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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라는 가장 작은 언어

번역되지 않는 나로 살아남는 법

by 필로


은행에 서류를 제출하러 갔던 날이었다.

대표님과 함께였고, 앞에 앉아 있던 직원은

우리 회사 계좌를 담당하던 사람이었다.


이미 여러 번 메일을 주고받은 사이였지만,

내 이름을 정확히 설명해준 적은 없다.


그런데 그가 내 메일 주소를 적으며,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내 이름을 적었다.


Y-O-U-N-G-S-E-O.


나는 말하지 않았고, 그는 묻지도 않았다.

보통은 스펠링을 불러줘도 절반은 틀린다.

결국 종이를 받아들고,

“그냥 내가 적을게요” 하고 직접 쓰는 일이 익숙한데,

그는 스스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단지 이름을 외운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시간을 쓴 태도였다.

그 작은 수고에서 오는 감동은 의외로 컸다.




스페인에 살며 내 이름은 자주 사라진다.

카페에서, 택배기사에게, 회사 메일에서조차

‘영서’는 용시가 되거나, 용이 되거나,

혹은 Yonso라는 정체불명의 문자열이 된다.


나는 그저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싶을 뿐인데,

이름 하나로 한참 설명하다 지칠 때면,

그냥 “알리시아라고 해요” 하고 넘기기도 한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영서라는 이름, 좀 어렵다.

그냥 스페인식 이름 없어?”


이건 내가 먼저 양보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얼마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나는 스페인에서 내 이름을 대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이름 어렵네. 스페인식 이름 없어?” 하고 묻는 이들.

알리시아라고 말하면,

“그래, 그게 편하네”라며 그렇게 부른다.


그들에게 나는

발음하기 쉬운 형태로 변형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부르는 일보다,

자신이 익숙한 방식으로 바꾸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들.


두 번째는,

대충 들은 대로 적고, 대충 기억한 대로 부른다.

Younso, Yunseo, 용시.

그들에게는 악의가 없다.

그저 기억하지 않을 뿐이다.

그냥 ‘그 아시아 여자애’ 정도의 의미로,

이름은 대체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 유형은,

정확한 철자를 묻고, 발음을 몇 번이고 따라 해보며

넌 영서야. 그게 너잖아.

다른 사람들한테도 반드시 그렇게 말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사실, 내 이름이 틀리게 불리는 것보다

애초에 정확히 부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태도

더 낯설고 피로하다.

그건 단순한 발음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름은 발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입에서 나를 호출하는 방식이다.

그 입술에 나의 존재가 얹힐 수 없다면

나는 이 구조 안에서 잠정적인 사람으로만 머문다.




물론 나도 안다.

다른 문화권의 이름을 외우는 일이 어렵다는 걸.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어려움을

‘그저 어려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외운다.

그 발음을 연습하고, 제대로 불러주려 한다.


어떤 날은 그게 이상하게 울컥하다.

이름이 제대로 불렸다는 사실보다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려는 마음의 구조

나를 감싸기 때문이다.


그건 ‘존중’이라는 말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건 나라는 세계의 형식을,

다른 사람의 언어 안으로

무리하게라도 옮겨보려는 시도다.




내 이름은 영서다.

한국식 이름이고,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조금 낯설다.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발음도, 철자도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는 알리시아라고 부르자고 하고,

누군가는 들리는 대로 Younso, 용시, 영이라 부른다.

때로는 그게 편하고, 그냥 넘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마다,

나는 나의 일부가 조금씩 통과되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게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반대로,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르려 애쓰는 사람을

만날 때 알게 된다.




이름은 단지 부호가 아니다.

그건 한 사람을 구성하는 언어적 구조의 핵심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바꾸는 건,

그 사람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고,

그 언어를 바꾸는 건,

그 사람의 존재 형식을 편의에 따라 수정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름을 바꾸는 건 언제나 쉽다.

익숙한 발음으로 대체하면 되니까.

하지만 나로 남는 일은 언제나 조금 어렵다.

상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니까.




나는 여전히 영서이고,

그 이름을 또박또박 말해보는 건

이름이라는 나의 언어로 세상에 말을 거는 일이다.


그 언어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통해,

나는 이 세계가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배운다.


그건 나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신은

누군가의 이름을 얼마나 정확히 불러주었는가.

그리고,

당신은 오늘 누구의 입에서 어떻게 호명되었는가.


우리는 모두,

이름이라는 가장 작은 언어를 통해

존재를 확인받고, 존재를 나눈다.


2020년 가을, 우리는 서로 이름을 정확히 부르겠다며 발음을 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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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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