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할 권리가 열어두는 세계
누군가에게만 반말을 쓰는 게 불편했다.
더 가까워졌다는 신호처럼 반말을 시작하는 것도,
그에 따라 다시 말을 낮춰야 한다는 규칙도.
왜 불편했는지 처음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말 한마디의 높낮이가
사람 사이에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는 높이고, 누구는 낮추는 언어.
그걸 쓰는 일이 나에게는 낯설고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웬만하면 모두에게 존댓말을 썼다.
친구든 후배든, 나보다 어리거나 가까운 사이든.
누구도 언어로 내려다보지 않겠다는
나름의 기준이었다.
그 선택은 때로 오해를 낳았다.
“너 거리 두는 것 같아.”
“되게 선민의식 있어 보인다.”
“잘난 척 하는 거야?”
나는 모두에게 같은 말투로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게 나만의 방식으로
위계를 거부하려는 소심한 반항이었다.
스페인에 와서,
말투가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 경험을 반복하게 됐다.
이름을 부르며 “Oye(저기)”, “Toma(받아)”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그게 무례하거나 예의 없는 게 아니라,
그저 기본값이라는 사실.
나이나 직급, 관계의 길이와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tú(너)라고 말하고,
형, 동생, 선배 같은 호칭도 없다.
존댓말은 있지만,
그건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말이 가벼워진다는 건,
그 말이 의미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나누는 도구로 쓰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 차이는 학교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스페인에서 대학 수업을 듣는 내내,
학생들은 교수의 이름을 부르며 자유롭게 질문했다.
“라우라, 나 이거 잘 모르겠어.”
“근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
정제된 말투도, 의례적인 서두도 없었다.
질문은 허가받는 행위가 아니라, 대화의 출발점이었다.
한국에서 우리는 늘 타이밍을 재야 했다.
“교수님,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먼저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스페인에서는 말의 형식보다
그 말이 움직이는 방향이 먼저였다.
틀릴까 봐 두려워하거나,
예의 없다는 오해를 받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 분위기가 질문을, 질문이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나는 그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모두에게 존댓말을 고수했던 건
그저 말투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질문이 불가능한 분위기에 대한
직감 어린 저항이었음을.
누군가를 높이면, 누군가는 낮아진다.
서로가 같은 높이에서 말하지 못하면
대화는 쉽게 상하관계로 기운다.
그 차이가 말을 막고,
질문을 망설이게 만든다.
질문은 단순한 궁금증의 표현이 아니다.
질문은 구조에 대한 의문이자,
때로는 상식에 대한 저항이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일은 허락되지만,
익숙한 것을 의심하는 질문은 종종 부담스러워진다.
특히 위계가 견고한 사회일수록
질문은 권한의 문제로 바뀌고,
그 권한은 소수에게만 주어진다.
말투는 그 구조의 일부다.
누가 질문할 수 있는가,
누가 질문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질문이 오가는가.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더 나은 방향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존댓말을 고수했던 그 시절의 나는
말의 높이보다 말의 가능성을
더 신경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질문이 닫힌 언어에서는
변화도 함께 닫히기 때문이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여전히 말을 조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 조심이
언제든 질문을 꺼낼 수 있는 세계를 열어준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