삶. 상사의 눈치를 보는 대신 불특정 다수인 고객들과 본사의 눈치를 보고 자신이 책임지는 직원들에게 급여를 줘야 하기에 '월급'과 휴가의 개념이 없었던 삶.


직장인으로만 살던 나는 상상할 수 없던 삶. 그는 사실 이미 이십 대 초반 뼈아픈 폐업들을 경험해 본 사람이었다. 한창 경기가 좋을 땐 두 개, 세 개의 매장을 넓혀 운영할 때도 있었지만 그건 단번에 잘 된 게 아니라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해보고 또다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새로 뽑은 직원이 갑자기 다음날 계좌번호만 문자로 달랑 보내고 일 못 하겠다며 나오지 않은 일은, 그저 수많은 스펙터클 아르바이트생들 채용기의 일부분일 뿐.



내가 여름휴가만을 기다리며 달력에 동그라미 치고 뭐하고 놀까 고민할 때

그는 늘 세금과 인건비, 그리고 부대비용들을 고민하며 다음 달, 그리고 내년의 계획을 생존을 위해 세워야 했다.


매사에 대부분의 일들을 '직원의 관점'에서 생각하며 가끔 사장에게 불만을 갖던 나와 달리, 내게 사장의 사정도 알려주며 균형 잡힌 시선을 갖자고 응원해 주던 남편.


그 사람의 지난 십 년을 나는 아무리 말로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신혼 시기가 우리한테 코로나 때문에 망가져버린 시간으로 기억되는 건 싫어. 코로나 아니어도 언젠간 다른 일하려고 했었다며. 그럼 그 준비 지금 시작하면 되잖아.

난 당신이 자발적인 백수의 삶도 누려보면 좋겠어.”                              







물론 나도 내가 이 말을 하고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나같이 불안 많은 여자가, 아니 매 순간 불안을 등에 떠안은 채 우울함에 정신과 상담도 받던 내가, 남편에게 돈 벌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내겐 분명한 이유와 확신이 있었다.


언제나 이십 대 내내 불안 위를 걸어가며 내가 배운 건,

'위기'가 커 보일수록 급하게 벗어나려 하면 꼭 '탈'이 나곤 한다는 거였다.     



**


**




대학 졸업 후 스타트업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저 졸업 후엔 취직을 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럴싸한 회사의 비전에만 현혹되어 곧바로 짐을 싸 타지로 향했다. 이후 나는 직원들과 6개월이 넘는 노동부 투쟁 끝에 단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밀린 월급을 받아내야 했다.


'그래 사회가 이렇게 더러워. 어른들이 공무원이 최고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주변에 하나둘 취직해가는 친구들을 보며, 휩쓸리듯 공무원이 뭘 하는지 무슨 직렬인지 이해 없이 빠른 합격 법만을 알아보고 매달렸던 나는, 결국 3년을 채우지 못하고 공무원 의원면직을 했다. 젊으니까 무조건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 건강도 잃었다.


그전까지는 진정으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대학 때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대학생이라는 울타리가 있기에 '보이지 않는 든든함'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그냥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떠있는 기분을 처음 맛본 것은 퇴사 이후였다. 불안하면서도 자유로운 느낌. 온전히 매일의 선택이 나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 그 책임도 온전한 나의 몫. 그 기분은 처음이었다.     




'직장 사 표 내고 관두면 죽을 만큼 힘들 줄 알았는데.. 안 죽네? 어떻게든 살아지네?'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했고 쉬고 싶으면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맘껏 쉬었다. 그렇게 몇 달을 충전하고 나니 뭘 하든 다시 살아갈 의지가 생겼다. 그 이후 나는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쌓아갈 수 있었다.  

               


외국 어느 특정 나라들에서는 청소년 시기에 갭이어라는 1년의 시간을 준다고 한다.     


진로를 결정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잠시 1년 정도 인생에서 멈춰 서서 여러 경험을 해보고 사색을 해보며 '내가 앞으로 뭘 하면 좋을지' 길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


청소년기엔 수능에만 매달려 몰랐지만 학생이나 직장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온전한 내가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 장기적인 방향과 인생에서 원하던 것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도 그런 시간을 갖길 원했다.      




 


“우리가 지금 먹여 살릴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 유럽 가려고 모아놨던 돈 있잖아. 만약 우리한테 애가 있었다면 나도 이런 말 절대 못해. 기회는 지금 뿐이야.”          


"하지만"


"내가 벌게. 좋아하는 일 반드시 전업으로 할 필요 없어. 다시 직장 구할 거야. 물론 나 다시 정규직 붙을 자신은 없어. 그래도 자기 쉴 동안 내가 돈 벌게."





그땐 내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냥 뭔가 그래야 할 거 같았다.

나는 그날 이후 유튜브에 채널 재정비 후 돌아오겠다는 글을 남겼고 결국 돌아가지 못했다.  

인스타에는 '위기 그리고 그 이후'라는 미래학자가 쓴 책 표지와 함께

"이번 코로나 위기를 계기로 제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남겼다.

곧바로 다시 이력서를 준비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취업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게다가 남편 또한, 내가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무원 수험생 시절 이야기와 공무원 경험담은 이전 책에 수록되어 있어, 브런치에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씁니다. 독자분들은 참고해주세요.

#사 표 내고 도망친 스물아홉 살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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