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은 잘못이 없다
처음 그 친구의 차를 봤을 때,
‘이 차가 아직 굴러간다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도어는 조금 헐거웠고, 창문은 두 번쯤 올려야 닫혔다.
“중고로 샀어. 예전엔 친구들이랑 돌려 쓰던 건데,
지금은 나 혼자 타.
되게 싸고 괜찮아. 너도 필요하면 알아봐 줄게.”
차 가격은 1,500유로쯤이었나. 정확하진 않다.
다만 그는 그 차를
‘잘 굴러가니까 괜찮은 차’라고 말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나는 한국에서 자랐다.
그리고 한국에서, 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한때 엄마는 모닝을 타고 다녔다.
나는 그 옆자리에 자주 앉아 있었고,
그 차가 도로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깜빡이를 켜도 좀처럼 차선을 비켜주지 않던 순간들.
모닝이라서, 작고 저렴한 차라서,
존중받지 못하는 감각.
그건 굳이 말로 설명되지 않아도 명확했다.
한국에서는 차가 사람을 설명한다.
어떤 차를 타느냐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건 단순히 자동차에 대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으로 읽히는 삶’을 살아왔다.
무언가를 증명하려면,
먼저 눈에 띄어야 했다.
옷, 브랜드, 직장, 차종…
모든 것이 사회 속에서
개인을 식별하고 분류하는 정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라는 사람의 가치도 함께 측정되었다.
물론, 누구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산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사회가 그렇게 작동해왔고,
그래서 우리가 익힌 생존 방식이었다.
스페인에 와서,
나는 처음으로 그 리듬이 뒤틀리는 경험을 했다.
누가 어떤 차를 타든,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작고 낡은 차,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차,
오래된 시트의 차.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타고 다녔다.
그리고 아무도,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왜 그런 걸 굳이?”라는 눈길이 따라붙곤 했다.
지불 가능한 범위 안에서,
기능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식으로 여겨졌다.
그건 조금 낯선 감각이었다.
‘나를 과시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
‘속도가 나지 않아도 괜찮은 리듬’
그곳에서 사람들은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물론 스페인이라고
모든 게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눈치도 있고, 불합리도 있고, 모순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배운 건 단 하나다.
가진 것을 덜어내도,
나는 여전히 나라는 것.
그건 단순한 소비 습관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전제 자체가 다른 사회에서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경험이었다.
차가 굴러가기만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친구의 어조가 마음에 남는 이유를
이제는 안다.
그건 차에 대한 태도라기보다,
삶에 대한 태도였다.