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와 스페인이 침묵하는 이유
모로코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좋은 일은 다 말하지 마.
Mal de ojo (에빌 아이) 생겨.”
질투가 담긴 시선이
사람에게 불운을 가져온다는 뜻이다.
한국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좋은 일 너무 떠벌리지 마라.”
겉으로는 같은 조언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세계관이 숨어 있었다.
모로코에서의 mal de ojo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다.
고대 지중해·아랍 세계에서
‘눈’은 물리적 힘을 가진다고 믿었다.
질투와 시선은 병과 불운을 불러오는 실체였고,
이를 막기 위해 푸른 눈 모양 부적,
보호 기도, 의례가 발달했다.
이 믿음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마을·친척·이웃이 촘촘히 얽힌 사회에서
좋은 소식은 빠르게 퍼지고,
그만큼 시선도 빠르게 쏠린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것’이 곧 안전이고 예의다.
한국도 전통적으로는 관계 중심 사회였다.
농촌 공동체에서 평판은 곧 생존이었고,
괜한 과시는 이웃의 질투를 사기 쉬웠다.
하지만 지난 70년, 이 구조가 급격히 변했다.
전쟁, 산업화, 도시화는
촌락 중심 공동체를 해체하고
학교·직장 같은 이동 가능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했다.
관계는 유지보다 확장이 중요해졌고,
기회는 ‘아는 사람’에게서 왔다.
이 변화 속에서 겸손의 쓰임도 달라졌다.
한국에서의 겸손은 발화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화된 성취를 부드럽게 감싸는 장치가 됐다.
“별거 아니에요”, “운이 좋았어요” 같은 말이 그 예다.
이 겸손은 전제가 있다.
이미 상대가 ‘드러낼 만한 일’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즉, 겸손은 시기심을 예방하는 게 아니라,
시기심이 생길 만한 조건을 인정한 뒤 완충하는 도구다.
반면 지중해·아랍권의 침묵은
그 조건 자체를 노출하지 않으려는 전략이다.
시기심이 생길 여지를 만들지 않으려면,
성취를 이야기하는 순간 자체를 줄이는 게 안전하다.
결국 두 문화권의 겸손은 기능이 다르다.
한국: 표현을 완화하는 기술.
지중해·아랍권: 표현을 봉인하는 기술.
하나는 말하기를 전제로,
다른 하나는 침묵을 전제로 한다.
행복을 말할까, 숨길까.
어느 쪽이든 시선은 그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다만 한쪽은 시선을 받아내기 위해 겸손을 걸치고,
다른 쪽은 시선이 닿기 전부터 문을 닫는다.
한국의 겸손은 이미 드러난 자랑 위에 얹는 리본이다.
그리고 mal de ojo를 믿는 사회에서는,
그 리본 대신 상자에 자물쇠를 채운다.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가 지키고 싶은 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